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이순(李珣): 페르시아인으로 만당(晩唐)의 저명한 시인이 되다

중은우시 2019. 1. 16. 16:22

글: 도역사(淘歷史)


당나라는 경제가 번영했고, 주변의 나라들과도 사이가 좋았다. 수시로 토번, 서역등의 상인이 당나라로 와서 경제무역활동을 진행했다. 어떤 사람은 돈을 벌어서 고국으로 돌아가고, 어떤 사람은 계속 남아서 돈을 벌며 정착했다. 만당시인 이순의 가족도 바로 이렇게 당나라에 남는다.


이순의 조상은 향약(香藥) 장사를 했다. 당나라에 온 후에, 향약을 팔아서 돈을 번 다음에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당시는 국태민안하고 경제도 번영하여, 이씨집안의 향약장사도 워낙 잘 되었다. 그러다보니 이순의 조상은 당나라에 남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안사의 난 이후에는 사천 재주(梓州)로 옮겨서 거주한다. 당나라에 하루빨리 융합되기 위하여, 이순의 조상은 성도 '이(李)'로 고쳤다. 이것만 봐도 그들 집안은 당나라를 무척이나 좋아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진심으로 당나라에서 어울려 살아가고 싶어했다. 이는 확실히 이순에게 영향을 미친다.


855년, 이순이 태어났다. 상인집안에서 태어났기 떄문에 보고 들은 것이 많아 견식이 있었다. 그리고 어릴 때의 이순은 총명하기 그지없었다. 비록 모국어는 페르시아어이지만, 듣고 보는 것이 있다보니 한어실력도 상당했다. 한어를 잘할 줄 안다고 하여 진정한 당나라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매번 이순이 친구들과 어울려 놀 때면 당나라의 어린 친구들은 몇 구절 당시를 외워대곤 했다. 이를 통해 자신읜 서당에서 글을 배우고 있고, 향후 당나라이 동량이 될 것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이순은 그저 흠모할 뿐, 질투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전의 어렸던 친구들이 자라서 과거에 응시할 준비를 하자, 이순은 더 이상 마음을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같이 당나라의 밥을 먹고 자란 친구들이 과거로 인하여 각각의 신분이 나뉘어 버린다. 이순은 이것을 참지 못했다: "안돼! 나도 과거를 보겠다!"


여러번 부모에게 간절히 청하여, 소년 이순은 마침내 서당에 들어가 공부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열심히 공부했고, 열심히 외우고, 열심히 썼다. 그러나 친구들은 마땅치가 않았다. 왜 그런가? 이순은 집에 돈이 많았다. 게다가 그는 얼굴도 잘생겼고 키도 컸다. 그런데 과거까지 치러르겠다니, 당연히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많은 친구들이 그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윤씨 친구가 있는데, 이순과의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비록 친구이기는 하지만 그는 자주 시를 지어 이순을 조롱했다: "강학문장(强學文章, 억지로 글을 배운다)" 이는 비록 놀리는 말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소년 이순의 의지를 더욱 붇돋아 주는 면도 있었다.


속성으로 공부하여 이순은 마침내 과거날 과거시험장에 들어간다. 당나라학생들이 어려워하는 시험문제에 대하여 이순은 술술 써내려가서 합벽하여 수재(秀才)가 된다. 이순은 더욱 기분이 좋아졌고, 그후 문예계에서 활동했다. 산과 물로 놀러다니면서 시를 짓고 부를 지었다. 그는 적지 않은 서정시를 지었다.


귀로근(歸路近), 구현가(扣舷歌),

채진주처수풍다(採珍珠處水風多)

곡안소교산월과(曲岸小橋山月過)

연심쇄(煙深鎖),

두구화수천만타(豆蔲花垂千萬朵)


이전에 그를 조롱하곤 했던 윤씨 친구는 이순이 이렇게 잘나가는 것을 보자 뒤에서 다시 한번 그를 놀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가요절득동당계(假饒折得東堂桂)

호취훈래야불향(胡臭薰來也不香)


이순은 그냥 웃고 넘긴다.


무인들은 항상 풍아(風雅)를 즐긴다. 가끔 희루나 기원을 다니기도 한다. 이순도 당연히 그런 점을 벗어나지 못했고, 할 일이 없으면 가곤 했다. 생각지도 못하게 이순은 금방 많은 여자팬들을 거느리게 된다. 어떤 여자팬은 재색을 검비했고, 이순과 시로 화답을 했다. 이순도 기꺼이 그에 응하여 시인의 행열에 끼어든다. 나중에 쓴 많은 시들은 각종 문집에 실려 있다.


