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범정(范晶)
1922년, 목유개(穆儒丐)라는 만주족작가가 심양의 <성경시보>에 장편소설을 발표한다. <동명원앙(同命鴛鴦)> 이야기는 별로 복잡하지 않다. 주로 청말민초에 두 남자와 한 여자의 비극적 사랑이야기이다. 그러나, 책에서의 장면이 아주 감동적이다. 왜냐하면 이는 당시 경서지구(京西地區) 외삼영(外三營) 기인(旗人)의 진실한 심경을 그렸기 때문이다.
소위 '외삼영'이라 함은 청나라 중엽이후 청나라조정이 경성 서북교(西北郊)지구(지금의 해정구)에 차례로 건설한 원명원호군영(圓明園護軍營), 향산건예영(香山健銳營), 그리고 남전창외화기영(藍靛廠外火器營). 이 삼대군영은 모두 관(官), 병(兵)이 가족을 이끌고 거주하였다. 관청에서는 주택을 짓기 위하여, 사방의 주위에 담장을 만들어, '영방(營房)'의 국면을 형성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원명원호군영은 황제가 원명원에 있을 때의 안전을 책임지기 위하여 특별히 만든 호군이다. 주요 임무는 원명원지역을 방어하는 것이다. 황제가 원명원을 오가는 도중과 원명원에 머무는 기간동안의 안전을 책임진다. 건예영과 화기영은 특수부대이다. 건예영은 운제(雲梯)를 다루고, 후자는 화기(火器)를 다룬다. 그들의 주요 직책은 기동작전임무를 완성하는 것이다. 어디에든 중요한 전투가 있으면, 거기에 참전한다. 청나라조정은 국운이 흥성할 때, 팔기에 대하여 은양(恩養)정책을 쓴다. 외삼영의 전봉(前鋒) 1명은 매월 은4냥을 받고, 분기마다 양식 오석반을 받는다. 위전봉(委前鋒)은 매달 은3냥, 분기마다 식량 5석반을 받는다. 양육병(養育兵, 예비병)은 매달 은1냥반을 받았다. 그외에 기병(旗兵)은 오경기지(五坰旗地)의 수입을 받았다. 출정할 때는 그 외에 매월 은2냥을 추가로 받는다. 게다가 임시 '은상(恩賞)'도 받는다. 예를 들어, 제조전량(祭祖錢糧), 과부전량(寡婦錢糧), 혼상전량(婚喪錢糧)등이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외삼영의 기인들의 생활은 아주 풍족했다. 그래서, '노미수(老米樹)', '철간장가(鐵杆庄稼)"라는 이름도 얻었다.
청왕조가 쇠락하면서, 외삼영도 날로 몰락한다. 비록 점점 군사훈련을 게을리하고, 전투를 하지 않는 경사팔기(京師八旗)에 비하면, '교외에 있어 번화한 도시에 가깝지 않은' 외삼영은 그래도 날카로운 기운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역시 경사팔기와 같은 통병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도광원년(1821년), 도광제는 이렇게 우려한 바 있다: "건예, 화기 양영은 훈련이 원래 진지했고, 일이 닥쳤을 때 힘을 썼는데, 최근 들어 풍기가 예전만 같지 못하다."
더욱 문제인 것은 청말의 국력이 쇠약해지면서, 기인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기병의 향은도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광서말기, 이미 50%로 줄어든다. 예를 들어 건예영의 전봉(정규병사)은 원래 매월 4냥인데, 손에 쥐는 것은 2냥이 된다. 매분기별로 양식 5석반을 받야야 하는데, 실제로는 20%인 1석여에 불과했다. 당시의 물가로 보자면, 이 돈으로는 부부 2명이 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이고, 아이가 많으면 빈곤하게 살아야 한다.
팔기자제의 순결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청나라조정은 팔기자제는 기지(旗地)를 떠날 수 없고, 민간의 기술직에 종사할 수 없고, 장사를 할 수 없고, 민인(民人)과 통혼할 수 없도록 정했다. 이런 것들은 그들로 하여금 군대에 들어가는 것이 유일한 방법일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비록 광서24년(1898년) 광서제는 기인이 '사민지업(四民之業)을 배우고, 스스로 생계를 꾸리도록" 허용했지만, 팔기자제의 생존능력은 아주 취약했다. 외삼영의 기인들이 성안으로 들어가면 겨우 할 수 있는 것이 수레를 끄는 일, 기와를 얹는 일, 토아야(兎兒爺)를 제작하는 일등 뿐이다. 청나라조정이 신군을 편제한 후, 많은 청장년 기인은 외삼영을 떠난다. 그저 노약자, 부녀자와 어린아이들만 남는다. 이때부터 서교의 외삼영 영방은 사람이 드문 시골마을로 바뀌게 된다.
신해혁명후, 외삼영은 정식으로 해체된다. 비록 원세개와 민군이 달성한 <황실우대조건>에서는 "팔기,금군은 민국에서 개편하고, 급여는 그대로 준다"고 하였지만, 실제로 이 조항은 실현되지 못했다. 북양군벌과 국민당정부의 통치하에서 만주족을 배척하는 기풍이 강했으므로, 기인의 생활은 더욱 곤궁해진다. 목유개가 보기에, 서산 자락의 조용했던 외삼영의 보이는 곳마다 전원풍경이던 인간의 선계(仙界)는 민국이후 '건물이 거의 철거되어 엉망이 되었고, 골목 하나에 몇개의 집만이 남아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황무지였다."
민국이후, 팔기자제에게 지급되던 돈과 식량이 끊긴다. 일거에 곤궁에 빠진다. 1923년 5월, 북경 <익세보>에는 이렇게 적었다; "최근 들어 기인의 월향(月餉)이 끊기면서, 그들의 의식원(衣食源)이 끊긴다. 취업할 방법이 없는 사람, 신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은 물건을 전당잡히거나 팔아서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집안에 전당잡히거나 팔 물건이 없으면, 죽창(粥廠)으로 가서 죽을 받아먹으며 허기를 채웠다. 군벌혼전으로 죽창에서 죽을 나눠주는 것이 끊기자, 죽을 받아 연명하던 만주족은 절망적인 상태에 처한다. 어쩔 수 없어서 어떤 경우는 창기(娼妓)로 전락하고..."
청나라의 창업자들은 아마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추진한 은양제도가 일찌기 용맹했던 팔기자제를 관직에 나가지도 않고, 농사도 짓지 않고, 장사도 하지 않고, 사업도 하지 않으며, 농민도 아니고, 병사도 아니고, 장인도 아닌 자들로 만들어 버렸다. 청왕조가 멸망한 후, 팔기자제들은 사회의 최하층으로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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