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북송황제의 장례과정

중은우시 2020. 8. 23. 03:21

글: 시습사사(時拾史事)

 

고대에 황제가 붕어하면, 왕왕 호화스럽고 융중한 장례식을 치른다. 예를 들어, 진시황, 한무제등등이 모두 그러했다. 그렇다면 송나라의 황제는 예외였을까"

 

당연히, 아니었다. 관가(官家, 황제)는 통치집단의 1인자이다. 중국에서 가장 권력이 있는 사람이다. 사후에 거창한 장례식도 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황제의 지위를 체현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북송황제의 장례과장을 돌아보고, 도대체 어떤 절차를 거쳤고, 얼마나 복잡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유조(遺詔)를 선독(宣讀)하다

 

정상적이라면 황제가 붕어한 후 반드시 즉시 신황제를 확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국을 주재할 사람이 없게 된다. 구가기구도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럼 도대체 누가 황제에 올라야 하는가? 바로 이때 유조의 역할이 아주 관건적이다. 유조가 없으면, 신황제의 통치는 합법성을 잃는다. 개보9년, 송태조 조광윤이 붕어한 후, 후계자는 아들이 아니라 동생이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조광윤은 비정상사망이라고 의심하고, 조광의가 황위를 찬탈했다고 말한다. 논거의 하나는 송태조의 유조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송태종 조광의가 금궤지맹을 꺼내들었고, 실제로 이는 자신의 합법성을 변호하기 위함이었다. 봐라. 짐은 비록 송태조의 유조가 없지만, 그래도 소헌태후의 안배가 있지 않았느냐.

 

사실상, 이런 주장은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태조의 유조를 후세인이 찾아냈기 때문이다. 그 안의 내용이 송태조의 뜻인지 아니면 송태종의 뜻인지는 알 수 없다. 당시 사람들에 있어서 그가 후계자가 되는 합법성은 이미 유조에 의해 부여된 것이었다. 북송황제의 유조는 어떻게 쓰여졌을까? 한번 보기로 하자.

 

송태조의 유조

 

脩短有定期,死生有冥数,圣人达理,古无所逃。朕生长军戎,勤劳邦国,艰难险阻,实备尝之。定天下妖尘,成域中大业,而焦劳成疾,弥留不瘳,言念亲贤,可付后事。皇弟晋王某,天钟睿哲,神授英奇,自列王蕃,愈彰厚德,授以神器,时惟长君,可于柩前即皇帝位。丧制以日易月,皇帝三日听政,十三日小祥,二十七日大祥。诸道节度观察防御团练刺史知州等,并不得辄离任赴阙。闻哀之日,所在军府三日出临释服,其余并委嗣君处分。更赖将相协力,中外同心,共辅乃君,永光丕祚。

 

송인종의 유조

 

朕荷国大统四十有二年,尝惧菲凉,不足以承祖宗之鸿烈。然兵休民靖,底于丕平,顾朕何德以堪之。乃自春已来,积勤爽豫,今至大渐,恐不得负扆以见群臣。皇子某,以天性之爱,朝夕寝门,未始少懈,况聪知明睿,朕素有承嗣之托矣,夫岂不顺天人之望哉,可柩前即皇帝位。皇后以坤仪之尊,左右朕躬,慈仁端顺,闻于天下,宜尊皇后为皇太后。应诸军赏给,并取嗣君处分。丧服以日易月,山陵制度,务从俭约。在外群臣止于本处举哀,不得擅离治所,成服三日而除。应沿边州镇皆以金革从事,不用举哀。於戏,死生之际,惟圣为能达其归。矧天之宝命,不坠于我有邦。更赖文武列辟,辅其不逮。朕何慊焉,咨尔中外,体予至怀,主者施行。

 

송철종의 유조

 

朕嗣守大业,十有六年。永惟付托之重,夙夜祇惧,靡敢遑宁,赖天之休,方内乂安,蛮夷率服。乃自故冬以来,数冒大寒,浸以成疾,药石弗效,遂至弥留,恐不获嗣言,以诏列位。皇弟端王某,先帝之子,而朕之爱弟也。仁孝恭俭,闻于天下,宜授神器,以昭前人之光,可于柩前即皇帝位。皇太后、皇太妃,保佑朕躬,恩德至厚,凡在礼数,其议所以增崇,以称朕欲报无已之意。方嗣君践祚之初,应军国事,请皇太后权同处分。应诸军赏给。并取嗣君处分。丧服以日易月,山陵制度,务从俭约。在外群臣止于本处举哀,不得擅离治所。成服三日而除,应缘边州镇皆以金革从事,不用举哀。於戏,死生之期,理有必至;宗社之奉,其永无疆。尚赖股肱近臣,中外百辟,协辅王室,底绥万邦;咨尔臣民,咸体朕意。

