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지방/북경의 어제

명청(明淸)시대 북경의 창(倉)과 고(庫)

중은우시 2019. 12. 31. 17:12

글: 장쌍림(張雙林)


2019년 11월 6일, 1달반의 수리를 거쳐 북경 조양문북소가(朝陽門北小街)에 해방군총의원 제7의학센터 서문의 북쪽에서 근 400미터에 이르는 창고외벽이 새로 출현했다. 이곳은 지금으로부터 이미 600년전 명청시기 양창(糧倉)의 바깥벽이다. 마침내 '최초의 모양'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고대에 관청건축물과 이웃하거나 관련된 지역에는 이름을 지을 때 그에 따라 짓는다. 그러므로, 북경에는 많은 창(倉) 혹은 고(庫)로 명명된 거리나 골목(후통)이 있다. 지명은 역사의 '활화석'이다. 지금 이들 세월의 창상을 겪은 지명은 사람들이 북경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대체불가능한 역할을 하고 있다.


물건을 보존하는 창과 고는 오늘날의 언어환경에서는 혼동하여 하나로 부른다. 뭉뚱그려서 '창고'라고 부른다. 고대에, 백성들이 물품을 두는 곳은 그저 화잔(貨棧) 혹은 퇴방(堆房)이라고 불렀다. 마음대로 '창'이나 '고'라고 부를 수 없었다. 중국에는 창름부고(倉廩府庫)라는 말이 있다. 일반적으로 곡물을 저장하는 건축물을 '창(倉)'이라 부르고, 쌀을 저장하는 건축물을 '늠(廩)'이라 부르며, 국가에서 문서 자료를 보관하는 건축물을 '부(府)'라고 부르고, 황금, 비단, 재물, 무기를 보관하는 건축물을 '고(庫)'라고 불른다. 그리하여, '창름'은 양식을 저장하는 곳의 통칭이고, '부고'는 국가에서 문건, 물자, 금, 비단을 보관하는 곳의 통칭이다. <시경>에는 이미 창, 늠등의 명칭이 나온다. <시경.소아>에는 "내구천사창(乃求千斯倉), 내구만사상(乃求萬斯箱)"이라는 명구가 있다. 춘추시기 관중(管仲)의 <관자.목민>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창름실즉지예절(倉廩實則知禮節), 의식족즉지영욕(衣食足則知榮辱)"(창고가 가득차면 예절을 알고, 의식이 풍족하면 영욕을 안다) 한나라에 이르러, 수도에 태창(太倉)을 설치하고, 태창령(太倉令)이 관할한다. 각지에는 상평창(常平倉)을 설치하고, 정부는 풍년일 때는 양식을 매입하여 보관하여, 곡물값이 싸져서 백성들이 손해보는 것을 막고, 흉년에는 보관하던 양식을 매각하여 식량가격을 안정시켰다.


명청시기에 이르러, 북경에도 여러 창과 고가 설치된다. 양자는 엄격히 구분되었다. 개념과 의미는 서로 다르다. 모두 알고 있다시피 명청시기의 도성으로서 북경에는 적지 않은 '창'과 '고'가 있었다. 가장 유명한 것은 마땅히 "경사십삼창(京師十三倉)" 및 "호부삼고(戶部三庫)"이다. 조양문북소가의 창고 바깥담장은 십삼창중 부신창(富新倉)이다. 


명나라때 중앙행정기관인 내각육부에 소속된 창고는 내고(內庫)라고 불리웠고, 내고는 경사의 황성안에 설치되었다. 명나라때 태감 유약우(劉若愚)가 쓴 <작중지(酌中誌)>를 보면, 명나라때 황가고(皇家庫)의 건제는 아주 완비되어 있었다. 그중 내부공용고(內府供用庫)는 황성이십사아문, 산릉(山陵)등의 내관식미(內官食米)를 담당하고, 사은고(司銀庫)는 천재고(天財庫)라고도 불리는데, "무릇 보원국(寶源局)등에서 주조해낸 동전은 당해부에서 본고에 넣어두어 향후 상으로 하사하는데 쓰도록 준비하는데 쓴다." 내승운고(內承運庫)는 "궁안에 있는 것은 동유고(東裕庫), 보장고(寶藏庫)라고 부르는데 모두 이고(裏庫)라고 불렀다", 남성 자기등의 고는 모두 외고(外庫)라고 불렀다. 무릇, 금은, 사라(紗羅), 개사(鎧絲), 직금(織金), 섬광면융(閃光綿絨), 옥대(玉帶), 상아(象牙), 마노(瑪瑙), 주보(珠寶), 산호(珊瑚)류는 모두 외고에 넣었다. 그리고 절강등 성에서 올린 '절량은(折糧銀)'도 외고에 넣었다.


상술한 고 외에 명나라때는 서십고(西什庫)도 있었다. 자금성의 서쪽에 있어서 서십고라고 불렀다. 서십고는 서십고(西十庫)라고도 부르는데, 갑자고, 을자고, 명자고, 정자고, 무자고, 광영고, 광혜고, 광적교, 장벌고와 승운고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