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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대명개국공신 상우춘(常遇春) 세 아들의 수수께끼

by 중은우시 2019. 12. 27.

글: 소가노대(蕭家老大)


상우춘은 자가 백인(伯仁)이고, 호는 연형(燕衡)이다. 남직예(南直隸) 봉양부(鳳陽府) 회원현(懷遠縣)(지금의 안휘 방부 회원현) 사람이다. 명나라의 개국장군이며, 원 지정15년(1355년)에 주원장에 귀부(歸附)하여 스스로 나서서 선봉장이 되어, 적을 물리친다. 그는 "침착하고 과감하며, 사졸들을 잘 다독였으며 적진을 무너뜨렸으며, 패배한 적이 없다." "당시 명장으로 서(徐, 서달), 상(상우춘)이라고 불렸다." 그는 일찌기 스스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10만의 병사를 지휘하여 천하를 횡행할 수 있다고. 그리서 군중에서는 "상십만(常十萬)"이라고 불렸다. 관직은 중서평장군국중사(中書平章軍國重事)였고, 악국공(鄂國公)에 봉해진다. 홍무2년(1369년) 불행하게도 젊은 나이로 사망한다. 군중에서 급사했고 당시 나이 40살이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고, 개평왕(開平王)에 추봉된다.


상우춘에 관하여, 명사에 전(傳)이 있고, 영웅본색을 지녔다는 점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본인은 단지 두 가지 일에 관심이 있다. 하나는 상우춘의 죽음이고, 다른 하나는 상우춘의 후대에 얽힌 수수께끼이다.


명사에 상우춘의 죽음을 상당히 간단하게 기술했다. 사서에는 "사환(師還), 차류하천(次柳河川), 폭질졸(暴疾卒), 년진사십(年儘四十)" 단지 3글자이다. "폭질졸" 항간에는 의문이 있었다. 주원장이 공신을 주살했다는 말도 있으나, 실로 믿기 어렵다. 그 때, 명나라의 개국대국이 아직 정히지지 않아서, 사람을 써야할 때였고, 주원장도 그다지 멍청한 사람은 아니다.


기실 각종 사료를 살펴보면, 상우춘의 죽음은 원인이 상당히 간단하다. 그는 바로 과로사한 것이다. 홍무2년(1369년) 칠월, 상우춘은 개평에서 군대를 이끌고 남으로 돌아왔다. 대군이 유하천(하북 적성현 서쪽)까지 행군해서, 말에서 내릴 때, 돌연 몸에서 열이나고 이상현상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갑옷을 벗고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열이 내려가지 않았고, 온몸아 아파왔다. 급히 의원을 불러서 치료하게 했으나 무슨 병인지를 몰랐다. 낭중의 말로는 "사갑풍(卸甲風)" 즉 갑옷을 벗다가 중풍에 걸렸다는 뜻이다. 한나라때의 명장 곽거병(霍去病)도 아마 이 병으로 젊은 나이에 죽었을 것이다.


중원인이 북방으로 가서 전투를 하게 되면, 기후가 맞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군대내에서 힘들게 일하면서 배고프면 고기를 씹고, 목마르면 술을 찾는다. 몸에는 무거운 갑옷을 입고 있어 보습이 되지 않는다. 북방의 여름은 무덥다. 철갑은 열이 나고 땀이 난다. 그러면 탈수증이 나타난다. 만일 돌연 찬바람을 맞게 되면, 문제가 생기는 것이 당연하다. 중의(中醫)에 따르면, "사기입침(邪氣入侵), 중풍치병(中風致病)"이라고 한다


상우춘의 죽음과 비교하면, 그의 자손들의 상황은 훨씬 복잡하다.


상우춘에게는 삼남삼녀가 있었다. 세 아들은 각각 상무(常茂), 상승(常昇), 상삼(常森)이다. 상무와 상승에 대하여는 <상우춘전>에 간략히 기술되어 있으나, 상삼에 대하여는 언급이 없다. 장녀는 주원장의 태자 주표(朱標)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을 기른다. 하나는 요절했고, 다른 하나는 나중에 서인으로 폐해진다.


상우춘의 세 아들에게는 모두 스토리가 있다. 그리고 모두 수수께끼를 남긴다.


