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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양현비(楊賢妃): 수수께끼같은 비빈, 왜 당무종(唐武宗)에게 사사되었을까?

by 중은우시 2020. 3. 13.

글: 소가노대(蕭家老大)


양현비는 수수께끼와 같은 비빈이다. <구당서>와 <신당서>의 후비전기에는 양현비에 관한 전기가 없다. 양현비의 이야기는 단지 당문종과 당무종의 본기(本紀)와 <자치통감>에 나올 뿐이다. 당무종은 이런 말을 했다. 재상 양사복(楊嗣復)은 일찌기 양현비에서 서신을 보냈는데, 그녀가 섭정황태후(攝政皇太后)가 되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서신에서 그녀를 고모(姑母)라고 불렀다. 만일 당무종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바로 양사복의 조부인 단보현위(單父縣尉) 양태청(楊太淸)의 딸뻘이 된다. 당목종(唐穆宗)연간의 명신이자 양사복의 부친인 양우릉(楊于陵)과 같은 배분이다. 당무종의 말에 따르면, 양현비에게는 양현사(楊玄思)라고 부르는 동생이 있다. 양현비가 병들었을 때 궁으로 들어가서 문벙을 하며 암중으로 소식을 전한다. 당문종(唐文宗)의 여덟째 동생인 안왕(安王) 이용(李溶)의 생모는 양현비(楊賢妃, 또 다른 여인이다)인데, 그녀와는 본가의 자매관계일 것이다. 이는 양현비가 왜 당문종에게 이용을 황태제(皇太弟)로 삼으라고 극력 권유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또한 당무종이 양현비를 사사하게 된 연유이기도 하다. 이당황실의 관계는 너무 복잡하다.


양현비가 언제 당문종의 후비가 되었는지는 이미 고증할 방법이 없다. 다만 개성2년(837년) 그녀는 이미 당문종의 구빈(九嬪)중 하나인 소용(昭容)이 되어 있었다. 이는 후비중에서는 3등급에 해당한다. 그녀는 사비(四妃)중 하나인 현비로 승격되고, 황태자 이영(李永)의 생모인 왕소의(王昭儀)는 사비중 하나인 덕비(德妃)로 승격된다. 양현미는 용모가 빼어났고, 영리해서, 당문종이 매우 총애하였으며, 그녀의 말이라면 다 들어주었다고 한다. 양사복은 개성3년 재상으로 승진한다. 다만 양현비가 그녀의 조카뻘인 양사복의 승진에 도움을 주었는지 여부는 알 수가 없다.


당문종은 두 아들을 낳았다. 장남은 이영이며, 왕덕비의 소생이다. 차남은 이종검(李宗儉)인데, 10살때 요절한다. 이영은 처음에 노왕(魯王)에 봉해졌다. 조정대신들은 여러번 상소를 올려 노왕 이영을 황태자로 삼으라고 청한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당문종이 좋아한 것은 당경종(唐敬宗)의 아들인 이보(李普)였다. 그래서 황태자를 정하는 문제는 망설이며 계속 미루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대화2년(828년) 이보가 요절한다. 당문종은 아주 슬퍼하며 이보는 도회태자(悼懷太子)로 추증한다. 그래도 그 슬픔이 가시지 않아 황태자를 세우는 일은 4년이나 미뤄두게 된다. 대화6년(832년) 당문종은 부득이 장남 이영을 황태자로 세운다.'


황태자의 생모인 왕덕비는 용모가 뛰어나지 않아, 당문종에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총애를 전혀 받지 못한다. 다만 황제의 총애를 받는 양현비는 자신보다 서열이 앞서게 된 왕덕비를 질투했다. 얼마 후, 왕덕비는 총애를 잃고 우울하게 지내다가 죽는다. 궁중의 소문에 따르면 그녀는 양현비의 중상모략으로 죽었다고 한다.


