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방효욱(方曉旭)
애신각라 윤상(1686.4.16 - 1730. 5. 4)은 청성조 강희제의 13째 아들이고, 생모는 경민황귀비 장가씨(章佳氏)이다. 윤상은 옹친왕 윤진(胤縝)과 관계가 가장 가까웠고, 옹정제도 그를 남다르게 대우한다. 윤진이 즉위한 후 윤상은 화석이친왕(和碩怡親王)이 되어, 조정을 총괄하고, 의정대신이 되어 중대한 정부를 처리한다. 처음 정계에 들어온 윤상은 일처리수단이 고명하고 수완이 강경하여 전혀 처음 하는 사람같지가 않았다. 옹정제는 이 동생에 대하여 더욱 괄목상대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순치제 이래로 '패륵'은 호부를 관장할 수 없다는 조제(祖制)를 어겨가며 윤상으로 하여금 호부를 전권을 가지고 관할하게 한다.
그는 국가의 '휴양생식(休養生息), 민강물부(民康物阜)'를 직무로 삼아, 이전의 재정적폐에 대하여 천하의 부세(賦稅)를 정리하고, 출납을 조사하며, 양입이출(量入而出)하도록 하여, 창고가 가득차고 국가의 부가 날로 충족해진다. 천하에 정해진 금액을 초과하여 세금을 거두는 일이 횡행하여, 백성들의 피해가 아주 컸다. 윤진의 지지하에, 윤상은 극력 이를 없앴다. 강남의 소주, 송주, 절강의 가주, 호주, 강서의 남창에서만 하더라도 매년 60여만냥을 줄여준다. 다른 지역들까지 합치면 면제받은 양이 수백만냥에 이른다.
옹정3년, 윤상은 수리업무를 주관하며 친히 수도를 감찰하려 현장으로 간다. 그리고 효과적인 수리방안을 제정하고, 수리도를 작성하여 황제에게 보고한다. 비준을 받은 후, 영전수리부(營田水利部)를 만들어, 직예의 여러 강을 4국(局)이 나누어 관할하도록 한다. 윤상은 여러번 친히 현장에 나가서 지도하고, 강둑을 수리하고 밭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황무지 수천리가 개간되고, 백성을 모집하여 농사를 짓도록 해준다. 경기지방의 수리사업에 공이 있어, 황제는 어서 "충경성직(忠敬誠直), 근신염명(勤愼廉明)"이라는 글을 쓴 방(榜)을 내리고, 특별히 그에게 친왕 작위(親王) 이외에 따로 군왕(郡王)작위도 부여하여 그가 지정하는 어느 자손이든 세습망체할 수 있게 해준다. 이는 대청 역사상 '유일무이'한 경우이다.
옹정7년(1729년) 준가르부의 처망아라부단, 갈단처링 부자가 청나라에 반기를 든다. 조정은 서북에 양로로 병사를 보내기로 결정하고, 윤상을 명을 받아 참여하며, 군기처의 건립을 준비하여 초대 수석군기대신이 된다. 그리하여 병마, 양초를 움직이가 각종 군수물자를 움직이는 전권을 갖게 된다. 그가 준비한 군량이 충분하고, 적시에 운송되어 여러번 치하를 받는다.
윤상은 한 마음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을 했고, 그의 건의에 따라 옹정제는 옹정3년이전의 천하의 '적포(積逋)'를 면해주며, 일체의 '괘오(詿誤)"을 회복시킨다. 그는 충성스럽고 후덕하며 일처리는 공정했다. 그가 명을 받아 사건을 처리할 때는 심문 하면서 중형을 쓰지 않았고, 성의를 다하여 가람을 감복시키고, 이치를 내세워 사람을 감복시키게 하고, 증거를 중시하며 진술을 가볍게 믿지 않았다. 비록 관련자가 많다고 하더라도 무고한 자들까지 연루되지 않도록 해서 수섭건의 대형사건을 처리하면서도 처리가 공정했다.
윤상은 신하로서 윤진에 대하여,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瘁, 死而後已)"했다고 할 수 있다.