상무에 관하여 명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상무는 부친의 공으로 정국공(鄭國公)에 봉해지고, 2천석의 식읍을 받고, 대대로 특권을 누리는 철권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교만하고 철이 없어서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둘째, 홍무20년, 그는 대장군 풍승(馮勝)을 따라 금산으로 가서 나하추(納哈出)를 토벌한다. 풍승은 상무의 장인이다. 그러나 상무는 풍승의 지시를 자주 따르지 않았다. 풍승이 여러번 책망했으나 상무는 오만무례했고, 그로 인하여 풍숭이 분노한다. 셋째, 나하추가 항복을 청한다. 우부장군(右副將軍) 남옥(藍玉)의 영장(營帳)에서 술을 마시는데, 남옥과 얘기하다가 서로 불화가 생겨, 나하추는 술잔을 들어 술을 바닥에 뿌린다. 그리고 머리를 돌려 후하에게 한마디 말을 한다. 상무의 부하 중에는 몽골말을 알아듣는 자가 있었는데, 조용히 상무에게 알려준다. 나하추가 도망치려고 합니다. 상무는 그가 방비하고 있지 않은 틈을 타서 달려나가 붙잡으려 한다. 나하추는 깜짝 놀라서 몸을 일으켜 말에 오른다. 상무는 칼을 뽑아들고 휘둘러 그의 팔에 상처를 입힌다. 나하추의 부하는 이 일을 듣고, 놀라서 흩어져 도망치고, 병변이 일어난다. 넷째, 풍승은 원래 상무에 분노해 있어, 이 일을 과장되게 표현하여 상무가 병변을 일으기게 만들었다고 하여 형구로 묶어서 경성으로 압송한다. 상무는 오히려 풍승이 여러 불법적인 일을 저질렀다고 고발한다. 그 결과, 주원장은 곤장 오십대를 때리고, 풍승의 병권을 회수한다. 그리고 상무의 죄를 물어 용주(龍州)로 귀양보낸다. 4년후(홍무24년), 사망한다.


그러나,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상무는 '거짓죽음(詐死)'을 벌인다. 명사에 이렇게 적고 있다: 상무는 용주로 유배를 간 후에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첫째는 첩을 들이는데, 용주에 유배간 죄인의 몸이면서도 현지의 토사(土司) 조첩견(趙貼堅)의 딸을 첩으로 들인다. 둘째는 권력농단이다. 토사 조첩견이 죽은 후, 그의 조카인 조종수(趙宗壽)가 그의 직위를 이어받는다. 그러나 상무는 조첩견의 처인 황씨(黃氏)와 손을 잡고 현지의 정무를 좌지우지한다. 그리하여 조종수의 불만을 산다. 그 후의 일은 엉망진창이다. 조종수는 상무를 고발하는 상소를 올린다. 그후에 다시 상무가 죽었다고 말한다. 조첩견의 처인 황씨는 조종수는 조카이고 아들이 아니므로 토사의 직위를 이어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얼마 후 누군가 또 고발한다. 상무는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원장이 대노하여, 엄히 조사하도록 조서를 내린다. 그 결과 조종수는 명을 받들길 거부한다. 주원자응ㄴ 조서를 내려, 강서소속의 마보관군 6만을 보내, 용주등지를 토벌하려 한다. 황상의 뜻은 아주 명확했다. 너 조종수가 직접 찾아와서 상무가 어떻게 죽었는지 얘기하면 관대하게 처리하겠다. 만일 그러지 않으면 병력을 보내 토벌하겠다. 결국 조종수는 경사로 와서, 상무가 확실히 이미 죽었다고 얘기하고, 주원장은 더 이상 추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상무는 죽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인터넷에는 광서 상씨가족의 족보가 나와 있는데, 상무는 죽지 않았을 뿐아니라, 자손이 아주 많았다는 것이다. 궁벽한 곳으로 도망쳐서 은거했다. 이 주장은 어느 정도 이치에 맞는 것같다. 상무가 죽기 1년전에, 명나라에는 큰 사건이 하나 벌어진다. 호유용(胡惟庸) 사건에 연루되어 이선장(李善長) 및 그의 처자식 동생 조카 70여명이 피살된다. 이선장이 누구인가? 그는 회서(淮西)의 우두머리이고, 개국공신이다. 주원장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모신(謀臣)이다. 도한 그에게는 면사철권(免死鐵券)도 내렸다. 이런 사람까지도 일가족이 몰살당한다. 그러니 용주에 유배가 있던 상무는 겁먹지 않을 수 없었다. 주원장의 자신에 대한 평가는 "유합제만(誘合諸蠻), 사위부도(肆爲不道)" 이건 무서운 말이다. 그러니 상무는 상황이 좋지 않아고 보았고, 거짓죽음을 기획한다. 고의로 정적인 조종수의 입을 통해 경사에 전해지도록 한다. 그래서 황상이 믿게 만든다. 다만, 새어나오지 않는 비밀은 없다. 상무가 죽은게 거짓이라는 주장이 마침내 황상의 귀에 들어간다. 이때 조종수는 아마도 속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상무는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여러번 조서를 받고도 경사로 갈 수가 없었다.


주원장이 조서를 내려 토벌하겠다고 하자 조종수는 어쩔 수 없이, '조정에 찾아가서 토벌군을 물리도록 청한다' 이때 설사 그는 상무의 죽음이 짓이라는 것도 무조건 부인할 수밖에 없었다. 조종수는 그러나 스스로 겁이 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용주를 떠나기로 결정한다.


