글: 소가노대(蕭家老大)
유백온은 명나라초기의 개국공신이며, 한때 주원장에게 중용되었다; 이선장도 주원장의 믿을만한 신하로 주원장으로부터 중용되었다. 이 두명의 문신이 대결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립한 후, 중앙행정기관은 원나라의 중서성(中書省)을 본받아 이를 기초로 약간 개혁한다.
원나라제도에 따르면, 중서성에는 좌우승상의 두 승상을 둔다. 평장정사(平章政事)를 약간명 두고, 좌우승(左右丞)등의 직위가 있다. 그중 좌우 두 승상은 모두 정직(正職)이고 우승상이 좌승상보다 약간 높았다. 평장정사는 부직(副職)이다. 좌우승은 구체적인 집행자이다. 주원장은 평장을 없애과 좌직이 우직보다 높게 고쳤다. 나머지는 원나라의 제도를 그대로 쓴다.
이선장은 전쟁시기에 계속하여 여러 신하들 중 우두머리였기 때문에, 나라를 세운 후에도 좌승상의 지위는 그가 차지한다. 주원장은 회서(淮西)에서 시작하는데, 공신들도 대부분 회서출신이다. 주원장이 공작(公爵)을 6명 봉하는데, 모두 회서사람이다. 후작(侯爵) 28명중에서도 절대다수가 회서사람이다. 이렇게 하여 방대한 회서집단이 형성된다.
주원장이 황제에 오른 후, 여러 장수들과는 자연스럽게 거리가 멀어진다. 원래 여러 장수들간의 조화를 책임졌던 이선장은 주원장과 여러 장수들간의 소통의 교량이 된다. 회서공신들은 더 이상 주원장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었고, 방향을 바꾸어 이선장이라는 큰 나무에 의존하게 된다. 회서공신들이 이선장의 주위에 긴밀하게 단결해있어, 이는 주원장에게 하나의 위협이 된다.
주원장은 일찌기 "장량(즉, 유백온)"을 써서 "소하(즉, 이선장)"을 견제하려고 생각했다. 유백온은 회서집단에 속하지 않고, 이선장과는 갈등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홍무원년(1368년), 명군이 개봉을 공격하여 함락시킨다. 주원장은 개봉으로 가서 낙양을 수도로 삼을 수 있을지 살펴본다.
떠나기 전에, 어사중승(御史中丞) 유백온과 이선장으로 하여금 태자를 보정(輔政)하게 하고, 남경에 남아서 지키게 한다. 유수(留守)기간동안 유백온과 이선장간에 갈등이 일어난다. 당시 유백온은 송, 원은 관대한 통치로 천하를 잃었으므로 거기에서 교훈을 받아 마땅히 기강을 엄격히 해야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모든 어사들에게 지시하여 신하들을 감찰하게 한다. 그후 황태자에게 보고하여 처리하게 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불안해 하게 되고, 많은 사람들이 유백온을 미워하게 된다.
중서성 도사(都事) 이빈(李彬)이 법을 어기고 부정부패를 저지른다. 법에 따르면 마땅히 참형에 처해야 했다. 이빈은 이선장의 심복이고, 이선장을 위하여 많은 불법적인 일들을 해주었다. 이선장이 유백온을 찾아가서, 그에게 치죄를 잠시 미뤄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유백온은 이선장의 부탁을 전혀 들어주지 않고 이빈을 체포하여 감옥에 넣는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어 개봉의 주원장에게 보고한다. 얼마 후 주원장은 처형을 허가한다는 회신을 보낸다.
이선장은 불만이었다. 그는 행형시간을 늦추려고 애쓴다. 그리하여 주원장이 돌아온 후에 다시 면전에서 관대한 처리를 청하려 한 것이다. 그리하여 유백온에게 이렇게 말한다. 현재는 비가 내리도록 기우제를 드리고 있으니 사람을 죽이는 것은 적절치 않다. 그러나, 유백온은 그를 죽이면 하늘이 반드시 비를 내려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이빈을 죽여버린다. 이선장은 무척 화가난다. 주원장이 돌아온 후, 이선장은 즉시 유백온이 제단 아래에서 사람을 죽여 대불경을 저질렀고, 그리하여 하늘이 비를 내리지 않았다고 주원장에게 보고한다. 이선장의 다른 심복들고 유백온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들도 속속 그를 고발하는 글을 올린다.
하늘은 유백온 편이 아니었던 것같다. 이빈을 처형한 후 계속하여 비가 내리지 않았다. 유백온이 말한, "그를 죽이면, 하늘이 반드시 비를 내려줄 것이다"는 예언은 실현되지 못했다.
비를 내리게 하기 위하여 유백온은 주원장에게 3가지 건의를 한다: 첫째, 전사한 사병들의 처들을 안치한 과부영(寡婦營)을 해산하여 그들이 개가하게 해주거나 혹은 고향으로 돌려보내 가족들과 함께 살 수 있게 해주도록 하며, 둘째, 사망한 장인(匠人)들을 관청이 대신 안장해주며, 셋째, 전 장사성(張士誠)의 수하들을 충군(充軍)하지 않도록 해주라는 것이다.