이영은 장난꾸러기였고, 소인들과 가까이 어울려 놀았다. 놀러다니는 것과 연회를 여는 것을 즐겼다. 아마도 당나라후기 황실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때문일 것이다. 양현비는 밤낮으로 당문종에게 황태자의 나쁜 점을 고한다. 양현비는 자식을 낳지는 못했지만, 모친에 대한 질투심이 아들에게까지 미친 것일 것이다. 시간이 흐르다보니, 당문종은 분노하여 황태자를 폐위할 생각을 품게 된다. 개성3년(838년) 구월, 당문종은 황태자 이영을 폐위할 생각을 해서 신하들을 불러모은다: "태자는 여러 잘못을 저지르고있어 대통을 이을 수가 없다. 페위시키고 새로 세우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여러 신하들은 모두 안된다고 말한다. 머리를 땅바닥에 조아리며 아뢴다: "태자는 나이가 어립니다. 최근 들어 잘못이 있기는 하지만, 장래 스스로 깨달아서 고칠 수 있습니다. 하물며 태자는 국본(國本)입니다. 가볍게 흔들어서는 안됩니다. 폐하께서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급사중 위온(韋溫)은 당문종에게 상소를 올려, "폐하는 아들이 하나 뿐입니다. 잘 가르치지 못해서, 소인들과 어울리게 되었는데, 이를 어찌 태자의 과실이라 하겠습니까?" 어사중승 적겸막(狄兼漠)도 통곡하며 눈물을 할리며 바닥에 업드려 강력히 간언한다. 여러 신하들이 극력 반대하므로, 당문종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조회를 끝내버린다. 이어서 여러 신하들이 연이어 상소를 올린다. 그러자 당문종은 조서를 내려 태자에게 소양원(少陽院)으로 돌아가도록 명하고, 시독 두종직(竇宗直), 주경복(周敬復) 두 사람을 소양원으로 보내 태자에게 강의하도록 명한다.


다만, 태자 이영은 나이가 어렸지만 성격은 고쳐지지 않았다. 시종 잘못을 시정하지 않고 여전히 놀러 다니고 연회를 즐겼으며, 소인들과 어울려 놀았다. 양현비는 다시 방공(坊工) 유초재(劉楚才) 및 금중(禁中) 장십십(張十十)등에게 비밀리에 당부하여 계속 태자를 험담하도록 한다. 당문종은 매번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태자를 불러서 면전에서 질책한다. 다만 폐위시키는 일은 시종 실행하지 못한다. 다시 1개월여가 흐르고, 태자는 소양원에서 머물고 있었다. 잠들기 전까지 아무런 병세도 없었는데, 잠을 자다가 급사해 버린다. 오관에서 피가 흐르고 사지가 퍼렇게 되었다. 당문종이 와서 살펴보니 이영이 죽은 모습이 아주 참혹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흘렀고, 급사원인을 묵묵히 생각해본다. 중독(당황실의 관용수단)같았다. 그러나 증거를 찾을 수는 없어서 그저 장례식을 치르고 마무리짓는 수밖에 없었다.


태자 이영이 신비롭게 급사한 후, 다시 1년이 흐른다. 후계자문제는 다시 의사일정에 올라온다. 양현비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계속 진언한다. 당목종의 아들 안왕(安王) 이용을 황태제(나중에 당무종은 단언했다. 영현비와 친척관계에 있는 이용이 양현비에게 붙은 것이라고)로 삼도록 청한다. 다만 당문종이 재상들에게 의견을 묻자, 재상 이각(李珏)은 황태제를 세우는 것보다는 조카를 세우는 것이 맞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당문종은 개성4년(839년) 당경종의 어린아들 진왕(陳王) 이성미(李成美)를 황태자로 삼는다. 그리고 책봉의식을 준비하게 시킨다.