명사에 따르면, 홍무25년(1392년), 상무가 '거짓죽음'을 연출한 다음 해, 주원장은 상우춘의 차남 상승을 개국공으로 삼는다. 성지에 "후사를 두지 못한 것을 안타깝다. 작위를 승계받을 사람이 있어야 한다. 형종제급(형이 죽으면 동생이 이어받는다)는 원칙에 따라 너 상승을 개국공으로 삼는다"고 한다. 이 말에 따르면, 원래 상무의 아들에게 봉해야할 것인데, 상무에게 아들이 없다보니 그의 동생인 상승을 봉한다는 말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상무와 풍씨부인(풍승의 딸)과의 사이에 세 아들이 있었다고 했는데, 어찌 '후사가 없다'고 했을까?


이런 견해가 있는데, 비교적 합리적이다. 상무가 '거짓죽음'을 연출하고 도망친 후, 상무와 풍씨부인은 면밀하게 안배를 했을 것이다. 당시의 정치환경을 보면, 상무가 도망치면서, 풍씨부인과 아들에 대하여도 미리 안배를 해놓았을 것이다. 주원장은 무수히 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으므로, 그들에게도 화가 미칠 것이 우려되어, 성명을 감추고 인간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이런 조건이 있었다. 예를 들어, 홍무24년(1391년), 개평왕 상우춘의 처인 남씨부인이 아직 살아 있었다. 그녀는 절대로 수수방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히 온갖 방법을 써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을 것이다. 그때 외할아버지 양국공 남옥이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남옥사건은 1년후에 발생한다). 그는 직위도 있고 권력도 있다. 그는 완전히 자신의 외조카와 그 아들들이 피해를 입지 않게 막아줄 수 있었다. 이런 견해를 취하는 사람들은 외할아버지인 남옥이 상무의 아들들을 산서로 데려가 군대에 넣었다고 본다. 나중에 기회를 봐서 동산재기할 수 있도록. 다만, 1년후 남옥 자신이 사건에 휘말린다(역사에서 남옥(藍獄)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여기에 1만5천여명이 연루된다. 이런 악랄한 정치환경하에서 상무의 아들들로서는 자신을 드러낼 수가 없었다. 인간세상에서 철저히 사라지는 것이 유일한 선택이었다.


상무 본인을 보면, 이런 견해가 있다. 홍무24년, 상무는 소첩인 이씨부인을 데리고 도망친다. 광서 공성현 오배요(지금의 공성현 관음향 백죽포촌)의 심산에 은거한다. 수년후 상가촌(지금의 공성현 율목진 상가촌)으로 옮겨서 정착한다. 이씨와의 사이에 네 아들을 낳는다. 첫째가 상지(常智), 둘째가 상혜(常慧), 셋째가 상현(常賢), 넷재가 상량(常良)이었다고 한다. 상무는 영락11년(1413년)에 사망하니 향년 58세이고, 율목진 대합촌에 묻힌다. 다만 훗날에 불측의 사태가 있을 것을 염려해 무덤을 만들지 않고 백석으로 표시했다고 한다.


홍치연간에는 국가가 태평했다. 그리하여 명효종 주우탱(朱佑樘)은 개국공신의 자녀들중 유배가거나 평민이 된 자들이 "조그만치의 국가녹봉도 받지 못하니 실로 그냥 둘 수가 없다"고 하여 홍치5년(1492년) 삼월 팔일 조서를 내려 공신의 후예들을 다시 기용한다. 상무의 자손들은 그래도 아직 두려움이 남아 있어서 녹봉을 받지 않고 사양한다.


1989년 여름, 광서 공성현 요족자치현 문물관리소의 일제조사로 고증하여 확인한 바에 따르면, 상무의 묘는 문화재로 지정해서 이미 공문이 통지되어 명문으로 보호하고 있다. 이 묘를 믿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그저 마음가는대로 하는 수밖에 없다. 각지에서 유명인사들의 고향등을 다투는 일이 벌저지다보니 다 믿을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상우춘의 차남인 상승도 행방불명이다. 이도 역사의 수수께끼이다. 명사에 따르면, 상무의 죽음에 관하여 정사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고 다른 전기에 따르면 두 가지 견해가 있는데, 하나는 주체의 정난지역때 상승은 서달의 아들 서휘조와 함께 병력을 이끌고 포자구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전사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남옥사건에 연루되어 피살되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남옥은 그에게 외삼촌이 되니 관계가 남다르다. 추측대로라면 첫번째 견해가 비교적 믿을만한 것같다. 사서에는 상승의 아들이 계조가 "영락원년 운남의 임안위롱 옮겨갔고 당시 나이 7살이다"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락초에 7살짜리 어린아이가 모친을 따라 운남으로 갔다는 이는 확실히 유배의 성격이다. 부친이 주체의 '정난지역'에 항거했던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때의 상승은 금의위지휘로 있었고, 동시에 건문제의 국구야(國舅爺)로 응천부(남경)을 지키고 있었다. 연왕 주체의 병력을 막기 위하여 나중에 홀몸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했다. 남옥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설은 실로 믿기 어렵다. 왜냐하면 남옥사건에 연루된 사람은 이름이 남아 있는 사람이 아주 많고, 명사에도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다. "1공(公), 13후(侯), 2백(伯), 연루되어 주살된 자가 1만오천명" 상승은 개국공이라는 혁혁한 지위에 있었으므로 그의 이름이 일부러 빠졌을 가능성은 없다고 할 것이다.


