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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유비)

왜 유비의 촉한진영에 반도가 가장 많았을까?

by 중은우시 2020. 1. 3.

글: 기점역사(起點歷史)


<삼국지>에서 유비에 대한 평가는 "홍의관후(弘毅寬厚), 지인대사(知人待士)"였다. 그에게 "한고조의 풍이 있고, 영웅의 그릇이었다." 조조도 유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오늘 천하의 영웅은 오직 그대와 나 조조뿐이다." 손권은 이렇게 말한다: "유예주(유비)가 아니면 조조가 될 자는 없다." 공명의 평가는 이러하다. "영재개세(英才蓋世), 중사모앙(衆士慕仰)"


천백년이래로 모두 유비는 가장 덕으로 사람을 받아들이고 사람의 마음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런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예를 들어, 유비는 자신이 감화시킨 자신을 죽이러 왔던 자객으로 하여금 자신의 아들을 교육시키게 한다. 그리고 "악한 일은 작다고 하여 하지를 말고, 선한 일은 작다고 하여 하지 않아서는 안된다." '오로지 현명하고 오로지 덕이 있어야 다른 사람을 감복시킬 수 있다."


이치대로라면, 유비의 덕행과 수양이라면 그가 데리고 있는 집단도 당연히 가장 단결하고, 기율이 가장 엄명하며, 전투력이 가장 강한 집단이 되어야 한다. 다만 사실은 정반대이다. 유비진영에서 반도가 가장 많이 나왔다. 조조나 손권를 합친 것보다도 많다.


한나라때는 절의(節義)를 중시했고 일단 반도(叛徒)가 되면, 통상적으로 인격의 상실과 신용의 파산을 의미한다. 그러나 유비의 수하들은 하나하나 배반한다.


관우가 형주를 잃은 사건에서 관건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미방(縻芳)과 부사인(傅士仁)이다. 상용3군을 이끌고 조조에 투항한 맹달(孟達), 이릉지전에서 투항한 황권(黃權), 이 몇몇은 모두 촉한의 중량급인물이다. 그리고 손오에 투항한 후 구경(九卿)에 오른 반준(潘浚), 관건적인 시기에 장비를 살해하고 적에 투항한 범강(范强), 장달(張達)등이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촉한의 반도는 수량이 가장 많고, 직급이 가장 높다. 종합적으로 다른 집단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다. 촉한의 장문인으로서 유비는 충의를 생명으로 여긴다. 그러나 전체 촉한집단을 두고 고찰해보면, 이 점은 거의 작용하지 못한 것같다. 왜 그랬을까?


조조는 사람의 마음을 얻을 줄도 알고 사람을 다스릴 줄도 안다. 수하들이 고분고분하도록 잘 다스렸다. 마음을 얻는 측면에서는 유비도 괜찮았다. 심지어 조조보다 뛰어났다. 다만 사람을 다스리는 측면에서 그의 수단은 확실히 연약했다. 조조와 비교하여 여러 단계의 차이가 있다.


맹달이 조위에 투항한 것은 촉한에 헤아릴 수 없는 손실을 주었다. 다만 사료기재에 따르면, 그의 성도에 있는 친족이나 친구들은 연좌로 처벌당하지 않았다. 


황권이 투항하자, 조위에서는 즉시 전한다. 하루빨리 가족을 위나라로 데려오라고. 그러나 황권은 전혀 조급해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유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유비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과연 그의 가족은 성도에서 잘 살았고, 아들 황숭(黃崇)은 상서랑(尙書郞)을 맡는다.


미방의 투항이 조성한 직접적인 손실을 가장 컸다. 그의 형인 미축(縻竺)은 '면박청죄(面縛請罪)'로 가볍게 넘어간다. 유비는 그에 대하여 '숭대여초(崇待如初)'했다.


이렇게 보면 유비는 과연 명군(明君)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배반의 댓가가 너무 약한 것이 아닌가?


유비는 균형유지를 좋아했다. 제갈량에게 아들을 맡기면서 다시 이엄을 부(副)로 임명하고, 맹달을 보내어 상용을 지키게 하면서 유봉을 보내 맹달을 견제하게 했다. 사람들에게 인위적으로 모순을 만들어내니 내부의 불안정에 대한 은환을 심은 셈이다.


유비는 사람을 잘 알아보았다. 그는 마속을 중용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제갈량에게 말해준다. 다만 마속은 나이가 어릴 때 태수가 되는데, 그가 동의하지 않았으면 될 수 있었을까?


유비라는 사람은 평상시에 굿가이역할은 잘 했다. 그러나 배드가이역할을 해야할 때는 잘 하지 못했다. 그는 체면을 너무 중시한 것이다. 특히 그와 생사를 같이 했던 형제들에 대하여는 더욱 그러했다. 그의 장점은 감정을 중시한다는 것이지만 단점은 집단을 관리할 줄 몰랐다는 것이다.


촉한집단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유비 본인이 여러번 '배반하여 투항한' 경력이 있다; 공손찬을 벗어나 스스로 발전했고, 여포에 투항했다가 다시 반격을 가한다. 조조에 투항했다가 다시 모의한다. 원소에 귀순했다가 다시 원소를 벗어난다. 유표에 귀순했다가 유표의 아들 유종과 함께 행동하지 않고, 유장이 불러 익주로 들어갔다가 익주를 빼앗고....


유비의 분투사를 살펴보면, 그는 투항했다가 다시 배반하고 배반했다가 다시 투항하는 역사이다. 그의 이런 역사는 '삼성가노'라고 불리던 여포가 발끝에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이다.


배반에 익숙한 유비는 자연히 배신한 장수들에 대하여 그다지 남다르게 여기지 않았다. 이것이 아마도 유비진영에서 가장 쉽게 반도가 나타날 수 있었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