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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북경의 어제

북경 향산(香山) 영안릉(永安陵)의 수수께끼

by 중은우시 2020. 7. 8.

글: 왕밀림(王密林)

 

전문사택아중승(傳聞舍宅阿中丞)

승사잔료설폐흥(勝事殘遼說廢興)

유갈난심응조석(遺碣難尋鷹爪石)

한무장몰영안릉(寒蕪長沒永安陵)

 

부증상(傅增湘)의 <향산잡영(香山雜詠)>에서 언급된 영안릉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북경의 서산 지역에 두 개의 황제릉이 있었다. 하나는 명대종(明代宗) 주기옥(朱祁鈺)의 경태릉(景泰陵)이고, 다른 하나는 요선종(遼宣宗) 야율순(耶律淳)의 영안릉이다. 그런데, 경태릉은 아직도 남아 있지만, 영안릉은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 두 명의 서산에 뼈를 묻은 황제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모두 국가의 위기때 옹립된 황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후세 사가들에 의하여 '사직을 지킨 공로가 있다'고 인정받는 주기옥과는 달리, 야율순은 '명부정(名不正), 언불순(言不順), 사불성자(事不成者)"인 참위지군(僭僞之君)으로 인식되고 있어, 황제로서의 정통성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역사상의 지위는 더욱 난감하다. 그래서 능침조차도 결국 모두의 무관심하에 사라지게 되어버린 것이다.

 

명나라때 서선(徐善)은 <냉연지(冷然誌)>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향산사(香山寺)가 있는 곳은 요나라때 중승(中丞) 아리길(阿里吉)에게 하사한 것이다. 대전의 앞에 2개의 비석은 집을 하사한 시말이 기록되어 있는데, 옥처럼 매끄럽고 하얀색이다. 절의 승려들이 응조석이라 했다."

 

야율순의 어릴 때 이름은 열리(涅里)이다. 그는 요흥종(遼興宗) 야율종진(耶律宗眞)의 손자이고, 남경유수(여기서 남경은 요나라의 남경으로 지금의 북경이다) 야율화로알(耶律和魯斡)의 아들이다. 요도종(遼道宗) 야율홍기(耶律洪基)에게는 조카가 된다. 어른이 된 후, 그는 문학을 좋아하구, 시와 부를 지었고, 종실 내에서는 발군의 인물이었다. 백부인 요도종은 한때 그를 후계자로 삼고자 했다. 천조제(天祚帝)가 즉위한 후, 그는 숙부인 야율순을 정왕(鄭王)에 봉하고, 나중에 다시 그를 월국왕(越國王), 위국왕(魏國王)에 봉한다. 건통10년(1110년), 화로알이 사망하고, 야율순은 남경유수의 직을 계승한다. 그는 남경도(지금의 북경과 주변지역)의 최고장관이 된 것이다.

 

오랫동안 남경유수를 맡았던 야율순은 도시건설에 크게 공헌한다. 북경성에 현존하는 요나라때 건축물로 근 천년간 우뚝 서 있는 천녕사탑(天寧寺塔)은 바로 천경9년(1119년) 야율순이 주재하여 건축한 것이다. 이는 요나라가 북경에 남기 긴 기념물이 된다. 1991년 천녕사탑을 중수할 때, 탑정에서 <대요연경천왕사건사리탑기> 각석이 발견된다. 거기에는 "황숙(皇叔) 판유수제로방마도원수부사, 진진국왕이 천경9년 오월 이십삼일 성지를 받들어 천왕사탑 1개를 건립하다. 높이 203척, 합쳐서 십개월에 마치다" 탑기에 열거된 고승들 중에는 "향산사 승려 지선(智選)"이 보인다. 이를 보면 야율순은 향산과 어느 정도 관계가 있었던 것같다.

 

만일 요나라가 위기를 맞지 않았더라면, 야율순은 그저 현왕으로 <요사>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운명을 만든다. 그의 말년에, 요나라는 멸망의 위기를 맞는다. 여진이 굴기한 후, 야율순은 천조제에 의해 중임을 맡아, 도원수의 신분으로 요동에서 난민을 모아서 '원군(怨軍)'을 조직하여 금나라군대에 항거한다. 다만 야율순은 장수의 재능은 갖지 못했다. 몇년동안 승리는 거의 없고, 최종적으로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돌아온다. 그리고 도원수의 자격으로 남경을 지킨다.

