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백문선(白文選): 농민군과 남명의 명장, 그는 왜 청나라에 투항했는가?

by 중은우시 2019. 5. 21.

글: 제운가(齊雲軻)


백문선은 남명(南明)역사상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대의를 깨닫고 대국을 고려하여, 남명의 통치를 지속시키고, 남명망명정부를 지키는데 걸출한 공헌을 했다. 그러나, 그는 왜 마지막에 청나라에 투항했을까? 역사상의 백문선은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1. 농민군


17세기 중엽의 명나라말기는 중국역사상 유명한 난세의 시기이다. 중국을 이미 200여년간 통치한 대명왕조는 이때 곧 숨이 넘어갈 늙은 노인같았다. 온몸에 병이 많고, 이미 상처투성이였다. 병은 이미 뼛속까지 스며들어, 생기가 전혀 없었다. 사망할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천계7년(1627년) 심각한 기근을 겪는 섬서에서 먼저 농민반란이 일어난다. 반란의 불씨는 마른장작처럼 북방대지를 신속히 태워버리고 퍼져간다. 성성지화(星星之火) 요원지세(燎原之勢)였다. 명나라정부는 이미 기능을 상실했고, 불을 끈다는 것은 이미 실현할 수 없는 머나먼 꿈이 되어 버렸다.


이런 사회배경하에서 성장한 백문선은 18살이 되던 해에 농민반란군에 가담한다. 시대는 그를 난세의 영웅으로 만든다.


백문선의 본명은 가찬(可撰) 혹은 가철(可哲)이고, 자는 육공(毓公)이며, 섬서성 오보(吳堡) 사람이다. 민국이전의 사료에서는 그의 출생연월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당대에 이르러 누군가 그가 명나라 만력43년(1615년)에 태어났다고 고증했다. 그러나 학계의 인정을 받지는 못한다. 그의 조부, 부친은 모두 독서인이다. 조부인 백운자(白雲慈)는 명나라의 늠생(廪生)이다.


선비집안에서 자란 백문선은 분명 학문을 익혔을 것이다. 그저 과거에는 흥미가 없었고, 병법과 무술에 관심이 많았다. 게다가 그의 대에 이르러 집안이 몰락하여, 할 수 없이 지주를 위하여 소를 길러주었다. 그래서 어려서는 생활이 아주 힘들었다.


섬서에서 농민반란이 일어날 때, 백문선은 십여세의 나이였다. 글을 읽어 공멍을 얻을 수도 없었고, 매일 다른 사람을 위해 소나 말처럼 일할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십여세의 백문선과 풍쌍례(馮雙禮) 두 사람은 함께 팔대왕(八大王) 장헌충(張獻忠)의 농민군에 들어간다. 이때부터 조정과 세불양립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군에 들어간 후, 백문선은 용맹하고 지모가 있었으며 병법을 알았다. 관건은 그가 글을 안다는 것이다. 이건 보통이 아니다. 농민군에서는 드문 인재인 것이다. 농민군에는 일자무식인 사람들이 가득했다. 글을 아는 사람은 한줌도 되지 않았다. 백문선은 자연스럽게 장헌충의 중용을 받아 고위장수로 발탁된다.


대서국 대순원년(1644년), 장헌충은 성도에 정권을 건립하고, 백문선은 전군도독(前軍都督)이 되어 중임을 맡는다.


대서군은 비록 사천에 건국했지만, 국면을 넓혀갈 수가 없었다. 게다가 장헌충이 시행한 일련의 지주계급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정책으로 그들의 강렬한 반발에 부닥친다. 그리하여 대서국의 통치기반은 속속 파괴되고 동요된다.


대순3년(1646년), 장헌충은 성도를 포기하고, 도망친다. 그러나 서충현에서 청군에 사살된다. 사건이 창졸간에 일어났으므로, 대서군은 병력과 장수를 잃고 원기를 크게 상한다. 결국 대서군의 잔여인원은 장헌춘의 몇몇 의자(義子)인 손가망(孫可望), 이정국(李定國)등의 지휘하에 청군의 포위망을 뚫고, 남으로 철수해서 운남으로 간다.


2. 남명의 간성(干城)


대서군은 운남에서 사정주(沙定洲)의 난을 평정하고, 명나라에서 대대로 운남을 지켜온 검국공(黔國公) 목천파(木天波)의 신임을 얻는다. 이렇게 운남에서 기반을 마련한 후 심시도세하여, 최종적으로 연명항청(聯明抗淸)을 결정한다.