정사를 보건 야사를 보건 그에 대한 비난의 글은 찾아보기 어렵다. 조야상하에서 그에 대하여는 칭송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십삼야(十三爺) 이친왕(怡親王) 윤상. 강희제의 13째 아들, 옹정제의 말로는 "노십삼(老十三)은 충용, 과감, 돈후, 경직(耿直), 예지, 근면, 견인, 은인하여 그의 조정의 중신이고, 그의 국가의 동량이다".
옹정제의 14년은 아주 간난(艱難)했던 14년이다. 십삼야가 극력 보좌한 것은 옹정왕조의 반쪽하늘을 버텨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윤상은 45살에 죽는다. 그의 극적인 일생은 역사무대를 이렇게 떠난다. 능앞의 신도비(神道碑)에는 만주어와 한어로 "충경성직근신염명화석이현친왕신도비(忠敬誠直勤愼廉明和碩怡賢親王神道碑)"라는 글자가 쓰여 있고, 십삼야의 일생을 높이 평가했다. 이는 옹정제가 그의 의박운천(義薄雲天)한 정의를 마음 속에 깊이 새기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윤상은 옹정제때 계속하여 총애를 받는다. 그리고 계속 더해지고 줄어들지 않았다. 그가 사망한 후에도 옹정제는 오랫동안 그를 그리워했다. 여러번 친히 제문, 시사를 써서 그를 그리워하는 정을 표하곤 했다. <화불우성(花不偶成)>이라는 시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구중삼전수위우(九重三殿誰爲友)
호월청풍작계교(皓月淸風作契交)
구중궁궐에서 누구를 친구삼을 수 있단 말인가.
그저 하얀 달과 맑은 바람과 사귈 수 있을 뿐이다.
이 시에서 우리는 옹정제의 고독한 심경을 엿볼 수 있다. 윤상이 사망한 후 1년이 지난 다음에 다시 이렇게 쓴다:
절계향포진사구(節屆香蒲陳似舊)
공래세갈사수선(貢來細葛賜誰先)
명절을 맞이하여 꽃과 물건은 예전이나 똑같이 놓였는데,
조공으로 들어온 옷감은 누구에게 먼저 내려야 한단 말인가.
이 싯구를 보면 윤상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알 수가 있다. 윤상이 죽은지 2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그는 시에서 이렇게 읊는다:
힐조단오절(詰朝端午節)
재명파칭상(再命罷稱觴)
세월여유매(歲月如流邁)
용의하일망(容儀何日忘)
조정에서 단오절행사를 얘기해서 힐책하고
다시 명하여 축하행사를 하지 못하게 했다.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은데
그 모습은 언제나 잊을 수 있을까?
이미 2년이 지났는데도 옹정제는 여전히 가슴에 품고 있다. 왜냐하면 윤상이 단오절 하루 전날 죽었기 때문에, 단오절을 기쁘게 축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보면 윤상이 옹정제의 마음 속에 얼마나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지 알 수가 있다.
이친왕 윤상의 일생은 기복이 심했다. 그러나 역사에 대한 큰 공헌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와 옹정제간의 형제의 정도 사람을 감동시킬 정도로 깊다.