 

보대2년(1122년) 정월, 금군이 요나라의 중경(中京)을 함락시킨다. 그리고 남경으로 진격할 준비를 한다. 천조제는 그 소문을 듣고 바로 도망치고, 금군의 맹렬한 추격으로 황급히 협산(夾山, 지금의 몽골 사라치서북의 대청산)으로 숨는다. 이때의 요나라는 3분의 2의 영토는 적의 손에 넘어갔고, 인심이 흉흉했다. 남경의 군정사무를 주관하던 소건(蕭乾), 이처온(李處溫)등은 당숙종이 영무칭제했던 고사를 들어, 남경의 백관, 제군, 승려도사, 백성등 1만여명을 모아 야율순의 집앞으로 가서, 야율순에게 등극해줄 것을 요청한다. 무슨 일인지 몰라 야율순은 대문을 열고 나와 물어보는데, 이처온의 아들인 이석(李奭)이 그에게 용포를 입힌다. '황포가신'이 재연된 것이다. 야율순은 고사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해 삼월 등극한다. 연호는 건복(建福)이라 하고, 백관은 그에게 천석제(天錫帝)라는 존호를 올린다. 당시 연, 운, 평등의 지역은 야율순이 관할했고, 역사에서는 이를 북요(北遼)라 부른다.

 

북요가 건립된 후, 야율순은 천조제를 상음왕(湘陰王)으로 격하시킨다. 다만 한편에서는 금나라군대가 밀려오고, 다른 한편에서는 북송의 15만대군이 지키고 있으면서 연운십육주를 회복하겠다고 하고 있었다. 야율순은 북송에 세폐를 면제해줄테니 평화조약을 맺자고 제안하나, 북송은 거절한다. 부득이하게 야율순은 소건을 지북원추밀사사로 삼고, 군대관련 업무는 야율대석(耶律大石)에게 위임한다. 그리고 그는 사신을 금나라에 보내어 북요가 공물을 바칠테니 금나라의 속국으로 받아달라고 청한다. 그렇게 잠시 안정을 취하고자 했으나 금나라도 거절한다. 건복원년(1122년) 육월, '성남쪽 요지전(瑤池殿)에 병들어 누워있던" 야율순은 천조제가 5만의 정에병을 모아 8월에 협산에서 남경으로 진격할 것이라는 소문을 듣는다. 야율순은 크게 놀라, '천조가 진짜 온다면, 나는 죽는 수밖에 없다'고 탄식한다. 육월 이십사일, 나이 60세의 야율순은 내외의 곤경하에 우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재위한지 겨우 98일째 되는 날이었다. 임종때 그는 천조제의 아들 진왕(秦王) 야율정(耶律定)에게 황위를 넘겨주고, 이처온에게 비밀리에 "번한마보군도원수"의 직을 내리며 후사를 부탁한다. 이때 겉으로 충성스러워 보이나 실은 간악했던 이처온은 이미 소후(蕭后)를 끌고 송에 귀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요사.천조황제본기>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야율순이 죽은 후, "백관은 '효장황제'라는 시호를 올리고, 묘호를 선종이라 한다. 연서 향산 영안릉에 장사지내다." 그해 십일월, 금군이 공격해 들어오고, 야율순과 그의 후계자의 소조정은 멸망한다. <시전장관사족보>의 기록에 따르면, 야율순의 아들 야율아철(耶律阿撤)은 금나라에 포로로 잡힌 후 투항하고, 항주윤(恒州尹, 지금의 내몽골 정남기)의 관직을 받는다. 손자인 야율독화(耶律禿花)는 나중에 징기스칸에 투항한다. 그후 자손들은 원군을 따라 남정에 참가하고, 원나라말기에 운남에 자리잡는다. 그리고 시전장관사(施甸長官司)의 세습 토사(土司)가 된다. 원나라말기부터 1949년까지, 모두 607년간 세습을 유지한다. 현재 후예는 15만명이고, 운남서남의 대리, 보산, 임창, 덕굉과 시쌍반나등지에 분포되어 있다. 소수는 미얀마의 과감, 납융, 팔막 일대에 살고 있다.

 

이 1년도 채 안되는 정권은 북경에 약간의 흔적을 남겼다. 예를 들어, 청나라 건륭연간 계대사(戒臺寺)에는 '요나라 비석 하나가 남아 있다. 지추밀원직학사 우중문이 쓰고, 건복원년에 세웠다" 대체적인 내용은 건복원년 연경 혜취사의 오전이라는 승려가 야율순의 지원하에 법균대사가 생전에 가지고 있던 '대승삼취계본"을 가지고 황제가 허가한 계를 전할 자격을 가지고 연경지구에 단을 열고 계를 전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건복원년비'는 지금 남아 있지 않다. 북유가 후세에 남긴 흔적은 오직 이 보일 듯 말 듯한 영안릉 뿐인 것이다.

 

영안릉은 문헌기재에 따르면 향산에서 가장 오래된 능묘이다. 강적들이 둘러싼 상황하에서 서둘러 만들었으므로,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다. 강산의 주인이 바뀐 후, 야율순은 '참위지군'이기때문에, 능묘도 역대정부에서 보살펴주지 않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황실금원에 소재하고 있었으므로, 외인들이 찾아볼 수도 없었고, 금방 조용히 파묻혀 버린다. 오랫동안 북경의 지방지에도 보이지 않았다. 현재는 청나라 건륭연간의 <일하구문고(日下舊聞考)>에 '영안릉은 지금 찾을 수 없다", <광서순천부지>에도 "능은 지금 찾을 수 없다"는 기록만 있다.