영력4년(1650년), 대서군은 운남에서 나와 청나라에 항거하는 길을 걷기 시작한다. 후방의 안정을 위하여, 손가망은 백문선을 파견하여 귀주를 평정하게 한다. 백문선은 군대를 이끌고 직접 귀양으로 간다. 귀양을 지키던 남명의 광국공(匡國公) 피웅(皮熊)은 농민군을 적대시했다. 그리하여 결사항전을 하겠다고 표시한다. 다만, 대서군의 병력이 성아래로 몰려오자, 피웅은 성을 버리고 황급히 도주한다. 부하들은 백문선에 투항한다.


그후 백문선은 다시 준의(遵義)가정(嘉定)으로 진군한다. 그리고 사천 가정에 주둔한다. 나중에 그는 다시 명을 받들어 호남, 광서 등지로 출정하여 혁혁한 공을 세운다.


대서군이 남명군대에 융합되어갈 때, 그래도 청군에 대한 전투에서 위력을 발휘할 때, 이정국과 손가망은 갈등을 드러낸다. 손가망은 자신의 나이가 많아서 큰형이라는 이유로 이정국, 유문수(劉文秀)에게 자신에게 절대복종할 것을 요구한다. 권위를 세우기 위해 그는 일찌기 훈련장에 깃발을 잘못 올렸다는 것을 이유로 이정국에게 곤장을 치기도 했다. 이정국이 먼저 훈련장에 도착해서, 깃발을 올리라고 명했는데, 손가망이 도착한 후 대노한다. 자신이 총사령관인데, 총사령관이 오기도 전에 다른 사람이 깃발을 올린 것은 월권이라고 하여 이정국을 때린 것이다. 이정국은 이에 불복했으나, 백문선등이 나서서 권하는 바람에 억지로 형을 받는다.


손가망은 목적이 달성된 것을 보자, 이정국이 형을 받은 후, 위선적으로 자신의 의제(義弟)를 끌어안고 통곡을 한다. 이정국은 바보가 아니다. 그후 손가망에 대하여 크게 불만을 품는다. 그러나 대국을 고려하여 최대한 그와 싸우지는 않았다.


남명 영력10년(1656년), 손가망은 귀양에서 황제로 등극할 준비를 한다. 영력제로 하여금 황위를 선양하게 하여 자신이 황제에 오르고자 한다. 영력제는 비록 연약하고 무능했지만,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이정국과 연락한다. 그로 하여금 안용부(安龍府)로 와서 자신을 보호해달라고 한 것이다.


이정국이 영력제를 구하러 간다는 소식을 듣자, 손가망은 급히 백문선에게 먼저 가서 황제를 데려오라고 보낸다. 다만, 백문선은 손가망의 이러한 가까운 사람에게는 가슴아프고 원수는 기분좋아할 일을 벌이는데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손가망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것도 깨닫는다. 할 수 없이 암중으로 이정국을 돕게 된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일부러 시간을 끌어서, 이정국이 영력제를 구할 수 있도는 시간을 벌도록 해준다.


백문선이 안룡부에 도착한 후,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즉시 영력제와 신하들을 귀양으로 끌고 가자고 주장하지만, 그는 영력제를 해칠 마음이 없었다. 여러가지 핑계를 대면서 시간을 끌고, 이정국이 하루빨리 도착하기를 기다린다.


얼마 후, 이정국이 안룡부에 도착하여, 영력제와 회합할 수 있었다. 이정국, 백문선등은 함게 영력제의 군신을 평안하게 운남성 곤명성으로 호송한다. 유문수는 성문을 열고 맞이한다. 영력제는 백문선의 충의로운 행동에 감동받아 백문선을 공국공(鞏國公)에 봉한다. 그 뜻은 국가의 기반을 공고히해준 공신이라는 것이다.


손가망은 그 소식을 듣고 대노한다. 백문선을 배신자로 여겨서 내전을 일으킨다. 이정국을 없애서 자신이 황제에 오르는 숙원을 이루려 한 것이다. 백문선은 손가망의 화를 삭이고, 평화와 단결을 유지하기 위하여, 귀양으로 돌아간다. 손가망에게 대국을 중시하여, 이정국과 단결하여 공동으로 명왕조를 부흥시키자고 권하려는 것이다.


손가망이 그의 말을 들을 리가 없다. 백문선을 구금하고 그의 병권을 박탈한다. 나중에 그의 한무리 부하들의 종용하에 손가망은 결국 동실조과(同室操戈)의 불귀로를 걷게 된다.


