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송나라는 어떻게 몽골의 공격을 45년간 막아낼 수 있었을까?

중은우시 2019. 1. 19. 01:20

글: 만주미세계(萬州微世界)


몽골이 금나라를 멸망시키는데는 23년의 시간을 소요했는데, 송나라를 멸망시키는데는 45년이 걸렸다. 어떻게 부패하기 그지없고 환관이 설치던 남송이 그렇게 오랫동안 버틸 수 있었을끼



몽골 굴기전의 송, 금, 서하, 서요

1. 비바람에 흔들리는 남송


1127년의 정강지변이후 북송이 멸망하고, 중원지역은 소수민족의 손에 넘어간다. 조씨황실은 남천하여 임안(지금의 항주)을 수도로 삼는다. 역사에서는 남송이라 부른다.


남송은 전기에 비교적 안정되었으나 후기에 접어들면서 부패하고 국력이 날로 쇠약해졌다. 1224년, 19세의 조윤(趙昀)이 등극한 후, 권신이 권력을 장악하고, 환관이 횡행하며, 황제는 이학(理學)에 빠져서 여색을 탐했다.


비록 조윤이 친정한 이후에 일찌기 몽골군과 연합하여 금나라를 쳤지만 금나라를 멸망시킨 후, 몽골군은 병력을 3로로 나누어 남송을 공격한다.


그때도 조윤은 여전히 황음한 생활에 빠져 있었고, 황제가 조정을 돌보지 않으니, 관리들도 이를 본받아 남송의 국면은 날로 쇠약해졌고, 국가의 군대도 부패가 극심했다.


국가의 대량의 재정은 국방에 사용되지 않고, 권력자들과 결탁하는데 쓰였다. 군기가 삼엄한 부대마저도 이러했으니 다른 부대의 상황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금나라가 멸망한 후, 남송은 대륙에서 고도(孤島)가 된다.


1240년, 수도 임안에 기근이 발생한다. 벌건 대낮에 사람들이 먹거리를 빼앗고, 시장에서는 인육을 팔았다. 이런 상황으로 임안의 사람들은 모두 위기를 느끼게 되었고, 인심이 흉흉했다. 황제는 그러나 여전히 여색을 탐하였고, 황궁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1260년, 태자 조기(趙禥)가 등극한다. 그의 황음정도는 부친 조윤에 못지 않았다. 매일 후궁에서 연회를 열고 비빈들과 술마시고 놀았다. 황제는 가사도(賈似道)를 태사(太師)로 임명하여 조정을 모조리 그에게 처리하도록 맡겼다. 가사도도 크게 음란하여 조정은 더할 나위없이 어두웠다.


이처럼 부패한 통치로, 남송은 멸망의 심연으로 한걸음 한걸음 빠져들고 있었다.


2. 상제절편지처(上帝折鞭之處)


몽골은 송나라와 연맹을 맺어 금나라를 공격했가. 금나라가 멸망한 후에 남송은 병력을 보내어 금나라가 점거하고 있던 중원영토를 수복한다.


그러나, 남송의 거동은 몽골의 이익을 건드렸다. 몽골은 남송이 다시 중원으로 돌아오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리하여 남송과 전쟁을 시작한다. 결국 남송은 대패하고 진령(秦嶺), 회하(淮河)일선으로 물러나서 지켰다. 이는 송과 몽골간의 전쟁이 전면적으로 발발한 것을 의미했다. 역사에서는 이를 "단평입락(端平入洛)"(1234년)이라고 부른다.



송과 몽골의 남북협공으로 금나라는 최후를 맞이한다.



몽골이 남송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하면서 몽골칸 몽케는 병력을 3로로 나누어 남송으로 진격한다:

제1로: 몽케가 친히 주력을 이끌고 육반산(지금의 영하)에서 북에서 남으로 합주(지금의 중경)를 공격한다.


제2로: 쿠빌라이와 그의 동생이 악주(지금의 무한)를 공격한다.


제3로: 몽골명장 우리앙카다이(兀良合臺)가 부대를 이끌고 운남에서 북으로 담주(潭州, 지금의 장사)를 공격한다.


그들은 삼로의 군대가 회합한 후 임안으로 진격하고자 계획했다.


먼저 제1로를 보자. 1242년, 몽골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남송의 장수 여개(余玠)를 사천으로 보낸다. 그는 부임후 혁신을 통해 몽골을 막아내어 사천을 지키겠다고 결의를 다진다.


여개의 항몽전략은 3단계로 진행되었다:


제1단계: 중경의 험산악수의 지형을 이용하여, 새로 10여개의 견고한 성을 지어 몽골군의 기병에 대항한다.


