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황영욱(黃迎旭)
한국전쟁은 신중국이 싸운 최초의 대규모 국부전쟁이다. 상대는 미국이라는 세계최강국이었다. 이는 아주 힘든 시험이었다. 신중국의 국력과 군사력을 시험받을 뿐아니라, 더더구나 신중국의 지도자들이 시험받는 것이다. 모택동을 핵심으로 한 중국의 지도자들은 전후로 5개의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렸다: 출병결심, 제1차전투배치, 제3차전투실시, 중대전략조정진행, 전투와 협상을 병행하는 것. 이것은 한국전쟁의 기본맥락을 이루고, 지원군이 전략적으로 주도적지위를 가질 수 있도록 했으며, 이번 전쟁을 지휘하는 의지력과 결단력을 나타낸다.
1950년 9월 15일, 미군 제10군은 한반도의 삼팔선부근에 있는 인천에 상륙하여, 부산을 고수하던 한국군대와 미군제8집단군이 서로 협력하여, 이미 낙동강을 건넌 조선인민군 제1, 제2방면군을 협공하는 모양을 갖춘다. 전세는 급전직하했다. 미군과 한국군은 25일 서울을 수복하고, 29일 삼팔선으로 밀고 올라왔다. 30일부터 삼팔선을 넘어 총끝은 중국-조선국경선을 향했다. 이때 조선인민군의 주력은 삼팔선이남에 격리되어 있었고, 이미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위기일발에 처한다. 29일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원조요청서신을 보낸다. 소련에게 '직접적인 군사원조'를 요청한다. 스탈린은 10월 1일 새벽 서신을 받은 후, 그날로 소련주중대사관에 전보를 보내 모택동, 주은래에게 전해서 중국이 "5,6개 사단을 신속히 삼팔선으로 보내어 조선의 동지들이 당신들 부대의 엄호하에 삼팔선이북에서 후방역량을 조직할 수 있게 해달라"고 건의한다. 동시에 스탈린은 문건을 보내 소련주조선대사 스티코프와 군사총고문 마트비레프로 하여금 김일성, 박헌영에게 의견을 전달하게 한다. '직접적인 군사원조'는 '중국동지와 상의하라' 그날 밤 김일성은 긴급히 중국주북한대사 예지량(倪志亮)과 정무참찬 시군무(柴軍武)와 약속을 잡아서 정식으로 중국의 출병을 요청한다. 3일, 조선의 내무상 박일우(朴一禹)가 북경에 도착하여, 모택동에게 김일성, 박헌영이 연명으로 서명한 지원요청서신을 전달한다.
한국전쟁은 6월 25일에 발발한 후, 중국지도자들은 당시 이렇게 판단한다. 이 전쟁은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조선인민군이 속전속결로 한반도전체를 통일하고, 전쟁을 끝낸다. 이는 가장 이상적인 결과이고, 조선에 가장 유리하며, 미국이 간섭하고 싶어도 손을 쓰기 어려워진다. 또 다른 하나는 미국이 신속히 대규모병력을 투입하여 조선인민군의 공격이 저지되고, 전쟁은 대치상태로 들어간다. 만일 미국이 추가로 파병하면, 국면은 역전될 것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아마도 지켜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미국은 전쟁을 중국까지 확대할 가능성이 있다. 어느 상황이 되더라도, 중국은 반드시 준비를 해놓아야 한다. 7월 7일, 주은래는 중앙군사위원회를 주재하며 제1차국방문제회의를 개최한다. 10일에는 제2차회의를 개최한다. 그리고 정식으로 <동북변방을 보위하는데 관한 결정>을 내놓아, 제13병단 소속의 제38군, 제39군, 제40군 및 동북에 주둔하고 있는 제42군과 포병사령부 소속의 3개 포병사단 합계 25만여명으로 동북변방군(東北邊防軍)을 조직한다. 주목할 만한 점이라면, 희의에서 대만해방을 책임진 전선총지휘책임을 맡고 있던 속유(粟裕)를 동북변방군사령관으로 임명한 것이다. 이는 중국이 군사전략의 중심을 동남에서 동북으로 이전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동북변방군이 한 준비는 출경작전이다. 먼저, 등화(鄧華)가 이끄는 제15병단부가 황영승(黃永勝)의 제13병단부를 대체하여 새로운 제13병단부를 조직한다. 다음으로, 동북변방군이 건립된 후, 작전, 장비, 군수 및 정치동원등 분야에서의 준비는 모두 입조작전(入朝作戰)에 착안했다. 심지어 지휘관의 이름도 조선이름을 쓰기로 했다. 한국전쟁이 대치상태로 접어든 후, 모택동은 즉시 2선, 3선병력배치에 착수한다. 8월 20일, 모택동은 대리총참모장 섭영진(聶榮臻)의 제19병단을 농해선(隴海線) 혹은 진호선(津滬線)으로 옮겨서 명을 기다리겠다는 보고를 비준한다. 9월 8일, 모특동은 다시 제9병단은 서제선(徐濟線)으로 이동하여 정비하고 훈련하도록 하며 작전예비대로 삼았다.