누구를 선봉장으로 내세울지를 논의할 때, 백문선과 관계가 좋은 마보(馬寶), 마유흥(馬惟興), 마진충(馬進忠)등은 백문선을 극력 추천한다. 첫째는 그가 능력이 있고, 둘째는 그에게 경력이 있으며, 셋째는 그에게 '대죄입공(戴罪立功)'할 기회를 주자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손가망의 은혜에 감격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손가망은 백문선으로 하여금 정역초토대장군(征逆招討大將軍) 즉 전선총지휘관을 맡게 한다.


영력11년(1657년) 구월, 손가망의 군대는 이정국의 군대와 곡정(曲靖)에서 만난다. 백문선과 부하장수들은 창끝을 거꾸로 겨누기로 결정하고, 손가망을 공격하기로 한다. 백문선은 비밀리에 이정국의 군대에 들어가서 이런 입장을 전달하고, 쌍방은 의견일치를 이룬다.


구월십구일, 쌍방이 전투를 시작한다. 마유흥은 싸우지 않고 물러나며, 크게 소리친다: "진왕(晋王)을 영접하라. 진왕을 영접하라." 손가망의 십여만대군은 즉시 창끝을 뒤로 돌려 자신의 군대를 겨눈다.


손가망도 바보는 아니다. 대세가 기운 것을 보자, 즉시 자신에게 충성심이 있던 인원을 데리고 신속히 귀양으로 물러난다.


유문수, 백문선은 군대를 이끌고 손가망을 추격한다. 백문선의 친구인 풍쌍례는 귀양을 지키고 있었다. 손가망이 돌아오는 것을 보자, 그를 이렇게 겁준다: "진왕의 병마가 곧 도착합니다. 국주께서는 빨리 떠나십시오."


손가망은 놀라서 정신이 없었다. 군대를 이끌고 바로 떠난다. 풍쌍례는 그의 뒤에서 소리쳤다: "진왕이 왔다. 진왕이 왔다." 손가망은 놀라서 말을 벌리고 미친듯이 달려가서 귀주를 빠져나가 청나라군대에 투항한다.


그후 논공행상이 이루어지고, 백문선은 공창왕(鞏昌王)에 봉해진다.


3 암연항청(黯然降淸)


손가망이 청군에 투항한 후, 남명의 군사기밀을 팔아먹는다. 그리하여 청군이 빠른 속도로 집결하고, 영력12년(1658년) 운남으로 급속히 진격한다.


백문선은 명을 받들어 귀주 칠성관을 지키며, 오삼계가 이끄는 청군의 남하를 저지한다. 오삼계는 백문선에게 모략이 있고, 방어가 엄밀한 것을 보자, 단기간내에 함락시킬 수 없다고 보고, 현지에서 토사(土司)의 항복을 받아낸 다음, 지형을 잘 알고 있는 토사로 하여금 길을 안내하게 한다. 그리하여 샛길로 칠성관을 우회한다. 백문선은 이를 보자, 할 수 없이 칠성관을 포기하고 운남으로 철수한다. 귀주는 금방 함락된다.


영력13년(1659년) 정월 청군이 곤명성으로 진입한다. 영력제는 어쩔 수 없이 다시 도망가야 했다. 백문선은 옥룡관을 막아서 청군을 격패시킨다. 영력제는 어디로갈지 몰라서 버마로 망명한다. 남명의 청나라에 대한 항거국면은 급격히 악화된다.


이정국, 백문선은 반드시 영력제를 중국으로 다시 모셔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찮으면 항청군대는 의지할 곳이 없어지고, 청군에 투항하는 자들이 늘어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한편으로 청군의 진격을 막아내면서, 한편으로 버마경내로 들어가 황제를 하루빨리 다시 모셔오고자 한다.


버마로 도망친 영력소조정의 실권은 간신인 마길상(馬吉翔)드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었다. 그들은 황제를 데리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정국등이 황제를 모셔간 후에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을까 우려하여, 온갖 방법을 써서 이정국과 영력제가 연락하는 것을 막는다.


이정국, 백문선등은 군대를 이끌고 버마로 들어갔고, 버마군과 전투를 벌이게 된다. 명군에는 전사, 병사, 도주하는 자들이 아주 많아서 계속 인원이 줄어들었다. 1년여를 버티다가 이정국등은 실망하여 중국으로 되돌아간다.


철군때는 이미 영력15년(1661년) 팔월이 되었다.