제2단계: 중경 부근 각주의 주민을 새로 지은 견고한 성안으로 이주시킨다.


제3단계: 상세하고 엄밀한 수성전략을 세워서, 매 성을 엄밀히 사수하여, 몽골군의 기습을 대비한다.


여개가 세로 항몽전략을 세운 후에 중경 부근에 강에 접한 견고한 성과 보루가 건설된다. 그중 조어성(釣魚城) 및 기타 7개 성은 방어에서 중요한 전략적 위치를 차지했다. 그리하여 이를 "천중팔주(川中八柱)"라 부른다.




조어성은 장강의 3개 지류가 만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조어산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중경성에서는 5킬로미터 가량 떨어져 있고, 삼면이 물로 둘러싸여 있다. 조어성은 삼강을 통제할 수 있고 몽골기병이 중경으로 진격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지세가 험준하지만, 몽골은 병사들도 강하고 말도 튼튼했다. 그래서 조어성에 대한 공격을 감행한다. 여러번 강공을 펼쳤지만, 송나라군민은 일치하여 저항했고, 몽골군은 계속 실패한다.



조어성의 지세


공격은 다음 해 여름까지 계속된다. 사천동부의 여름은 혹독하게 덥다. 북방초원에서 온 유목민족은 이렇게 높은 온도를 견딜 수가 없다. 역병이 횡행하고, 더위를 먹고, 학질에 걸리는 등 질병이 몽골군내에 만연한다. 여러 사병들은 심각한 부상을 입고 심지어 목숨을 잃기도 했다.


육월초, 송나라군대는 전선 만척을 이끌고 조어성을 구원하러 간다. 그러나 중도에 막힌다. 나중에 조어성의 수비장수는 공격은 최선의 방어로 보고, 여러번 밤에 기습한다. 그리하여 몽골군은 불안해 하며 밤에 잠이 들지 못한다.


몽케는 공성을 5개월이나 지속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한다. 칠월초, 몽케는 국면이 갈수록 전투를 지속하기에 불리해지자, 친히 나서서 독전한다. 종성에 대하여 가장 맹렬한 진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한다.


누가 알았으랴 마지막에 그는 포화에 상처를 입고, 병이 든지 얼마 후에 조어성 아래에서 사망하고 만다.


3. 몽골내란


동생 쿠빌라이는 제2로 - 악주로 행군하는 도중에 몽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장수들은 속속 쿠빌라이에게 하루빨리 북으로 돌아가서 칸의 자리에 앉을 것을 권한다.


왜 쿠빌라이는 악주를 공격하는 것을 선택했을까? 악주는 장장 중류에 위치하고 있어, 악주는 서로는 촉을 지원해줄 수 있고, 동으로는 회하를 지원해줄 수 있으며, 북으로는 형주를 진압할 수 있다.


악주를 빼앗은 후에 양양을 격파하게 되면 남송는 더 이상 지킬 곳이 없어지니, 몽골군은 직접 임안으로 쳐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중도에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백명을 선봉으로 보내어 장강을 건넌다.


송군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몽골군을 대거 도강하도록 놔두는 바람에 악주성은 물샐픔없이 포위된다.




악주가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남송조정은 혼란에 빠진다. 즉시 각로 송군에게 악주로 가서 구원하도록 명한다. 그리고 가사도를 우승상 겸 추밀사로 임명하여 한양(漢陽)으로 가서 독전하게 한다.


쿠빌라이의 공세는 갈수록 맹렬해 졌다. 가사도는 조정을 속이고, 몽골군에 화의를 청한다. 몽골군이 퇴각만 하면, 송나라는 몽골에 칭신납공하겠다고 한 것이다.


바로 이때 쿠빌라이도 소식을 듣는다. 일부 몽골귀족이 쿠빌라이의 동생 아릭부케를 칸으로 옹립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쿠빌라이는 자신의 자위가 보전될 수 없을 상황이 되자, 가사도와 비밀협정을 맺는다.


가사도는 장강이북의 토지를 몽골에 할양하기로 약속하고, 매년 몽골에 은, 견 각 20만을 바치기로 한다. 임안으로 돌아온 후, 가사도는 자신의 전공을 크게 써서 알리고, 사적으로 약속한 일은 숨긴다.


쿠빌라이가 북으로 돌아간 후, 여러 귀족의 지지를 받아, 순조롭게 칸의 지위를 게승한다. 그 후에 사신을 남송으로 보내어 가사도가 약속한 것을 이행하라고 요구한다. 사신이 임안에 도착했을 때, 먼저 부사(副使)를 가사도에게 보낸다. 가사도는 속임수가 드러날 것이 겁나서 사신을 억류한다.


