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한국/한중관계

한국의 중공군유해송환으로 본 한국전쟁의 진실

by 중은우시 2020. 10. 3.

글: 심주(沈舟)

 

2020년 9월 27일, 중국의 당매체는 크게 보도했다. 한국에서 제7차로 117명의 중공군인유해를 송환받았다고. 중공의 선전은 의문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한국전쟁이 끝난지 67년이 지났는데, 왜 지금에서야 비로소 중공군인의 유해를 송환받게 된 것일까?

 

당매체의 묘사에 따르면, 중공군인의 유해는 한국에서 송환받았다고 한다. 북한이 아니라. 왜 한국에서 송환되어 오는 것일까?

 

중공은 지금까지 '항미원조(抗美援朝)'라고 선전했다. 미국이 공격하는 것을 방어하고, 북한을 지원했다. 그런데 중국군인의 유해가 왜 한국에 있는 것일까? 여기에서 역사의 비밀이 드러난다. 다시 한번 중공의 거짓말이 들통나버린 것이다.

 

당매체는 이렇게 보도한 바 있다. 한국전쟁기간동안, 중국의 사망군인은 사망현장부근에 묻었다고, 단급(團級) 이상의 간부나 특급(特級), 일급(一級) 전투영웅들은 국내로 운송하여 안장할 수 있었다. 중국대륙에도 보통병사 혹은 무명열사묘역이 있다. 이는 주로 부상을 입고 귀국한 후 사망한 사람들이다.

 

절대다수의 전사한 중국군인 가족들은 전사자의 묘에서 제사를 지낼 수 없었다. 그들으 심지어 도대체 어디에 묻혀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한국에서 송환해온 수백명군인의 유해는 어쨌든 일부가족에게는 제사를 지낼 장소가 마련된 셈이다.

 

이는 한국의 국민과 정부에 감사해야할 일이다. 그들은 적군의 시신도 매장해주었을 뿐아니라, 묘원까지 조성해 주었다. <제네바협약>에는 전사한 적군에게도 묘지를 제공하고 존중해 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한국은 전국의 유해를 수집하여, 1996년 파주적군묘지를 조성했다. 한국의 경기도 파주에 위치해 있고, 남북한 군사분계선에서 5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 2013년까지, 매장된 북한과 중공군인의 유해는 1,100여구이고, 그중 중공군인의 유해는 425구이다. 중국군인묘지의 묘비는 북쪽을 향해 있다. 위에는 한글과 중문으로 "중국무명군인묘"라고 적혀 있다.

 

한국의 통계에 따르면, 2012년에만 28.5만명의 추모객이 왔는데, 그중 80%이상은 중국에서 왔다. 2013년, 한국대통령 박근혜가 중국방문기간동안 먼저 제안했다. 3.8선부근의 '적군묘지'에 있는 중공군인의 유해를 송환해주겠다고. 그후에 발견되고 송환된 유해는 더욱 많다.

 

지금, 중국은 크게 선전하며, 자랑한다. 물론 이것은 반미선전을 위함이다. 그러나 오히려 중공이 중공군인의 유해에 대하여 실제로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드러냈을 뿐이다. 한국인은 적군전사자에게도 마땅히 가져야할 존중을 보여 주었다. 이것은 정상적인 사회의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적지 않은 중국인에게 이는 이상하다고 여겨진다. 중공이 여러해동안 진행한 세뇌교육으로 인간성이 말살되었기 때문이다. 전세게에서 이런 나라는 특이한 경우이다. 만일 한국에서 먼저 제안하지 않았다면, 중공정권은 영원히 이를 물어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국정부의 소개에 따르면, 이들 중국군인은 한국전쟁기간동안 전투가 가장 치열하게 벌어진 강원도 횡성, 철원, 홍천 그리고 경기도 연천, 가평등지에서 전사하였다고 한다. 

 

이는 다시 한번 중국인의 인식을 깨트려 버렸다. 중공은 지금까지 "항미원조" "보가위국(保家衛國)"했다고 선전했다. 중공군대가 어찌 한국경내에서 전사할 수 있단 말인가?

 

대다수의 중국 당매체는 고의로 사실을 회피한다: <해방군보> 산하의 <상관신문(上觀新聞)>은 일부 상세내용을 공개한 바 있다. 비록 가리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진상이 드러나 버렸다.