유약한 당문종은 황태자 이영의 죽음에 대하여, 계속 마음 속에 담아두고 있었다. 한번은 궁중에서 잡기공연이 있었는데, 어린아이가 장대를 타고 오르는데, 모든 사람들이 박수치며 즐거워하고 있을 때, 장대 아래의 한 중년남자는 아주 긴장하고 겁먹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당문종은 그 모습이 기이하다고 여겨져서, 좌우에 물어본다. 좌우에서는 이렇게 대답했다. 장대 아래에서 긴장해 있던 남자는 바로 장대를 타고 오르는 아이의 부친이라고. 당문종은 그 말을 들은 후, 돌연 죽은 태자가 생각나서, 더욱 슬퍼졌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한다: "짐은 천자라는 고귀한 자리에 있으면서, 자신의 아들조차 지켜주지 못했구나. 어찌 슬픈 일이 아닐 수 있는가." 그리고는 바로 어가를 돌려 궁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방공 유초재등 4명과 장십십등 수명을 불러서 질책한다; "태자를 해친 것은 모두 너희들이다. 태자가 죽었으니 너희가 목숨으로 갚아라." 유초재등은 바닥에 엎드려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원하나, 당문종은 듣지 않는다. 그리고 태자를 해친 죄로 좌우에 일러 경조윤에게 보내 곤장을 때려 죽인다. 그는 이후 마음의 상처가 병이 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이때부터 당문종은 병이 날로 심해진다.


개성5년(840년) 정월, 당문종은 스스로 더 오래 버티기 힘들 것으로 생각해서 추밀사(樞密使) 유홍일(劉弘逸), 설계릉(薛季棱), 재상 양사복, 이각을 입궁하게 한다. 그리고 태자감국(太子監國)을 하도록 한다. 당문종의 병이 더욱 악화되고, 조정내외는 모두 불안해 한다. 구사량(仇士良)드은 태자를 세운 공이 자신들에게 있지 않은 것을 걱정한다. 그리하여 계속 조정신하들의 동향을 주목한다. 재신과 대신들이 들어오자 구사량, 어홍지(魚弘志)등은 황제의 침실로 쳐들어가서, 죽기 직전의 당문종 및 보정(輔政)하는 중신들을 향헤 광언(狂言)을 내뱉는다: "태자는 나이가 어리고, 일찌기 병도 앓았으니, 반드시 태자를 새로 세워야 합니다!" 재상 이각이 즉석에서 반박한다: "황상이 이미 진왕을 태자로 삼았는데, 어찌 도중에 바꿀 수 있단 말인가" 그는 구사량등이 새로 태자를 임명하려는 시도를 격렬하게 반대한다. 구사량, 어홍지는 화가 나서 얼굴이 시퍼래지진다. 흥하면서 소매를 떨쳐 떠난다. 양사복과 이각은 그들이 다루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핑계를 대고 그들도 물러난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진다. 그날 밤, 구사량등은 조서를 위조하여, 당목종의 다섯째아들이자 당문종의 동생인 영왕(潁王) 이염(李炎, 원래 이름은 李瀍)을 황태제로 세운다. 다음날 새벽, 병사들을 영왕의 집으로 보내어 입궁시키고, 국정을 주재하게 한다. 동시에 당문종이 막 황태자로 세웠던 이성미는 다시 진왕으로 격하시킨다. 선소원부사(仙韶院副使) 위지장(尉遲璋)은 황태제를 세우는 데 불만이 있었다. 그는 병력을 일으켜 정변을 기도한다. 구사량등은 이를 알고 그를 붙잡아 참수한다. 이틀후, 32세의 당문종이 병사한다. 구사량등은 당문종의 영구 앞에서, 황태제 이염을 황제로 즉위시키니 그가 바로 당무종이다.


당무종은 즉위후, 자신을 옹립한 공로가 있는 구사량을 초국공(楚國公)에 봉하고, 어홍지를 한국공(韓國公)에 봉한다. 구사량은 자신이 옹립한 공을 내세우기 위하여, 관심있는 척하면서 당무종에게 이런 말을 한다: "양현비는 일찌기 당목종의 아들 안왕 이용을 옹립하려고 모의했습니다. 비록 우리들이 발견하고 막았기 때문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안왕, 성왕은 여전히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양현비, 안왕, 성왕을 제거하여 다른 사람들이 다시 옹립하는 일이 없도록 막아야 할 것입니다." 그의 말은 당무종의 뜻과도 일치했다. 당무종은 즉시 조서를 내려, 세 사람에게 자진을 명한다. 가련한 안왕 이용, 진왕 이성미는 이렇게 아무런 죄도 없이 죽게 된다. 경국경성의 미모를 지닌 양현비는 더 이상 살 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 음독자결한다. 


이를 보면 후궁이 정치에 간여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칫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