중국은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북한을 지원하기 위한 필요한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출병결심을 하는데는 여러 곡절이 있었다. 10월 2일 오후, 모택도은 서기처회의를 소집하여 조선출병문제를 논의한다. 회의전에, 모택동은 고가(高崗)과 등화에게 전보를 보내어, 북경으로 와서 회의에 참석하라고 지시한다. 그리고 부대에 언제든지 출동할 준비를 갖추도록 명령한다. 동시에 모택동은 스탈린에게 보내는 전보를 초안한 후, 정치국이 정식 결의를 한 후에 발송할 준비를 했다. 이 전보의 내용을 보면, 모택동은 출병하여 조선을 지원하는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전쟁의 목적, 역량사용, 작전방침, 전략전술 및 연쇄반응등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심도있는 고민을 했다. 그러나, 서기처회의는 잠정적으로 출병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회의후, 모택동은 소련대사 루신을 통하여 스탈린에게 알린다: 중공중앙의 여러 동지들은 이에 대하여 신중하게 처리해야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가장 좋은 것은 그래도 자제하여, 출병을 하지 않는 것이다. 동시에 이렇게 말한다. 이는 최종결정이 아니다. 4일오후와 5일오후 모택동은 연속으로 정치국확대회의를 주재한다. 충분한 토론을 거쳐, 마팀내 출병결정을 내린다. 8일 모택동안 명령을 하달한다. 동북변방군을 중국인민지원군으로 변경하고, 신속히 조선경내로 출동하라. 그리고 팽덕회를 사령관 겸 정치위원으로 임명한다. 같은 날, 모택동은 예지량에게 전보를 보내 그로 하여금 김일성에게 알리게 한다. "우리는 지원군을 조선경내로 파견하여 너희가 침략자에 반대하는 것을 돕기로 했다." 같은 날, 주은래, 임표는 비밀리에 소련을 방문한다. 그리고 조선지원문제에 대하여 협상한다. 팽덕회는 출동계획을 만들고 지원군이 15일에 국경을 넘어 들어가고 20일 늦어도 22일까지 모두 주선북부의 예정전투현장에 집결하기로 확정한다. 모택동은 이 계획을 승인한다. 그러나 그후에도 다시 곡절이 있었다. 11일 모택동은 주은래가 모스크바에서 보내온 전보를 받는다. 이는 모택동과 다른 중앙지도자동지들로 하여금 출병문제를 부득이 새로 고민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12일 모택동은 이미 동북으로 간 팽덕회에게 전보로 지시한다: "13병단의 각부는 여전히 현지에서 훈련을 진행하라. 출동하지 말라." 13일 모택도은 북경으로 들어온 팽덕회, 고강 및 기타 정치국위원들과 회의를 개최한다. 다시 한번 출병문제를 논의한다. 심도있는 토론을 거쳐, 설사 소련이 공군지원을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조선에 출병한다고 결정한다. 회의후, 모택동은 주은래에게 전보를 보내어, 회의결정사항을 알려준다. 이제 출병결정은 최종적으로 이루어졌다.
