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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유비)

유선이 장비의 두 딸을 취하면서, 관우의 딸은 취하지 않은 이유는...?

by 중은우시 2020. 4. 27.

글: 지역사(知歷史)

 

아마도 유선(劉禪)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이릉이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유비(劉備)는 일생동안 4명의 아들을 두었다. 각각 유선, 유봉(劉封), 유리(劉理), 유영(劉永)이다. 그런데, 유비는 굳이 성격이 유약한 유선에게 황위를 넘겨 주었다. 많은 사람들은 유비의 이런 결정을 기이하게 여긴다. 유비는 왜 그렇게 하였을까?

 

기실 사서 <삼국지>에는 이미 명확하게 답을 제시해 놓았다. 유비의 유조(遺詔)에는 일찌기 이런 말이 쓰여 있다: 제갈량이 예전에 사원의 앞에서 유선이 지혜도 있고 도량도 있다고 칭찬한 바 있는데, 사원은 그 말을 유비에게 전달했다. 그래서 유비는 비로소 유선을 후계자로 결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유비는 일생동안 제갈량을 신임했고, 그는 제갈량은 절대 아부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제갈량이 그렇게 말했으니, 자신의 결심하는데 아무런 주저함이 없었을 것이다.

 

속담에 "남대당혼(男大當婚), 여대당가(女大當嫁)" 남자는 나이가 들면 장가를 가야하고, 여자는 나이가 차면 시집을 가야한다는 말이 있다. 유비가 말년에 이르러, 가장 신경쓴 일이 두 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힘들게 얻은 강산이고, 다른 하나는 후계자인 유선의 혼사였다. 강산의 일이야 유비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혼사는 유비가 처리할 수 있는 것이었다. 심사숙고끝에 유비의 눈은 장비의 딸에게로 향했고, 결국 유선은 장비의 두 딸을 취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에 대하여 이상하다고 여긴다. 왜 유비는 유선을 위해 관우의 딸을 취하게 해주지 않았을까? 많은 사람들은 여기에 오해를 한다.

 

<삼국연의>에서 유비와 관우, 장비는 도원결의를 했다. 이는 모두 아는 리이다. 그러나 역사상, 유비는 관우, 장비 두 사람과 결의형제를 맺지 않았고,그들은 그저 단순한 군신관계였다. 일부 사학자들은 유비가 관우와 사돈을 맺지 않은 것에 대하여, 관우의 세력을 꺼렸기 때문이라고도 말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관우의 죽음이 기실 유비가 기획한 것이라고 한다. 유비는 드러내놓고 관우를 제거할 수 없어서, 손권의 손을 빌어 관우를 죽여버린 것이라는 말이다.

 

관우의 죽음에서 '시작용자(始作俑者)"가 누구인지는 아마 아무도 모를 것이다. 다만 유일하게 확정할 수 있는 것이라면 유비의 아들이 확실히 장비의 두 딸 각각 경애황후(敬哀皇后)와 장황후(張皇后)를 취했다는 것이다. 고대에 부모는 자녀의 혼사를 정하는데 세 가지를 고려했다. 하나는 문당호대(門當戶對). 즉 집안이고, 다른 하나는 연령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인품과 재능이다. 유비는 일국의 주인으로서, 후계자의 혼사에 관하여 여러가지를 고려했을 것이다.

 

당시 삼국시대의 중국에서 세 집안이 혼사를 할만했다. 첫째는 손권, 둘째는 관우, 셋째는 장비이다. 손권은 예전에 유비에게 정략결혼을 청한 바 있으나 유비가 거절했다. 유비는 손권의 인품을 멸시했다. 결국 유비는 관우와 장비 중에서 선택해야 했고, 장비의 딸을 선택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관우의 권세를 꺼렸기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유비와 관우는 비록 군신관계이지만, 관계가 친구처럼 가까웠다.

 

유비가 관우의 딸을 선택하지 않은 것은 관우를 꺼려서도 아니고, 관우의 딸이 인품에 문제가 있어서도 아니다. 오직 나이때문이다. 유선은 관우의 딸보다 3살이나 어렸다. 고대에 부부는 통상적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나이가 많았다. 여자가 남자보다 나이가 많은 경우는 드물다. 그런데, 장비의 딸은 유선과 나이가 맞았다. 그래서 유비는 장비의 딸로 선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