주원장은 그가 건의하는대로 모두 시행한다. 그래도 비는 내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주원장은 유백온에게 화를 내게 된다. 이때 마침 유백온의 처가 사망한다. 유백온은 고향으로 가서 처의 장례식을 치르겠다고 하고, 주원장은 그의 요청을 받아들인다. 동시에 유백온의 수하인 어사, 안찰사들을 개봉으로 좌천시킨다. 이선장은 앙갚음을 한 셈이다. 그해 겨울이 되어서야 주원장은 유백온을 다시 불러들인다.
이선장과 유백온의 갈등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선장은 언제든지 유백온이 더 큰 댓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준비하고 있었다.
대명이 건국된 후, 이선장과 유백온은 모두 반은퇴상태였다. 다만 두 사람은 손안에 쥔 권력을 놓지 않으려 했다.특히 상대방이 다시 복귀한 후 자신보다 유리한 위치를 점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갈등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으며,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유백온은 확실히 이선장의 적수가 못되었다. 이선장은 수대근심(樹大根深)하여 실력이 두터울 뿐아니라,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심복들을 대거 두었다. 그러나 유백온은 주원장과의 관계가 밀접하다는 것을 제외하면, 다른 원군이 없었다. 두 사람의 실력차이는 홍무3년(1370년)의 봉상(封賞)에서 이선장은 공신의 으뜸이 되나, 유백온은 공신에 이름을 올리지도 못한다. 두 사람의 차이는 엄청나게 크다고 할 수 있다.
홍무4년(1371년), 이선장과 유백온은 정식 은퇴한다. 그러나 물러나기는 했지만, 가만히 쉬고 있지는 않았다. 이선장은 그의 심복인 호유용(胡惟庸)을 내세워, 간접적으로 중서성의 대권을 장악한다. 유백온은 강호에 멀리 떨어져 있었다. 다만, 여전히 특수한 채널을 통하여 황제와의 관계는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정국에 영향을 미치고, 수시로 복귀할 가능성이 있었다.
비록 유백온이 아주 깊이 숨어 있었지만, 이것은 그저 표면적인 현상일 뿐이다. 그 실질은 대원재야(大員在野)의 청고(淸高)였다. 황제의 근신으로서 그는 중하층관리들과는 교류하려 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조정에 도와줄 세력이 없는 이유중 하나이기도 하다.
홍무7년(1374년), 주원장은 이선장의 심복인 호유용을 좌승상에 임명한다. 유백온은 그 사실을 듣고는 아주 우려한다. 앞으로 큰 재난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는 분노하여 이렇게 말한다: "내 말이 맞지 않는다면, 창생의 복이 될 것이다." 그의 우려는 완전히 공심(公心)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심(私心)이 있는 것이다. 그가 호유용을 멸시하는 원인은 이선장이 자신보다 우세한 지위를 계속 확대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 말이 호유용의 귀에 들어가고, 호유용은 그에게 원한을 품는다. 신구구한(新仇舊恨)이 마음 속에서 들끓었다. 그리하여 그는 보복하기로 결심한다.
절강과 복건의 경계지에 담양(談洋)이라는 지방이 있다. 역대 이래로 염도(鹽盜)의 소굴이다. 또한 방국진(方國珍)의 옛 근거지이기도 하다. 유백온은 주원장에게 상소를 올려, 이곳에 순검사(巡檢司)를 설치하여 관리하도록 건의한다. 그러나, 현지백성들은 이주를 원치 않아서 갈등이 나타난다.
호유용은 이 소식을 듣고, 사람을 시켜 유백온을 고발한다. 담양에는 왕기(王氣)가 있어 유백온이 그 땅을 차지하여 자신의 묘지로 삼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지 백성들이 그에게 땅을 내놓지 않으니, 유백온이 순검사를 두어서 백성들을 쫓아내려 했다는 것이다.
이 고발은 유백온의 급소를 찔렀다. 주원장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바로 대신들이 불충한 일을 꾸미는 것이다. 그걸 실시했건 아니면 그저 마음 속으로만 생각했건 모두 가만 둘 수 없는 일이다. 유백온은 풍수에 정통했다. 그러니 이 고발은 바로 유백온의 특장과 주원장의 금기가 교묘하게 얽히게 만들었다. 이는 두 사람을 잘 알고 있어서 완전히 주문제작한 것같았다.
주원장이 그 말을 듣자 아주 화를 낸다. 유백온의 봉록을 깍는다. 유백온은 겁이 나서, 남경으로 가서 주원장에게 해명한다. 그리고 남경에 머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백온은 병이 들고, 주원장은 호유용에게 어의를 데리고 가서 살펴보게 한다. 유백온은 어의가 준 약을 마시고 병세가 악화된다.
홍무8년(1375년) 삼월, 주원장은 친히 글을 써서 유백온에게 내린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그를 고향으로 데려가게 한다. 집에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백온은 사망한다. 향년 65세이다.
호유용의 유백온에 대한 무고는 일맥상통한다. 이 사건은 홍무초년 이선장과 유백온간의 '이빈안'을 둘러싼 알력의 결과이다. 이는 전형적인 보복살인이다.
세상이 공인한 제갈량에 비견되는 인물인 신기묘산의 군사 유백온에 결국 이선장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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