백문선은 국내에 명왕조의 황제가 없게 된 것을 보자, 항청은 의미를 잃었다고 생각한다. 남명조정에 거의 절망한다. 버마에서 힘들게 싸우면서 부하들중 절반을 잃었고, 군대를 따라오던 가족들도 고통이 극심했으며 원성이 자자했다. 부하들도 수시로 반란을 일으키거나 투항했다. 백문선은 절망적인 상태에서 청나라에 투항하기로 결정한다.


이정국은 백문선이 돌연 자신과 부대를 나누어 물러나자, 아들 이사흥(李嗣興)을 보내어 그를 따르게 하며 무엇을 하는지 보도록 한다. 백문선의 부장 장국용(張國用), 조득승(趙得勝)은 백문선에게 청군에 투항할 것을 권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사흥이 뒤따라오자, 군대를 이끌고 막는다.


이사흥이 반격하려 할 때 이정국이 도착한다. 아들을 제지하며 말한다: "당초 함께 거사했던 형제들 중에서, 지금은 백문선만 남았다. 내가 어찌 그와 싸우겠는가. 하물며 그는 명나라황실에 이미 절망하여 청군에 투항하려 한다. 내가 너에게 그를 뒤따르게 한 것은, 그가 마음을 돌리기를 바라서이다. 다시 한번 나와 손을 잡고 항청복명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제 그는 결심을 굳힌 것같다. 가려면 가라고 해라. 우리는 우리의 일에 최선을 다하자." 그의 말에는 무력, 불감(不甘)과 창량(蒼凉)이 충만해서 마음이 아프다.


이해 십일월, 일찌기 청에 투항한 오삼계는 청에 투항한지 얼마되지 않은 마보 등으로 하여금 백문선과 연락하여 청에 투항하도록 권하게 한다.


결국 백문선은 청에 투항한다.


4. 최후


영력15년(1661년) 납월, 오삼계는 군대를 이끌고 버마로 들어가서, 영력제를 체포하고 곤명성으로 압송한다.


다음 해(1662년) 백문선은 북경성으로 보내어지고, 청왕조는 그를 승은공(承恩公)에 봉하고, 한군 정백기에 소속시킨다.


백문선이 북경성에서 청나라의 햇볕을 받고 있을 때, 그의 옛 주인인 영력제는 운남에서 오삼계에 의해 활줄로 목이 졸려 사망한다. 그 후에 시신은 불태워서 한줄기 연기가 되어 사라진다.


동시에 백문선의 전우인 이정국은 영력제가 피살되었다는 말을 듣고, 절망하여 죽는다. 이사흥은 부친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결국 백문선과 같은 길을 걷는다: 항청.


강희7년(1668년), 승은공 배군선은 광록대부, 태자태사에 봉해진다. 아주 높은 대우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마음 속으로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모르겠다. 오랫동안 함꼐 고락을 해온 이정국을 버려두고 혼자서 청군에 투항한 것에 대한 미안함과 후회는 없었을까? 죽고나서 영력제를 만나면 무릎을 꿇고 죄를 빌 것인가?


강희14년(1675년), 오삼계는 반청복명을 선언하고, '삼번의 난'을 일으킨다. 이때 백문선은 병사한다.


백문선은 죽기 전에 오삼계가 다시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보았다. 아마도 그의 끝이 좋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예감했을 수 있다. 그리고 친구인 마보등이 오삼계를 따라 반란에 가담한 것에 어느 정도 우려를 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형제이고 전우이다. 그는 마보등이 패배하여 청군에 피살당하는 것을 원치는 않았다. 다만, 그는 오삼계의 이번 반란이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예전에 오삼계는 영력제를 죽였는데, 지금 다시 염치없이 반청복명을 하다니 누가 그를 믿겠는가?


아쉽게도, 백문선은 오삼계의 최후는 예상했지만, 자신의 사후의 결말은 예상하지 못했다. 백문선이 죽은 후, 아들 백회(白繪)는 이치대로라면 승은공의 작위를 물려받아야 했다. 그러나, 청나라조정은 승은공의 작위를 격하시켜, 공의 작위에서 1등자작으로 내린다. 나중에 아들 백회가 죽자, 이 일등자작도 더 이상 세습을 시키지 못하게 한다. 손자는 작위를 세습받지 못한 것이다.


남명에서 백문선은 공창왕이었다. 즉 군왕이었다; 청나라에서 손자대에 이르자 다시 평민백성이 되어 버린 것이다.


만일 구천에서 이를 알았다면 백문선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영력제와 이정국을 무슨 낯으로 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