 

3건의 유조는 북송의 전기, 중기, 후기이 세 단계를 대표한다. 내용을 보면 거의 큰 변화가 없다. 첫째, 노황제의 황제로서의 생애에 대한 개괄이 들어 있다. 비록 짐은 재능이 모자라고 덕이 없지만, 재위기간도안 그래도 강산은 안정적이었고, 조종의 기업도 여전히 유지할 수 있었다는 내용이다. 둘째, 개인이 병사하는 원인을 적는다. 정무가 바빴고, 매일 많은 일을 처리해야 했으며, 오랫동안 피로가 쌓여서 병이 되고, 결국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셋째, 후계자를 소개한다. 누가 황위를 계승한다고 적고는 그에 대해 칭찬하는 말을 늘어놓는다. 예를 들어, 총명하다든지, 효성스럽다든지등등. 황위를 넘겨주는 이유를 적는 것이다. 넷째, 장례활동에 대한 안배를 적는다. 능침은 반드시 검소하게 하고, 지나치게 호화스럽게 하지 말라든지, 각지의 관리는 제 자리를 지키고 함부로 임지를 떠나 경성으로 조문하러 오지 말라든지, 변방에서 거란, 서하등 나라의 침입을 대비하고, 애도활동을 할 필요가 없다든지등등이다. 다섯째, 후임자와 신하들에 대한 당부이다. 대신들은 황제를 잘 보좌하고, 대송의 강산사직을 보존하며, 천추만대 이어질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말하면 네글자로 유조의 주제를 설명할 수 있다: '평온과도(平穩過渡)'

 

능침(陵寢)을 영건(營建)하다.

 

재상이 유조를 다 읽고난 후, 대신들은 통곡을 한다. 선황에 대한 애도의 뜻을 표하는 것인데, 곡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반드시 곡을 해야 한다. 그후에 장소를 옮겨서, 새 황제에 절을 한다. 그리고 그의 등극을 축하한다. 또한, 노황제의 사망에 깊은 위문을 표한다. 이때부터, 긴장되고 바쁜 장례활동이 정식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전체 프로세스체서 가장 핵심단계는 장례이다. 북송황제는 생전에 능침을 건설하지 않았다. 사후에는 7개월내에 반드시 안장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영혼이 순조롭게 태묘(太廟)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한나라때의 제후왕처럼 취임하자마자 분묘를 만들기 시작하고, 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 시공활동을 멈추지 않은 것과는 달랐다. 그리하여 묘실의 규모는 왕왕 고고학자들이 묘주인을 판단하는 근거가 된다. 능묘가 아주 크면, 재위기간이 길었다는 것이고, 규모가 아주 적으면 재위기간이 짧았던 것이다.

 

겨우 7개월의 시간이라면 공기가 아주 빠듯하다. 북송정부는 우선 능침건조위원회를 만든다. 거기에는 산릉안행사(山陵按行使), 수봉산릉도호(修奉山陵都護), 수봉산릉도감(修奉山陵都監)등이 포함된다. 안행사는 황릉의 구체적 위치를 확정하는 책임을 진다. 하남 공의의 조상의 능침 부근에서 만년길지를 찾아내서, 대행황제(죽은 황제)가 영원히 안식할 장소로 삼게 된다. 이 임무는 국사일 뿐아니라, 황실의 사사(私事)이다. 그래서 '대신'과 '환관'이 풍수선생을 데리고 함께 가서 좋은 묘지를 확정한다. 지도와 풍수선생의 '권위있는 인증서'를 함계 새황제에게 올리고, 황제는 다시 사람을 보내어 재확인하여, 안행사가 결정한 곳에 문제가 없는지를 살핀다. 일반적으로 문제가 없다. 선제의 능침이기 때문이다. 누가 감히 자기 머리를 걸고 장난치겠는가. 확정된 후, 산릉도호가 군대와 징발한 백성들을 데리고 가서, 토목공사를 벌이고, 유대(乳臺), 신장(神墻), 각궐(角闕), 황당(皇堂), 하궁(下宮), 석상생(石像生)등을 건축한다.

