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지역사(知歷史)
유비는 214년 익주를 취한다. 그후 215년 제1차 형주위기가 발생한다. 즉 손권이 유비에게 형주를 돌려달라고 한 것이다. 당시 조조는 한중의 장로(張魯)에 군사행동을 취한다. 유비는 익주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우려하여, 동오의 요구를 받아들여 형주를 재분배하고, 주력을 형주에서 철수한다. 217년, 유비는 한중을 공격한다. 219년 하후연을 격패시키고, 한중을 탈취한다. 유비의 전략적인 취사선택을 보면, 한중은 형주보다 우선시되었다. 만일 유비가 익주를 취한 후, 익주에서 수비적인 입장을 취하며, 한중을 탈취하는 것을 서두르지 않고, 적극적으로 형주를 발전시키고, 역량을 형주에 집중하여 조위를 공격했다면, 촉한에게 더욱 좋은 선택이 아니었을까?
유비가 한중을 더욱 중시한 것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하나는 유비는 여러 면에서 한고조 유방을 본받고 따라하려 했다. 옛날에 한고조 유바은 한중에서 출발하여 천하를 얻었다. 그래서 유비는 자신의 천추대업도 한중에서 출발하기를 바랬던 것이다. 이 점은 유비가 한중에서 비로소 스스로 한중왕을 칭한데서도 알 수 있다. 성도에서 촉왕을 칭한 것이 아니라.
둘째는 제갈량의 <융중대>의 영향이다. 제갈량의 계획은 "천하에 변고가 생기면, 상장 한 명에게 형주의 군대를 이끌고 완, 락으로 향하게 하고, 장군(유비)은 익주의 무리를 이끌고 진천(秦川)으로 나아가면....패업을 이룰 수 있고, 한실은 다시 흥할 수 있다." 한중을 취하는 것은 위 계획의 첫걸음이다.
한중을 형주보다 우선시한 전략은 두 가지 면에서 마이너스영향을 끼쳤다.
첫째, 유비는 형주의 일부를 손권에게 양보해야 했다. 동오가 원래 보유하고 있던 강하군(江夏郡)뿐아니라 동오에게 다시 장사군(長沙郡), 계양군(桂陽郡)을 내어준다. 유비는 천신만고끝에 한중을 얻었지만, 조위가 이미 주민을 모두 이주시켜 한중은 텅 비어 있었다(개략 8만의 인구를 이주시켰다). 형주 일부를 내주고 한중을 얻었지만, 유비집단의 실력증가에 그다지 도움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약화된다.
둘째, 한중을 취하기 위하여, 215년 형주에서 철군했을 때부터 219년 하후연을 격패시키기까지, 이 시기에 유비의 군대는 가장 컸고, 가장 완비된 시기이다. 법정(220년 사망), 황충(220년 사망), 마초(222년 사망), 뇌동(雷銅), 오란(吳蘭)도 아직 전사하기 전이다. 만일 이때 촉한의 역량을 집중하여 형주에서 돌파구를 마련했다면, 나중에 관우가 홀홀단신으로 양번지전을 일으키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승산이 훨씬 컸을 것이다.
제갈량의 <융중대>의 양로출격의 전략은 약세인 일방에게 그다지 좋은 전략이라고 볼 수 없다. '병력을 집중시켜 우세를 점하는 것'이 군사상식이다.
한중을 취하지 않았을 때의 단점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다시 한중으로 진공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앞에서 얘기했지만 중요한게 아니다. 오히려 역량을 형주에 집중시켜 진격할 수 있다.
둘째는 한중이 없으면, 조위가 비교적 쉽게 촉한을 향하여 진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문제이다. 왜냐하면 숭산준령의 진령은 한주, 관중 두 곳이 거의 평등하기 때문이다. 다만 한중(동천)에서 촉(서천)으로 진격하려면, 조위측이 더욱 유리하다. 최소한 양식을 장거리운송하는 것과 군대가 원거리행군해야하는 난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한중을 촉을 공격하는 교두보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것은 촉이 한중과의 관계에서 지키는데 필요한 험준한 요새가 없는 것은 아니다. 검각(강유), 파서(장비)에서 조위는 조금도 진격하지 못하고 패전한 적이 있다. 그러므로, 한중을 굳이 취하지 않더라도, 촉한이 서부전선에서 조위를 공격하기는 어려워지지만, 수비에는 그다지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유비가 익주를 취득한 후, 만일 한중을 서둘러 취하려 하지 않고, 익주에서는 수비태세를 취하고, 역량을 집중하여 형주를 발전시켰더라면, 관우의 양번지전은 촉한의 전력을 기울인 전략이 되었을 것이고, 양번을 돌파하고, 허창으로 진격하여, 낙양을 취하러 갔다면, 아마도 더욱 큰 전과를 거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유비의 주력이 형주에 위치하므로, 손권이 형주에 대하여 욕심을 부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쉽게도 유비는 너무나 한고조 유방을 닮고 싶어했다. 그리고 제갈량의 말을 너무 잘 들었다. 그래서 오리혀 병력을 나누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 촉한의 발전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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