 

<상관신문>의 글에 따르면, 1951년 4월 22일, 중공군은 제5차전투를 시작한다. 5월 22일, 유엔군은 13개사단의 병력으로 반격을 진행하고, 중공군의 60군의 방어선이 돌파당한다. 중간의 왕근산(王近山)병단과 동쪽의 송시륜(宋時輪)병단의 연결이 철저히 차단된다. 수십만대군은 근 만명의 부상병을 이끌고 북으로 철수해야만 했다.

 

이는 1951년 봄에, 중공군대는 다시 한번 38선을 돌파하여 한국으로 침입해 들어갔다는 것을 말해준다. 당시 유엔군은 이미 정전협상을 제안했다. 그러나 중공군대는 수십만명을 집결시켜 한국으로 침입해 들어갔던 것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무슨 "항미원조", "보가위국"이 아니다. 

 

글에 따르면, 제5차전투의 작전도면을 살펴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철원, 금화만 수중에 여전히 가지고 있을 뿐 최소한 서쪽은 안장적이었다. 그러나 철원, 금화의 전초는 지포리와 연천이다. 바로 철원, 연천과 지포리에서 잔혹하고 장렬한 저격전이 벌어졌던 것이다.

 

중공군대는 우세한 병력을 집결시켜, 한국의 철원, 금화, 지포리와 연천지구로 쳐들어갔고, 유엔군의 반격에 수십만의 전군이 전멸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이들 지구에서 미군의 반격을 막고 더 많은 전사자가 발생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이들 소위 저격전에 참가한 중공군인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수 밖에 없었다.

 

누가 평화협상을 거절하고, 침공을 시작하는 전투를 벌였던가? 당연히 중공군이다. 한국전쟁은 처음부터 끝까지 침략전쟁이었다. 중공과 북한정권은 결국 이기지 못했다. 유엔군에 의하여 삼팔선 이북으로 철저히 쫓겨난 것이다. 얼마나 많은 무고한 생명이 이곳에서 죽어갔던가

 

<상관신문>의 글에 따르면 15군은 1/3의 병력을 잃었다고 한다. 미제10군 뉴먼돌격대 장갑특수부대는 3시간이면 20킬로미터를 돌파할 수 있었다. 이 방어선은 기계화정도가 아주 높고 화력이 강력한 미군에 있어서 그다지 장애가 되지 않았다. 15군의 상대방중 하나인 미군25보병사단은 미군의 방어선돌파전문이었다. 동작은 신속하고 기동력이 좋았다.

 

중공군은 맨몸으로 미군의 장갑부대를 막아내야 했다. 그러다보니 사망자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글에서는 여전히 중공군이 용맹함을 묘사하려 했다. 그러나 이처럼 죽음을 겁내지 않는 병사의 죽음은 바로 한국의 영토내에서 발생하였다. 중국을 방어하기 위한 중국의 영토나 변경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중공의 제63군의 철원방어구에는 2.4만명이 있었다. 여기에 겨우 1개의 포병단과 1개의 로켓포영이 있었다. 그런데 반달에서 20일을 버티라고 명령받는다. 미군의 기병제1사, 보병제25사, 영국보병 28사, 29여단 합계 5만여명의 군인,화포 1,300여문, 탱크 180대가 동원된다. 그중 기병1시단은 용맹하기로 명성이 높고 전공이 혁혁했다. '선구사단' '상승사단'으로 불렸다.

 

글에서는 미군이 패배했다고 쓰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미국기병1사단의 중류탄포가 14개영이 있어 매일 수만발을 쏘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공습도 있었다고 했다. 전투는 3일밤낮을 계속했고, 많은 진지에는 겨우 1,2명만 남는다.

 

이런 류의 생명을 무시하는 저격전은 실제로 중공 제5차전투가 맹목적인 침공이었음을 가리기 위한 우둔한 의사결정이었다.

 

그리고 글에서는 애국주의를 선전하며, 63군이 철원저격전에서 만명이상 사망했고, 적 1.5만명을 섬멸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전적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글에 따르면 중공군은 유엔군의 진격을 저지하였고, 한국전쟁의 전선은 대체로 38선으로 확정된다. 1951년 7월 10일, 쌍방은 협상테이블에 앉는다.

 

중공군은 실제로 38선으로 되쫓겨왔다. 제5차전투는 철저히 실패한 것이다. 할 수 없이 협상을 진행해야 했다. 만일 일찌감치 정전협정을 체결했더라면, 수많은 목숨을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중공은 당연히 그런 말을 하지 못하고 있다.