옹정제7년 봄, 이현친왕 윤상의 능묘는 내수현(淶水縣) 북쪽 20리지점으로 정해진다. 옹정제는 이 곳이 '인걸지령(人傑地靈)하니, 대상지지(大祥之地)라고 한다. 서부의 태행산맥이 구비구비 솟아 있어서, 북으로는 한겨울의 삭풍을 막아주고, 남으로는 따듯한 봄햇살을 받을 수 있으며, 동으로는 거마지빈(拒馬之濱)을 접하고 있다. 동서남북으로 네 언덕은 마치 거대한 용이 누워 있는 것같으며, 맑은 물이 북에서 남으로 사시사철 끊이지 않고 흐른다. 실로 크게 길한 양지(良地)이다. 옹정8년부터 거대한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현친왕 즉 청나라강희제의 열세째차들 윤상의 친왕묘는 옹정8년(1730년)에 지어지고, 주위의 길이가 20킬로미터, 점유면적이 600여무이다. 동서로 3리에 이르는 신도(神道)가 있고, 신도비에는 정면에 음각으로 "충경성직근신염정화석이현친왕신도비"라고 새겨져 있다. 신도를 따라서 신도비루(神道碑樓), 화염패방(火焰牌坊), 오공석공교(五孔石拱橋), 사주칠루석패방(四柱七樓石牌坊), 석평교(石平橋), 화표(華表), 나과교(羅鍋橋), 삼공석교(三孔石橋), 신주고(神廚庫), 공덕패루(功德牌樓), 조방(朝房), 의문(儀門), 분향로(焚香爐), 태묘(太廟), 명루(明樓), 보정(寶頂)등 건축물이 서 있다. 이는 청나라 최대의 왕릉중 하나이다. 청나라조정에서 금지(禁地)로 지정하여, 능침내의 토지는 이현친왕부 소속 팔기자제가 경작하거나 임대해주었다. 이천왕부에 바치는 이외에 국가에 세금은 내지 않아도 되었다.
규모가 거대한 이현진왕 능침은 1926년, 진위군(鎭威軍 제1군 부군장인 마서운(馬瑞雲)에 의해 능원상하의 송백나무를 모조리 베어 버린다. 1935년에는 송철원이 파견한 내수현의 현장 왕작주(王作舟)와 그가 데려온 1영(營)의 군대가 80여명의 도굴범을 데려와 공개적으로 도굴하여, 묘안의 모든 부장품을 꺼내간다. 현재 이현친왕능묘에는 황총갱(荒塚坑) 하나만 남아 있다. 옛 능묘의 유적지는 이미 기왓장 하나 남아 있지 않다. 지상건축물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신도비 1개와 신도에 세워진 사주칠루석패방과 화염패루 두 개, 그리고 삼공석교, 오공석교 2개, 화표 1쌍 뿐이다.
화염패방
이현친왕능의 건축규모는 비록 청동릉과 청서릉을 넘어선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한백옥화표, 교량, 패루와 신도등의 기세는 웅위하고 장관이며 화려하다. 이들 건축물의 재료는 모조리 북경 서남 십와한백옥산(十窩漢白玉山)에서 캐서 옮겨온 것이다. 이 두 개의 화표만 하더라도 높이가 13미터이상이 된다. 6릉형을 보이고 있으며, 화표에는 48마리의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용을 새겼는데,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하다. 특히 하표의 위에 놓아둔 두 마리의 '망천후(望天吼)'는 정교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다.
사주칠루석패방
망천후는 한 마리당 2톤정도의 무게이며, 서쪽에서 동쪽을 향해 고개를 들고 서서 신로의 양측에 있는 화표의 위에 놓여 있다. 이것은 황가의 진릉지보(鎭陵之寶)이다. 망천후는 암수의 구분이 있으며, 영원히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표시한다. 망천후는 "망군귀(望君歸)", "망군출(望君出)"이라고도 부르는데 '망군귀'는 황제가 외출하여 민정을 살필 때, 너무 멀리 나가지 말고, 하루빨리 돌아와서 조정의 대사를 처리하라는 의미이다. '망군출'은 황상이 계속 궁안에만 머무르지 말고 민간에 나가서 둘러보며 백성들의 생활을 살펴보라는 것이다.
신도의 양쪽 끝에는 각각 하나씩의 비루(碑樓)가 있다. 비석에는 이현친왕의 생전 공적이 새겨져 있는데 모두 한어 만주어 두 문자로 대조하여 새겼다; 신도에는 4개의 한백옥석교가 만들어져 있다. 삼공교, 오공교, 평교와 나과교이다. 다리의 호란(護欄)에도 모두 교룡과 봉황이 새겨져 있어 살아있는 듯하며 하얗고 하자가 없다. 삼리에 이르는 신도는 모조리 벽돌을 잘라서 만들어, 광결무흔(光潔無痕)하다.