그러나 이때의 당나라는 번진할거로 이미 사방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많은 페르시아출신의 상인들은 속속 고국으로 쫓겨난다. 이순의 집안도 귀국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순은 가고 싶지 않았다. 당나라에 뿌리를 박고 싶을 뿐아니라, 당나라에서 관직에 나가고자 했다. 그는 시로 이름을 널리 떨쳤고, 수재신문이므로 이순은 촉왕 문하의 빈공(賓貢)으로 추천받는다. 그리하여 촉왕의 아들인 왕연(王衍)과 가까운 친구가 된다. 지위가 이렇게 차이나는 두 사람이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원래 역대이래로 황친국척, 부호들은 돈과 권력을 가진 후에 장생불사를 꿈꾸게 되어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단약을 먹는 것이다. 이순의 가족은 비록 단약을 만들지는 않았지만, 왕연은 그가 향약을 파니까 단약을 제조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 사람의 공동화제는 어떻게 단약을 만드느냐에 있었다. 다만 단약을 만드는 것은 돈이 많이 드는 일이다. 집안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았다. 이전에 전란으로 인해 약방은 일찌감치 문을 닫았는데, 단약까지 제조하게 되면 돈이 너무 많이 든다. 그래도 이순은 혼자서 고집을 피웠다. 그는 단약을 만드는 것이 사람을 장수하게 만드는 것이고, 좋능 일을 하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원인이라면, 왕연과 함께 어울리면서 이순의 친구들은 부호 아니면 귀족이 된다. 그들은 이순을 아주 높이 떠받들었다. 이순은 아주 만족한다. 당나라가 비록 907년에 이미 멸망했지만, 그는 여전히 중국에 머물기로 결정하고 중국을 자랑으로 여겼다. 아쉽게도 단약을 만드느라 가산을 탕진하여, 생활이 점점 곤경에 빠진다. 이순도 더 이상 단약을 만들 수 없게 되었지만, 이미 호랑이등에 탄 형국이었다.


918년, 사천에 할거하며 황제를 칭하던 촉왕이 죽고, 왕연이 즉위한다. 왕연은 장생불사를 원했고, 그리하여 게속 이순을 독촉하여 단약을 만들도록 한다. 그러나, 단약은 아직 만들어지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전쟁이 벌어진다. 후당(後唐)이 전촉(前蜀)을 공격해 들어온 것이다. 이제는 목숨을 보전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런데 무슨 단약을 만들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이순은 못숨을 보전했다. 그러나 왕연은 죽었다. 역사상 왕연에 대한 평가는 높지 않지만, 페르시아인인 이순에 있어서 왕연은 지우지은(知遇之恩)이 있다. 일개 외국인이 전촉 조정에서 관직을 얻고 총애를 받는 것은 실로 쉽지 않은 일이다. 이순은 처음으로 전쟁이 얼마나 잔혹한지 느꼈고, 권력쟁탈전이 이처럼 피비린내난다는 것을 느꼈다.


전촉이 멀망했지만, 생활은 계속되어야 했다. 새로 건립된 후당은 이때 그에게 손길을 내민다. 그에게 후당을 위해 일해달라고 청한 것이다.


이순은 당시에 거절한다. 거절한 이유는 모든 권력자들이 깜짝 놀랄만한 것이었다: "나는 비록 페르시아인이지만, 나는 중국을 집으로 여기고, 이곳에서 단약을 만들고 싶다. 바라건대 언젠가는 모든 사람이 내가 만든 영단묘약을 먹고 모두 장생불사할 수있으면 좋겠다." 기실, 이순의 말에 숨은 뜻은 전쟁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살아남은 사람들은 오래 사는게 좋겠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어느 군주가 이런 사람을 싫어하겠는가


이순이 후당에 귀의하는 것을 거절한 후, 장거리 여행을 떠난다. 그는 도처에서 약재를 수집하고, 단약을 만드는 비법을 찾아다닌다. 그는 이렇게 자신이 중국인이 장생불사할 수 있게 도와주겠다는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다.


그후, 이순은 남해에서 여러 해동안 살았고, 그는 수집안 약재와 약의 성질을 정리하여 기록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책이 <해약본초(海藥本草)>이다. 이 책은 상세하게 각종 약물의 모양과 성질등을 적었다. 책에 기록된 해동피(海桐皮, 천축계(天竺桂)등의 약재는 당시에 다른 본초저작에는 실려있지 않은 것들이다. 후세에 약재를 연구하는데 참고자료가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옛날의 준미하던 소년은 이미 세월이 흘러 아저씨가 되었다. 여러 해동안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닌 이순은 마침내 다시 재주로 돌아온다. 그리고 단약제조에 집중한다. 세상에 어디 자생불사하는 단약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순은 뛰어난 재주를 지니고 있지만, 그것을 모두 쓸데없는 곳에 쏟았다. 원래 궁박했던 가정은 마침내 세끼조차 제대로 먹기 힘든 지경에 이른다.


옜날의 부유했던 이씨집안은 이제 사람들의 전설 속으로 사라졌다. 더 이상 번화하지는 않지만, 이순의 일념을 바뀌지 않는다. 설사 이런 처지가 되었지만, 이순은 단약제도를 포기하지 않는다. 여전히 중국대지를 계속 유랑하면서 사람들을 장생불사하게까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목숨을 연장할 수 있도록은 할 수 있게 하려 했다. 이순의 연단은 결국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의 중국대지에 대한 사랑은 그의 글에서 확실히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