 

1951년 2월 1일, 유엔총회는 498호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중공정권이 북한의 침략행위에 개입한 것으로 인정했고, 중공정권에 대하여 유엔군에 대항하지 말고 한반도에서 물러날 것을 호소한다. 당시 중공정권은 유엔의 회원이 아니었다. 시진핑은 얼마전 유엔총회에서 75년역사를 얘기했지만, 당시의 유엔에 중공정권은 존재하지 않았다.   

 

제5차전투의 통계에서 중공은 공식적으로 8.5만명이 사망했다고 인정한다. 다만 적 8만여명을 섬멸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미국의 공개자료에 따르면, 중공군의 사망자는 73,207명이상이라고 하였다. 포로로 잡힌 중공군은 8,749명이다. 미국 제8군단의 사상자총수는 2,647명이다. 미국의 문서에 따르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팽덕회는 나중에 그의 군사생애에서 4가지의 잘못중 하나라고 회고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훼멸적인 실패를 맛본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중공지도자는 목표를 바꾸게 된다. 유엔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는 것에서, 자신의 안전을 지키는 것으로. 그리고 협상을 통해 전쟁을 끝내는 것으로.

 

중공군이 한국을 침입한 것은 제5차전투만이 아니었다.

 

1950년 12월 31일, 중공군은 제3차전투를 진행하여, 서울, 인천등지를 점령한 바 있다. 유엔군은 철수했다. 당시 중공군의 전선사령관 팽덕회는 미군이 유인책을 쓴다고 생각했다. 중공군은 보급도 쉽지 않아 더 이상 전진하지 않았다.

 

1951년 1월 13일, 유엔군은 정전협상을 제안한다. 다만 모택동은 유엔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낼 능력이 있다고 보고, 쇠뿔도 단김에 빼어 한반도틀 통일하고 싶어했다.

 

그후 유엔군이 반격을 하여 서울을 재탈환한다. 미군의 맹렬한 공습에 팽덕회는 직접 북경에 보고해야 했다. 모택동은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 한국전쟁은 속승(速勝)할 수 있으면 속승하고, 속승할 수 없으면 완승(緩勝)해야 한다.

 

제4차전투는 중공군이 물러난 후 다시 병력을 증권하게 된다. 전체 전쟁기간동안 한반도에 들어온 인원은 240만명에 이른다. 총인원수는 유엔군을 넘어선다. 중공은 다시 맹목적으로 제5차전투를 일으켰다. 다시 참패한 후, 비로소 협상을 시작한다. 그리하여, 제3, 4, 5차전투는 실제로 주로 한국경내에서 일어났다. 중공군은 한국에 침입했다가 격퇴당한 것이다.

 

그후, 정전협상이 2년간 지속된다. 중공군은 계속 38선부근에서 쟁탈전을 벌였다. 미군의 공중, 화포우세앞에서 중공군은 다시 한번 무고한 생명을 무수히 희생시킨다. 중공이 선전하는 소위 상감령전투가 바로 그 중 하나이다. 다만 미군의 기록에 따르면, 그런 특수전투는 없었다. 단지 무수한 밀고당기기식 쟁탈전이 있었고, 그 중의 하나일 뿐이다.

 

2014년 10월 29일, 중공은 한국전쟁에서 중공군 197,653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한다. 부상인원(중상포함)은 383,218명이며, 치료받은 후 귀대한 병사가 217,149명이라고 한다.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되었고, 1953년 7월 27일에 정전되었다. 중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침략전쟁을 진행한 것이다. 많은 병사들이 무고하게 사망했을 뿐아니라, 국력도 심각하게 손상되고, 국제적으로도 고립에 빠지게 된다. 한국전쟁으로 300만의 군민이 사망했는데, 중공정권은 바로 그 원흉이다. 중공군 22,000여명이 포로로 잡혔는데, 그중 15,599명은 대륙으로 귀국하기를 거절했다.

 

오늘날 중공정권은 여전히 교훈을 얻지 못했다. 여전히 군사확장과 도발을 계속 시도하고 있으며, 국제사회의 적이 되려 한다. 중화민족은 다시 한번 또 다른 재난에 직면해 있다. 중국인은 무고한 전쟁에서 더 이상 희생되어서는 안된다. 여하한 사람도 의미없는 전쟁에서 생명을 잃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