홍치5년(1492년) 명효종 주우탱이 조서를 내려 '태묘에 배향된 여러 공신'의 후손을 우대하도록 조서를 내려, 상승의 중손(重孫) 상복(常復)이 운남에서 돌ㅇ라와 남경 금의위지휘사(한직임)를 맡는다. 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회원후(懷遠侯)를 세습하며, 명나라말기까지 이어진다.


상우춘의 셋째아들 상삼의 행방도 역시 수수께끼이고 정사에 아무런 기록이 없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남경이 포위되었을 때, 상승과 상삼은 후사를 안배한다. 예를 들어, 상승은 큰아들 계종(繼宗)을 회원(懷遠)으로 보내 난을 피하게 하고, 둘째아들 계조(繼祖) 및 호씨부인은 나중에 운남 임안으로 유배간다. 상삼은 사나이는 당장이 손해는 감수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도망가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는 오씨부인 및 두 아들인 상강(常剛), 상강(常强)과 산서로 도망친다. 나중에 섬서 미지현 진가차촌(陳家岔村)에 정착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오늘날 미지현의 상씨가족은 바로 상삼의 후손이라고 한다. 명나라 영락연간에 미지로 옮겨온 이래 상씨가족은 여기에서 28대를 내려왔다. 섬북의 황토에서 육백여년을 생활한 것이다. 야사에 따르면, 상삼은 미지에 은거한 후 이름을 상승(常僧)으로 고치고 영화사(永和寺)에서 도사로 지냈다고 한다.


지금 미지현 충무당(상우춘의 시호가 충무이다)의 상씨가족은 장남 강(剛), 차남 강(强)의 후손이다. 섬북에 은거했지만, 상삼은 여전히 주체를 두려워했다. 미지에 뿌리를 내린 장남 상강은 칠갑(七甲)이 되고, 차남 상강은 십갑(十甲)이 된다. 그리하여 미지의 상씨는 칠갑, 십갑의 구분이 있다.


그 원인에 대하여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주체가 사람을 섬북에 보내어 상우춘의 후손을 조사한 바 있는데, 갑을 나눈 것은 한편으로 미지상씨가 이곳에 정착한지 오래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다른 한편으로 두 갑의 상씨가족은 관계가 소원하다는 것을 보여주어 멸족의 위험을 줄였다는 것이다. 둘째는 과거 상씨의 인구가 비교적 적고 집중하여 거주하고 있으므로, 갑을 나눈 후에 동성통혼의 한계를 확정했다는 것이다. 셋째는 강,강 두 형제의 관계가 조지 않아 '일문분양갑'의 국면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상삼이 죽은 후, 진가차촌 화신묘의 산 위에 묻는다. 아들 상강, 상강은 상석반에 정착하여 황무지를 개간하고 후손이 번성하낟. 지금 영화사의 동남쪽 160미터 지점에 미지 충무당 상씨 최초의 묘소로 보이는 무덤이 있다. 현지 노인에 따르면, 해방전후하여 상씨조상묘는 묘군을 이루었을 뿐아니라 십여개의 잔존한 석장(石樁)이 있었으며 부지면적은 30여무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중 둘째줄의 묘앞에는 높이 1.5미터 너비 0.8미터의 석비가 서 있었다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석비는 사암으로 만들어져서 연대가 오래되다보니 비문을 이미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상씨가족들은 이를 상강, 상강의 묘지로 본다. 미지현 현지의 속어에 "상일천(常一千), 애팔백(艾八白), 고두각점반도가(高杜各占半道街)"라는 말이 있는데, 역시 미지 4대명문집안의 가장 진실한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미지성에는 경제력이건 사회적 명망이건 상씨가 최대의 집안이었다. 지금 미지의 충무당 상씨가족은 전체 현에 분포되어 있고, 총인구는 4만을 넘는다. 미지현 전체 인구의 16%에 달한다.


보기에 상삼의 일맥이 가장 흥성한 것같다. 만일 상우춘이 지하에서 이를 안다면 분명 안위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