쿠빌라이는 대노하여, 남송으로 진격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때 몽골의 내부에 내분이 일어난다. 쿠빌라이의 동생 아릭부케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쿠빌라이와 칸의 자리를 놓고 다투다보니 쿠빌라이는 남송을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1264년, 쿠빌라이는 아릭부케를 격패시키고 철저히 몽골의 4년에 걸친 내란을 종식시킨다.


쿠빌라이는 이전의 몽골칸의 방식을 바꾸어, 더 이상 점령한 남송의 성에 대한 도살을 진행하지 않고, 유화적인 수단을 이용하여 남송의 장수들의 항복을 받아낸다.


몽골의 4년내란기간동안, 남송은 숨쉴 틈이 생겼다. 그리하여 이후 양번(襄樊)전투에 견실한 기초를 닦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남송은 이후 수년간 더 나라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4. 양양결전


쿠빌라이가 제정한 신 전략계획은 하루빨리 송나라를 멸망시키려면, '먼저 양양을 공격하여, 방어막을 걷어내는 것"이 필요했다.


양양(襄陽)(을 잃는다면, 남송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게 된다. 용맹한 몽골기병은 장강중하류 평원을 아무런 막힘없이 달릴 것이고, 남송은 끝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쿠빌라이는 송나라를 멸망시키는 계획의 중점을 양양에 둔다.


1251년 남송은 몽골군의 수중에서 양양을 수복한 후, 양양의 전략적 위치를 중시하기 시작한다.


황제는 대량의 인력, 물력을 보내어 십여년간 경영하여, 양양은 새로 튼튼한 성으로 재건된다. 병사도 정에병이고, 양식도 충분한 중요도시가 된다. 그리하여 양양은 남송의 장강 상류의 방어막이 된다.


양양의 수비장수 여문덕(呂文德)은 몽골군과의 수십년에 걸친 전투에서 적지 않은 경험을 쌓았다. 동시에 약간의 가족무장을 배양한다. 나중에 몽골군과 전쟁을 벌일 때 이들이 중요한 작용을 했다.


1267년 11월, 몽골군은 계책을 내어 여문덕과 양양의 바깥에 호통십시(互通集市)를 설립할 것을 상의하자고 한다. 여문덕은 경제적 이익을 중시하여 이에 응한다.



양양과 번성은 강의 남북양안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하여, 몽골군은 신속히 보루를 쌓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양양으로 들어가는 식량통로를 막아버린다. 여문덕은 나중에서야 속은 거을 알고 병석에 눕는다.


1268년, 쿠빌라이는 몽골군대를 몽골에 항복해온 수군을 보내어 양양, 번성을 공격한다. 양양번성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 남송조정은 여러번 사천과 양회의 군대를 파견하여 양번을 증원하려 하나, 모두 성공하지 못한다.


1269년, 양회원군과 몽골군이 한강에서 전투를 벌인다. 양회원군은 몽골군을 당하지 못하여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몽골군은 "위점타원(圍點打援)" 즉 한 곳을 포위하고나서 지원하러 오는 병력을 치는 전략을 썼다. 양양번성 양성을 3년간 죽어라 포위하면서, 지원오는 송나라의 병마를 대거 소멸시킨다. 1273년에 이르러, 양양성안의 식량과 땔감이 부족한 상황에 이른다.


몽골군은 전략을 조정하여, 분리전략을 쓴다. 양양과 번성을 나누어서, 번성을 맹공한다. 1273년 정월, 결국 번성이 함락된다.


이월, 양양은 고립무원의 상황하에서 남송수비장수가 성문을 열고 투항한다. 양양,번성 두 성은 5년간이나 굳게 지켜냈던 것이다. 무수한 혈전을 벌였다. 그러나 남송은 이렇게 긴 기간동안 제대로된 원병을 보내지 못했고, 새로운 방어선을 설치하지도 못했다. 그저 예전처럼 가무를 즐길 뿐이었다.


양양,번성이 함락된 후, 강회의 문호는 활짝 열린다. 전략적으로 극단적으로 불리하게 되어서야 비로소 황급히 방어배치를 새로 짰다.


구안(苟安)에서 어쩔 수 없이 응전(應戰)하다가 실패하면 구화(求和()하고, 다시 구안한다. 이는 바로 남송의 계속 순환되는 국책이었다. 이는 남송정권을 금나라가 멸망한 후 45년간이나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던 원인이다.


양양 번성이 함락되자 이 순환도 끝이 난다. 남송의 전영토가 몽골제국의 판도에 들어가 버린다. 1279년, 남송이 멸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