신도에 서 있는 두 개의 기세가 웅위하고 수려하며 장관인 옥석패루는 서쪽에 있는 것은 '대패루'라고 부르는데, 4개의 기둥, 6개의 대들보가 있고, 위에는 7간의 옥석방이 단정하게 만들어져 있다. 방에는 형태가 서로 다른 서수(瑞獸, 상서로운 동물)가 있다. 동쪽에 있는 것은 '화염패루'라고 부르는데 4개의 옥석기둥과 6개의 대들보로 되어 있으며 대들보의 중간에는 3개의 북숭아모양의 불꽃이 있다. 양쪽에는 각각 두 마리의 서수가 마주 보고 있다. 이들 건축물은 당시에 정말 볼만했을 것이다.
화표 위의 '망천후'는 지금 내수현 조충지중학에 있다
이현친왕릉의 밖에는 6개의 궁이 있다: 대릉궁(大陵宮)과 소릉궁(小陵宮)은 이현진왕릉의 남쪽에 있고, 서궁(西宮)과 일류삼궁은 이현친왕릉의 서쪽에 있다. 누촌향 경내에 있다. 이 6개의 궁과 이현치왕릉은 함께 방대한 건축구을 형성한다. 모두 녹색유리기와로 지어져 있고, 전개의 대들보는 오척에 방형이고, 조각을 새겨서 화려하며 눈부실 정도이며, 교탈청공(巧奪天工)의 뛰어남이 있다. 신도의 양쪽에는 2미터 두께의 하늘을 가리는 송백나무가 있다. 소나무 사이로 바람이 불면 그 소리가 사시사철 끊이지 않는다. 신도의 건축물은 키큰 송백나무 사이에 있어서 가려졌다가 보이곤 한다.
왕릉에는 4품, 5품이 호릉관(護陵官)과 호릉병(護陵兵)이 이곳에 상주했다. '동영방(東營房)'이라는 이름은 이렇게 하여 얻은 것이다. 마을의 아(衙)는 원래 5좌(座)가 있었는데, 모두 질서있게 배치되어 있었다. 길거리와 동,서,남 삼문이 질서있게 배열되어 있고, 마을의 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을 주민들 중에서 경작할 땅이 없으면 모두 황실에서 받아먹었다.
폐허만 남은 왕릉의 지궁(地宮)
마을의 서쪽에는 고찰 석가사(釋迦寺)가 있고, 동쪽에는 도교사원 동대관(東大觀)이 있었다. 석가사의 여승은 회색승복을 입고 오갔는데, 매일 찾아오는 승려가 끊이지 않았다. 원근에서 향을 사르러 오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낮에는 향줄기가 하늘로 피어올랐고, 밤이면 종소리와 왕능의 소나무바람소리가 하나로 되어 밤하늘에 울려퍼였다. 듣는 사람은 잠드는 것도 잊고 그 미묘한 아름다운 소리에 빠져버렸다.
1911년 청나라가 멸망한 후, 사람들은 비로소 왕능앞까지 가서 구경했다. 1934년 8월, 국민당 제29군 군장인 송철원(宋哲元)은 병력을 이끌고 왕릉의 월대(月臺)로 가서 군사를 훈련시켰고, 외부인들이 들어오거나 몰래 구경하지 못하게 막았다. 10일후 송철원은 떠났는데, 마을의 사람들은 비로소 왕릉이 도굴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어떤 사람은 친히 윤상의 유골, 망포가 땅바닥에 흩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수십년 후에도 어떤 때는 그의 뼈를 볼 수 있었고, 지금도 아마 찾아보면 윤상의 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937년이후,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은 백비(白匪) 및 한간(漢奸)과 결탁하여, 아무런 거리낌없이 중국에서 횡행한다. 왕릉을 모조리 부숴버린다. 300년간 휘황찬란하던 왕릉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왕릉의 폐허에는 몇 개의 파괴된 옥석교, 패루와 화표만 남아 있었고, 나머지 전각, 신도, 송백등은 일찌감치 사라졌다.
1946년이후 토지개혁으로 이 천년고찰 석가장, 동대관에도 더 이상 승려나 도사가 모두 환속하여 한 명도 보이지 않게 된다. 더 이상 절에서 나오는 종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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