1970년 10월 10일, 모택동은 내방한 김일성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때, 우리는 비록 5개군을 압록강변에 배치했지만, 우리 정치국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이렇게 뒤집고, 저렇게 뒤집고, 이렇게 뒤집고 저렇게 뒤집고, 최종적으로는 그래도 결정했다.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너희도 발언권이 없게 될 뿐아니라, 우리도 발언권이 없게 된다." 모택동은 무수한 풍랑을 거쳐왔고, 여러번 중국의 운명을 가름하는 어려운 결정을 내렸지만, 조선출병처럼 이렇게 어려운 경우는 없었다.
왜 어려웠을까? 주로 4가지 문제때문이다.
첫째, 이해관계이다. 전쟁에는 반드시 손해가 따른다. 조선출병으로 인한 손해는 분명하다. 전쟁의 불똥이 중국으로 번질 수 있을 뿐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중국이 이미 시작한 경제회복의 진전이 더뎌지게 될 것이다. 심지어 지금까지의 진전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다. 만일 이런 상황이 나타난다면, 민족자산계급과 일부사람들의 불만을 가져와서, 국가의 정치적기반이 동요될 수 있다. 모택동은 이 점을 보았다. 그러나 출병하지 않으면 손해가 더욱 크다고 보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절실하게 평화건설이 필요하다. 만일 나에게 평화건설의 이유를 쓰라고 한다면, 백가지 천가지도 쓸 수가 있다. 그러나 이 백가지 천가지 이유도 6글자를 당하지 못한다. "불능치지불리(不能置之不理)" 내팽개치고 모른 척할 수 없다. 미제는 침략의 창끝을 우리나라 동북을 겨누고 있다. 만일 정말 조선이 무너진다면, 설사 압록강을 건너오지 않더라도, 우리의 동북은 항상 그 위협 속에서 살아야 한다. 평화건설을 진행하는 것도 곤란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조선문제에 대하여 만일 내팽개쳐두고 모른척 한다면 미국이 반드시 득촌진척(得寸進尺)해서 일본이 중국을 침략했던 옛 방식을 그대로 쓸 것이다. 심지어 이론보다도 심할 것이다. 미국은 3개의 칼을 우리의 몸에 꽂으려 한다. 조선의 칼은 우리의 머리에 꽂고, 대만의 칼은 우리의 허리에 꽂으며, 월남의 칼은 우리의 발에 꽂는다. 천하에 변고가 생기면, 그들은 3방면에서 우리에게 진격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피동적이 된다. 우리의 항미원조(抗美援朝)는 바로 미국의 이런 음모가 성공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한 주먹을 때려서, 백개의 주먹이 날아오는 것을 막는다." 이는 바로 중국이 한국전쟁의 국외자로 미국과 직접적인 군사충돌을 하지 않으면서, 계속하여 자신의 경제건설계획을 집행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국제전략국면에서 중국에 불리한 방향으로 발전되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자신의 국경을 압박해오는 전쟁위협을 없앨 수가 없었다. 심지어 전쟁이 자신의 국토까지 만연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최종적으로 역시 전쟁에 말려들게 된다. 항미원조는 잠시의 희생으로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평화적환경을 얻어내려는 것이다. 그래서, 모택동은 10월 13일 주은래에게 보내는 전보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마땅히 참전해야 한다. 반드시 참전해야 한다. 참전의 이익이 아주 크다. 참전하지 않으면 손해가 아주 크다." 그리고 하루빨리 참전해야 한다. 만일 북한이 철저히 무너져 버리면, 중국이 출병하고 싶어도 이유가 없고, 기회가 없다. 국경내에서 미군을 맞이할 준비를 할 수밖에 없다. 만일 이런 상황이 나타나면, 중국은 전략적으로 아주 피동적인 입장에 처하게 될 것이다.