 

매장과정도 복잡하ㅏ. 조정은 산릉오사(山陵五使)로 위원회를 조직한다. 그중 산릉사(山陵使)는 재상이 맡아, 총책임을 진다. 예의사(禮儀使)는 말 그대로 전체 매장과정에서 사용되는 예의를 지도한다. 일반적으로 예제에 정통한 예부상서나 한림학사가 맡는다. 노부사(鹵簿使), 의장사(儀仗使)는 장례과정에서 쓰이는 수레, 보안, 의장대를 책임진다. 교도돈체사(橋道頓递使)는 개봉에서 공의로 가는 길의 교통, 물자조달을 책임진다. 예를 들어, 도로가 충분히 넓은지, 영구를 실은 수레가 지나갈 수 있을 저도인지, 장례식에 참석하는 황친국척, 병사의 숙식은 잘 준비되었는지등등. 이것은 모두 교도돈체사가 책임진다. 어느 직위에 있는 사람이 이 중임을 맡는 것이 좋을까. 당연히 개봉부윤이다. 그는 경성과 주변의 자원을 동원하여 장례활동에 소요되는 물자공급을 책임진다. 송태조가 재위하는 기간동안, 그의 부친 조홍은(趙弘殷)의 묘를 공의로 이장하기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재상 범질을 산릉사로 학사 두의를 예의사로, 중승 유온수를 노부사로, 추밀직학사 설거정을 의장사로, 그리고 교도돈체사는 당시 개봉부윤으로 있던 조광의에게 맡긴다. 얼마 후, 범질이 재상에서 물러나고, 송태조는 조광의에게 산릉사를 맡긴다. 아들이 부친의 치상을 처리하는 것이니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최종 매장

 

사람이 죽은 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시신이 부패한다. 여러가지 원인으로 북송황제는 반년이후에나 흙속에 묻힐 수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선제의 유치에서 악취가 나서는 안된다. 그런 문제를 피하기 위해, 그들은 먼저 노황제의 시신을 관 속에 넣는다. 일반적으로 사후 나흘째 되는 날 혹은 약간 뒤에 진행하는데 이를 대렴(大殮)이라 한다. 황제, 황태후, 종실구성원, 문무백관이 상복으로 갈아입는다. 모든 사람은 지위, 황제와의 친소관계에 따라 서로 다른 상복을 입는다. 상복에도 등급이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을 입고 싶다고 그것을 입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렴후에는 새 황제가 선황제에게 제를 지낸다. 신하들은 다시 곡을 해야 한다. 그리고 천자를 위로해야 한다.

 

선황은 이미 죽었지만, 많은 유품을 남긴다. 후계자인 새황제는 일부 물건을 대신들에게 하사하여 기념으로 삼게 한다. 점점 이 활동은 원래의 의미에서 벗어나게 된다. 하사하는 물건이 점점 많아진다. 금액도 갈수록 커졌다. 그렇게 새황제가 신하들의 마음을 사는 수단이 되고 만다. 유조에는 이렇게 쓴다: "여러 군대에 대해 내리는 상은 다음 황제의 처분에 맡긴다." 군대에 상을 내리라는 것이다. 이는 국가의 가장 중요한 폭력기기이다. 상을 많이 줄수록 더욱 감사할 것이다. 새황제의 통치는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대렴에서 출빈(出殯)까지 선제의 관은 찬궁(攢宮) 안에 모셔진다. 즉 목재로 관의 바깥에 작은 집을 지어서 보호작용을 하는 것이다.

 

황제사후 십여일이 지나면 소상일(小祥日)이다. 소상이 무슨 뜻인가? 부모가 돌아가시고 1년이 되는 때를 '소상'이라고 한다. 예제에 따르면 선제가 사망한 후 12개월이 지나야 소상이다. 다만, 황실은 상황이 특수하다. 1년동안 그렇게 기다릴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조정의 정무가 엉망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래서 '이일역월(以日易月)' 즉 하루를 한달로 계산한다. 송태조의 유조에는 '상제는 이일역월하여, 황제는 삼일만에 청정(聽政)하고, 십삼일에 소상을 하라.'고 하였다. 소상 당일에는 제사활동을 거행한다. 대신들은 다시 궁으로 들어가 통곡을 한번 해야 하고, 황제, 황태후에게 하루빨리 애통함에서 벗어나 용감하게 앞날을 보라고 말한다. 대상(大祥)은 원래 부모사후 2주년이 되는 때의 제사행사이다. 북송황제의 대상은 일반적으로 사후 24일이 지난 날이다. 다시 며칠이 지나면 담일(禫日)이다. 상복을 벗을 수 있다. 생활이 정상으로 회복되고, 정부기구도 정상적으로 운영된다.