 

민국시대에 이르러, 어원이 개방되고, 영안릉은 비로소 요왕분(遼王墳)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드러난다. 1920년 출판된 향산측회도에는 이미 쌍청별서의 서남쪽 언덕방향의 섬서봉(蟾蜍峰)의 동쪽에 '요영안릉'이라고 위치를 표시해 두었다. 민국학자 전수번(田樹藩)의 <서산명승기>에도 그가 본 요왕분이 기록되어 있다. "이장(二丈)길이 일장(一丈) 너비의 삼석동(三石洞)"이라고 했다. 교육자인 웅희령(熊希齡)이 1918년을 전후하여 건립한 쌍청별서(雙淸別墅)에는 "쌍청소팔경(雙淸小八景)"이 있다고 했는데 요왕분도 그 중의 한 경치였다. 웅희령 선생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원내의 요왕분....원래대로 보존되어 있다."

 

1920-30년대 요왕분은 관심을 받은 바 있다. 노작부(盧作孚) 선생은 향산에 놀러 갔을 때, 특별히 가서 보기도 했다. "요왕분을 보았다. 벽돌을 쌓은 묘도가 파서 드러나 있었다. 아주 튼튼했다." 연경대학 역사학회에서 출판한 <사학연보> 1936년 제1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고적고물조사실습반은 수업을 시작한 이래 이미 수차례 조사실습을 했다. 향산요왕분, 이화원, 탁주...문승상사당등의 장소이다."

 

그러나, 수십년만에 이미 요왕분에 대한 기록은 보기 드물어졌다. 이 나타났다 없어지곤 하는 요왕분은 다시 사라진 것이다. 요왕분은 민국연간에 잠시 나타났다가 당시의 일부 문헌과 지도에만 약간의 흔적을 남긴 것이다. 너무나 많은 수수께끼를 품고 있는 능침이다. 요왕분은 도대체 언제별견될까. 묘지명, 부장품, 벽화같은 문물이 발견되었던가? 도대체 그게 영안릉이 맞지는 맞는 것일까? 과학적인 고고발굴은 한 적이 없고, 그리고 유적도 현재 남아있지 않으며, 사진조차 남아 있지 않아서, 그저 문헌에 나오는 몇 마디 글만으로 추측해야하는 입장이 되었다.

 

거란인들은 원래 큰 산을 숭배하는 습속이 있었다. 그리고 당나라제왕의 "인산위릉(因山爲陵, 산을 파서 능을 만드는 것)"의 제도를 계승했다. 그래서 요나라제왕은 모두 풍경이 수려한 곳을 선택해서 산을 파서 능을 만들었다. 지표에 높은 봉토는 없다. 능앞에 평면정방형의 향전(享殿)이 있다. 이미 발굴한 요나라 황제릉을 보면, 모두 '산을 파서 묘실을 만들었다', 벽돌을 쌓아 지궁의 묘도를 만들고, 3개의 주묘실을 병렬시키는 특징이 있다. 민국이래 요왕분에 대한 약간의 기재를 보면, 이에 부합하는 특징이 있다. 그러니 믿을만하다고 본다. 최근 들어 향산지구는 요나라때 석관묘장이 발굴된 바 있다. 목격자에 따르면, 어떤 것은 위에 '야율'이라고 쓰여 있다고 한다. 확실히 요나라때 귀족의 고급묘장이 집중된 곳인 듯하다. 만일 요나라유적에 대하여 과학적인 고찰과 정리를 한다면, 요나라때의 북경역사에 대하여 일정한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다.

 

얼마전 민간학자인 장원다(張文大) 선생은 이렇게 말해주었다. 그가 최근 향산을 조사하다가 영안릉같은 곳을 찾았다는 거시다. 그가 묘사한 바에 따르면, "쌍청의 동쪽으로 산을 올라가다가 운기정이 보이는 곳에 이르러 길을 따라 서쪽으로 가서 섬서봉에 도착하기 직전에 길의 남쪽에 하나의 버려지고 봉쇄된 창고같은 건축물을 발견했다. 이 건축물은 뒤에 바위가 있고, 절반은 바위 안에 들어 있다. 건축의 앞부분을 쌓은 것은 회색벽돌이고, 지붕에는 통풍구가 있었다. 건축외관으로 봐서 1960년대에 지은 것같았다. 구조로 보면, 지궁을 고쳐만든 창고같다. 부근에는 석재가 있고, 창틀위에는 성벽을 쌓는 벽돌같은 것이 있고, 홈이 없었다." 이 버려진 건축물을 바로 향산측회도에서 요영안릉이라고 표시한 위치에 있다. 만일 그 진위를 확정할 수 있다면, '쌍청소팔경'이 다시 돌아오는 것이니 다행인 일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