둘쨰, 소련군사원조의 문제이다. 중국은 소련에 3가지 요구를 했다: 하나, 하루빨리 공군을 출동시켜 공군엄호와 지원을 제공해 달라. 둘, 무기장비를 공급해서 지원군의 장비수준을 올려달라. 셋, 무기장비공급은 임대 혹은 대출의 방법으로 하는 것이 가장 좋겠다. 그리하여 출병원조로 인해 국내의 경제에 조성되는 압력을 감소시킬 수 있다. 소련은 무기장비제공에는 동의했다. 그리고 신용대출의 방식으로 지급하는 것도 동의했다. 다만 공군을 즉시 출동하는 것은 동의하지 않았다. 팽덕회는 이렇게 회고한다: "주총리, 임표가 소련으로 갔는데, 소련이 총, 포, 탄을 주겠다고 했지만, 비행기는 출동하지 않겠다고 했다. 모주석은 이때 이로 인하여 나에게 물었다. '싸울 수 있겠는가? 소련은 완전히 손을 씻는게 아닌가?' 나는 대답했다; '이것은 손을 절반만 씻는 것이다. 싸울 수 있다.' 최종적으로 모주석이 말했다: '설사 이기지 못해도 좋다. 그래도 그들이 우리에게 빚진 것이다. 내가 언제든지 싸우고 싶으면, 다시 싸울 수 있다.'" 조선출병은 비록 소련의 출병요구에 응한 것이지만, 확실히 중국의 자체적인 전략적이익과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의사결정이었다. 소련의 '반쯤 손을 씻는 것'도 좋고, '손을 완전히 씻는 것'도 좋다. 이 전투는 어쨌든 시작되어야 한다. 설사 지더라도 중국은 한반도건에 대한 '발언권'을 갖게 된다. 나갈 수도 물러날 수도 있다. 전략적으로 주도적인 입장에 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련이 공군을 출동시키든지 말든지, 중국의 출병결심은 바뀌지 않았다.
셋째, 승산이 있느냐는 것이다. 지원군의 장비와 미군의 장비를 비교하면, 차이가 아주 크다. 미군은 고도로 기계화된 현대식 군대이다. 그리고 조선에 참전하는 지원군은 기본적으로 소미가보창(小米加步槍, 잡곡에 소총) 수준이다 화력, 돌파력, 기동력과 군수확보력에도 모두 미국에 뒤쳐진다. 특히 미군은 강력한 공군을 보유했고, 제공권을 장악해서 효과적으로 지면행동을 압박할 수 있다. 모택동이 나중에 김일성에게 말했다; '과거 나는 일찌기 너희 군대를 따라 남조선으로 가본 적이 있는 중국 신문기자와 얘기한 적이 있다. 나는 그에게 물어봤다. 도대체 미군의 포화와 공군살상력이 어느 정도 대단한가? 그의 말에 따르면, 주요살상력은 공군이 아니라 육군이라고 했다. 내가 말했다. 그렇다면 좋다. 우리는 공군이 없기 때문이다. 육군이라면 얼마든지 있다." 모택동은 자신의 육군에 자신감이 있었다. 육군과 육군이 싸우면, 지원군이 반드시 밀리지는 않을 것이라 여겼다. 왜냐하면 전쟁은 물질역량을 겨루는 것이기도 하지만, 더더욱 정신역량을 겨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심, 사기 및 지휘능력으로 무기장비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다. 모택동은 믿었다. 고양된 전투정신을 보유하고, 풍부한 전쟁경험이 있고, 뛰어난 지휘술을 지닌 지원군은 '철다기소(鐵多氣少)'의 미군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넷째, 중국이 일단 참전하면 전쟁을 한반도내로 통제할 수 있을 것인가? 모택동은 처음부터 이 문제를 고려했다. 이는 지원군이 한반도에서 미군을 섬멸할 수 있느냐를 결정한다고 보았다. 만일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조선문제는 해결된다. 설사 미국이 오랫동안 패전을 인정하지 않거나, 심지어 중국고 공개적으로 전투를 벌이더라도, 전쟁규모는 크게 되지 않을 것이다. 시간도 길지 않을 것이다. 가장 불리한 상황은 양군이 대치하는 것이다. 미국은 공군으로 중국의 많은 대도시와 공업기지를 공급할 수 있다. 해군을 사용하여 중국연해지역을 공격할 수 있다. 모택동은 미군에 승리하는데 자신이 있었다. 그러므로 전쟁을 한반도내로 한정시킬 수 있다고 자신했다. 가장 불리한 상황은 피할 수 있다고 보았다. 출병결심을 내린 후, 공군사령관 유아루(劉亞樓)는 연해도시에 있는 항공학교를 내지로 이전시켜야할 지에 대하여 보고한다. 모택동의 대답은 '옮길 필요없다'는 것이었다. 이는 바로 그러한 자신감을 표명한 것이다. 이런 자신감은 출병을 결심하는데 아주 중요한 요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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