 

북송은 황제가 1명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모든 황제는 능침을 가졌다. 그렇다면 서로 다른 황제의 능침을 어떻게 구분했을까? 각각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능의 이름은 일반적으로 재상과 대신이 상의한 후 정한다. 송나라황제의 능묘는 모두 법칙이 있었다. 3글자이다. 첫번째 글자는 반드시 "영(永)"이어야 한다. 마지막 글자는 당연히 "릉(陵)"이다 바뀌는 것은 중간의 글자이다. 송태조의 능묘는 "영창릉(永昌陵)"인데, 재상 설거정이 제안한 것이고, 송태종의 능묘는 "영희릉(永熙陵)"인데, 재상 여단(呂端)이 제안한 것이다. 모두 길상여의의 글자이다. 역사상 유명한 춘궁도가 하나 있는데, <송희릉강행소주후(宋熙陵强幸小周后)>이다. 그 내용은 바로 송태종과 소주후의 풍류이야기이다. 작지는 능침의 이름으로 황제를 대신했다. 그외에 황제에게는 시호(諡號), 묘호(廟號), 시책문(諡冊文), 애책문(哀冊文)이 있는데 이는 모두 재상, 한림학사등 관리들이 제안하고, 쓴다. 예를 들어, 송태조의 시호는 '영무성문신덕황제(英武聖文神德皇帝)'이고, 송진종의 시호는 '문명장성원효황제(文明章聖元孝皇帝)'이다. 북송초기, 대신들이 시호를 정할 때 먼저 신황제의 동의를 받고, 다시 남교로 가서 하늘에 보고한다. 하늘이 동의하면 마지막으로 선제의 영전에 가서 읽는다. 북송중기에는 순서를 바꾼다. 먼저 남교로 가서 하늘에 보고하고, 다시 황제에게 말한다. 허가가 나오면, 선제의 능앞에서 읽었다. 모두 알다시피 하늘은 의견을 내놓지 않는다. 결국 황제와 신하들이 스스로 정하는 것이다.

 

사망한 지 몇달이 지나고 가서 능침이 완성된다. 이때 찬궁의 목재를 제거하고, 관을 끄집어 낸다. 그리고 대승연(大昇輦)에 싣는다. 즉 호화영구차이다. 새황제, 백관의 곡성 속에 천천히 변량성을 떠나, 공의로 향한다. 가는 길에 사람들이 많았고, 수킬로미터 심지어 수십킬로미터 이어진다. 사서에 따르면, 송태조의 장례때, 의장대와 일하는 사람을 합하여 구천사백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상당히 많은 재정이 소요되었다. 장례인원이 다른 현을 지날 때면, 지방관이 공손하게 맞이해야 했다. 먼저 선제를 향하여 통곡하고 절을 한다. 대부대가 능침에 도착한 후, 관은 즉시 지궁에 매장되지 않고, 다시 황도길시(黃道吉時)를 기다려야 한다.

 

길시가 되면, 관을 넣고, 부장품을 넣는다. 어떤 것들이 부장품으로 들어가는가? 과과(瓜果), 의관(衣冠), 검패(劍佩), 필연(筆硯), 갑주(甲胄), 포백(布帛), 책보(冊寶), 전(錢), 그리고 평생 좋아하던 물건이다. 모든 것이 다 준비되고나면 모두 물러난다. 그리고 묘문을 잠근다. 열쇠는 땅바닥에 버린다. 나온 후에, 흙으로 메운다. 그렇게 하면 매장이 끝나는 것이다. 사서에 '엄황당(掩皇堂)'이라고 되어 있으면 바로 이 과정을 가리키는 것이다. 노황제의 시신이 이미 흙속에 들어가면, 그의 혼백은 개봉부로 돌아온다. 다시 우제(虞祭)를 지내야 한다. 그리고 조상의 패위(牌位)를 태묘에 모신다. 영원히 후세인들의 제사를 받게 하는 것이다. 그중 조광윤의 패위는 태묘의 제5실에 놓여 있고, 송태종 조광윤은 제6실에 모셔져 있다. 왜 그런가? 앞의 4명의 조상의 패위가 있기 때문이다. 각각 희조(僖祖), 순조(順祖), 익조(翼祖), 선조(宣祖)이다. 그들은 황제를 지낸 적은 없다. 그러나, 조광윤의 조상이어서 황제로 추존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