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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북경의 어제

베이징의 노자호(老字號) 육필거(六必居)의 현액(懸額)은 엄숭(嚴嵩)이 썼을까?

by 중은우시 2020. 6. 11.

글: 용가독사(勇哥讀史)

 

TV드라마 <대명왕조1566>을 보면 이런 장면이 있다:

 

명나라때, 북경의 노자호 점포인 '육심거(六心居)'가 있었다. 이곳은 조(趙)씨성의 형제 6명이 창업한 것으로, "육인동심(六人同心)"이라는 뜻이다. 대신 엄숭(嚴嵩)은 육심거의 장채(醬菜)를 아주 좋아해서, 계절마다 새로운 장채가 나오면, 엄숭은 가정제(嘉靖帝)에게 한 단지씩 보내곤 했다. 가정제는 육심거의 장채를 맛본 후 아주 만족하여, 육심거의 '심(心)자에 획을 하나 추가했다. 그렇게 하여, "육필거(六必居)"가 되었다. 그리고 엄숭이 직접 현액을 써서 점포의 이름으로 삼았다.

 

엄숭이 육필거의 점포현액을 써주었다는 주장은 민간에 널리 알려져 있다. 육필거박물관의 공식입장은 엄숭이 육필거의 점포 편액을 써준 것은 맞지만, 가정제가 육필거로 이름을 고친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명왕조1566>은 역사소설을 개편한 드라마이고, 약간의 전설적인 모습을 가미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으로 보고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정제가 육필거로 점포이름을 고쳤다는 것은 놔두고, 엄숭이 육필거의 편액을 써준 것은 사실일까?

 

육필거박물관의 소개에 따르면, 육필거는 명나라 가정9년((1530)에 창업했고, 이미 49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명실상무한 백년노자호이다. 육필거는 산서 임분(臨汾) 서두촌(西杜村) 사람인 조존인(趙存仁), 조존의(趙存義), 조존례(趙存禮) 형제가 창업했으며, 전문적으로 "시미유염장초차(柴米油鹽醬醋茶)"중에서 앞의 6가지를 팔았다. 마지막의 차(茶)는 취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름을 육필거(六必居)라고 지었다.

 

육필거에는 또 다른 의미도 있다. 처음에 육필거는 양조업을 했다. 술을 양조하려면 "서도필제(黍稻必齊), 국얼필실(麯蘖必實), 담치필결(湛熾必潔), 도자필량(陶瓷必良), 화후필득(火候必得), 수천필향(水泉必香)"이라고 한다. 그 의미는 기장과 쌀등 원료은 반드시 잘 갖추어져야 하며, 누룩은 반드시 견실하고, 제작과정은 반드시 깨끗해야 하고, 술병은 반드시 좋아야 하고, 불의 세기는 반드시 적당해야 하며, 물은 반드시 향기로워야 한다는 뜻이다.

 

엄숭은 명헌종 성화16년(1480) 유근(劉瑾) 일당이 타도된 후, 엄숭은 가정제의 신임을 받는다. 관직을 갈수록 높아져서 내각수보(內閣首輔)까지 올라서, 조정내에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에 오른다. 시간적으로 보자면, 육필거가 창업한 때는 바로 엄숭이 가장 잘 나갈 때였다. 육필거의 주인이 엄숭에게 글을 써달라고 부탁했다면, 그는 아마도 뛰어난 상인이었을 것이다.

 

엄숭의 서예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엄숭은 진사출신으로 이갑제이명(二甲第二名)이었고, 과거급제했을 때 나이가 겨우 25살이었다. 이는 엄숭의 서예수준이 상당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엄숭 스스로의 소개에 땨르면, 그가 검산(鈐山)에서 요양할 때, 할 일이 없어서, 서예를 힘써 익혔다고 한다. 비바람이 불거나 한여름, 한겨울에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엄숭은 방서(榜書), 비문(碑文), 인문(印文), 권축(卷軸)등 여러 자체에 능했다. 그에 있어서 '육필거'라는 방서를 쓰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위에서 본 것처럼 시간적으로 보거나, 서예수준으로 보거나, 엄숭은 모두 육필거의 편액을 썼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등탁(鄧拓) 선생의 고증에 따르면, 엄숭은 육필거의 편액을 쓰지 않았다.

 

등탁은 유명한 언론인, 시인 겸 잡문가이다. 그는 또한 역사학자이기도 하다. 당시 등탁은 하남대학을 졸업한 후, <중국구황사(中國救荒史)>라는 책을 썼다. 등탁은 일찌감치 "엄숭이 육필거의 편액을 써주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거기에 의문을 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육핖거'의 편액글자를 보여주어도 그는 의문이 해소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편액에는 엄숭의 이름이 없을 뿐아니라, 증빙이 될만한 인장도 찍혀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중에, 등탁은 인연이 닿아 육필거의 파트너인 하영창(賀永昌) 선생을 접촉했고, 그를 통해 육필거의 자료들을 보았다. 거기에는 9장의 구방계(舊房契), 1권의 근장(根賬), 1권의 재동조택우은장(財東趙宅友銀賬), 1권의 취방조장(取房租賬)등이 포함된다. 등탁은 이들 자료를 자세히 살펴보고나서 그들 중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청나라 강희19년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강희19년은 1680년이다. 이는 육필거가 개략 청나라초기에 창업했을 것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명나라 가정연간이 아니라.

 

만일 육필거가 청나라초기에 창업되었다면, 엄숭은 육필거의 편액을 쓸 수가 없었을 것이다.

 

또 다른 역사학자인 왕혜은(王惠恩) 선생은 2000년 <중국역사박물관간> 2기에 <몇건의 육필거 문서소개>라는 글을 발표했다. 여기에서는 육필거가 명나라 가정9년(1530년)에 창업했다는 주장은 정확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육필거의 포동(鋪東, 가게주인)을 가장 오래 맡은 조치중(趙致中)에 따르면, 일찌기 계약보완때 이렇게 쓴 바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육필거상호는 명나라 가정9년 전문외(前門外) 양식점가로(糧食店街路) 서쪽 육필거 곽성(郭姓)이 1곳을 지금까지 영업해왔다" "본상호는 명나라 가정9년 9월 은3천냥을 주고 얻은 것이다....이 계약은 경자년 병란으로 유실되었다."

 

그러나, 육필거의 창업자는 조씨성의 여섯 형제가 아니다. 곽씨성의 주인이다. 나중에 육필거는 주인이 바뀌어 원저(原杼), 곽계방(郭桂芳)과 조벽(趙璧)의 3개 성씨의 사람이 경영했다. 청나라 도광2년(1822)이후, 육필거는 다시 주로 조씨성의 주인이 경영했다. 이렇게 보자면, 소위 '조씨형제 6명이 창업한 육필거'라는 것은 허구이다. '조존인, 조존의, 조존례형제가 육필거를 창업했다'는 것도 아마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아주 클 것이다.

 

이를 보면, 엄숭이 육필거에 편액을 써주었다는 말도 진실성이 상당히 낮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