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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원)

고대의 유목민족 중에서 몽골족만이 세계정복자가 된 이유는?

by 중은우시 2018. 2. 22.

글: 격격미(格格米)


징기스칸 휘하의 몽골철기(蒙古鐵騎)는 '세계정복자'라는 위명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런 의문을 품는다: 만일 몽골인들이 유목민족의 마쾌궁강(馬快弓强)의 장점을 이용하여 세계를 정복하였다면, 왜 그렇게 많은 유목제국들 예를 들어, 흉노, 유연, 돌궐은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 몽골인 혹은 징기스칸에게는 도대체 어떤 비결이 있었을까?


몽골인의 전법에 관하여, 많은 독자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그들은 점령지역내의 이민족을 인간방패로 사용하였다든지, 중앙아시아의 선진적인 투석기인 회회포(回回砲)를 사용하였다든지, 방대하고 효율높은 정보망을 갖추고 있었다든지 등등. 이들 전법은 확실히 그들의 인구부족 및 병력부족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공성약지의 효율을 제고하였다. 다만, 실제로 몽골인이 세계정복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전의 다른 유목민족과는 다른 기병전투방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1211년, 징기스칸은 친히 10만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금(金)나라를 공격한다. 이때의 몽골기병은 아직 전형적인 유목경기병(遊牧輕騎兵)이었다. 금나라 장성에 직면해서 징기스칸은 경기병이 속도에서의 우세를 이용하여 성동격서전법을 쓴다. 세 아들에게 3만의 병력을 이끌고 금나라군대를 견제하게 하고는 자신이 친히 주력을 이끌고 방어가 약한 금나라의 방어선을 일거에 돌파한다. 금나라의 총사령관 완안승유(完顔承裕)는 몽골인의 진격속도에 겁을 먹는다. 뭉골인이 후방을 몰래 기습할까봐 우려하여, 전선의 환주(桓州), 창주(昌州)와 무주(撫州)의 세 곳 부유한 성을 포기하고 40만의 병력을 끌어모아 야호령(野狐嶺) 일대의 산지요새를 방어한다. 이렇게 하여 대량의 양초(糧草), 장비와 군마를 그냥 몽골군에게 넘겨주는 꼴이 된다. 그리고 수십만군대를 산지요새에 나누어 지키게 하다보니 서로간의 연락이 불편했다. 반대로 기동속도가 빠른 몽골군은 병력을 모아 돌진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해주었다. 징기스칸은 이 방법을 이용하여 병력을 끌어모아 금나라군이 지키는 보루를 하나하나 각개격파한다.


이를 보면, 이 시기의 몽골군의 승리는 징기스칸의 불세출의 전술고수가 탁월하게 지휘했기 대문이었다. 그리고 금나라가 멍청했다. 몽골군은 금나라를 침략하면서 부유해진다. 이때부터 새로운 기병작전모델을 만들 수 있는 자본을 갖게 된다.


1219년, 몽골군대는 호라즘(花拉子模)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이로써 몽골군의 제1차 서정(西征)이 서막이 열린다. 서정의 과정중에서, 몽골인들의 적군이 들으면 간담이 서늘해졌던 기병전술이 점차 구축되기 시작한다. 그들은 점차 자신의 중기병부대를 만들고, 개략 전체 기병의 40%정도에 달하게 된다. 그들의 인마는 모두 갑옷을 입었는데, 노획한 갑옷도 있고, 자신이 만든 철찰갑(鐵札甲)과 피찰갑(皮札甲)도 있었다. 그리고 몽골특색의 찰갑인 나권갑(羅圈甲)도 있었다.


이런 갑옷은 철편(鐵片)과 피혁(皮革)을 꿰매어 연결시킨 것이다. 가벼우면서도 괜찮은 방어력을 갖춘다. 그 시대 유럽은 아직 후세에 자주 보이는 금속판갑이 나타나지 않았다. 유럽기사들은 쇄자갑(鎖子甲)으로 무장했다. 몽골중기병의 방호수준은 당시 최고수준이었다. 나머지 60%는 경기병이다 왕왕 가벼운 면갑(棉甲)을 입거나 아예 갑옷을 입지 않았다. 이는 몽고마가 힘든 것을 잘 참는 편이지만, 체력과 속도가 뛰어나진 않았으므로, 부득이 방어를 희생하고 속도를 얻은 것이다.



(이 그림이 보여주는 것은 몽골중기병과 경기병이 함께 러시아귀족중보병을 공격하는 모습을 그린 상상의 장면이다. 위에는 공격을 당하는 쇄자갑을 입은 러시아보병이 있고, 왼쪽은 나권갑을 입은 중기병이 있으며, 오른쪽에는 말타고 화살을 쏘는 것을 주요공격방식으로 하는 경기병이 있다)


전쟁터에서 경기병과 중기병은 서로 협력하면서 전투를 했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몽골인은 많은 경기병을 보내어 적군의 진은 시탐(試探)한다. 그리하여 적군의 약점을 찾아내는 것이다. 경기병은 일반적으로 원거리에서 상대방에게 활을 쏠 수 있기 때문에 상대방을 시험하기 좋다. 만일 적군이 속아서 공격해 들어오지 않으면, 그들은 게속하여 괴롭히면서 다른 기회를 찾는다. 만일 적군이 더 이상 이런 식의 타격을 참지 못하고 진격해 들어오면, 몽골경기병은 그들과 직접 부닥치지 않고, 물러나면서 활을 계속 쏘아 적을 유인한다. 이 단계에 몽골중기병은 쉽게 나서서 전투에 참가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경기병을 보호한다. 적군과 적군의 말이 어느 정도 피곤해지고, 병력에 손실을 입어 진형히 흐트러지면, 그제서야 몽골중기병이 반격하며 적군의 수급을 베어온다.


1223년, 칼카강전투에서 몽골기병은 이 전술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당시 몽골인은 제베와 수부타이 두 사람의 두 '만인대(萬人隊)'였다. 상대방인 러시아=쿠만연합군은 3만-8만명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몽골인은 위장패퇴전략을 사용한다. 러시아-쿠만연합군은 우세한 인원을 믿고 있는 힘을 다해 추격한다. 몽골인은 9일이나 연속으로 철수한다. 그리고 철수하더라도 질서있게 움직여 강인한 규율을 보여준다. 그러나 적군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칼카강변까지 추격했을 때, 연합군의 진영에는 혼란이 오기 시작한다. 쿠만인들이 단독으로 전면으로 치고 나왔다. 후면의 러시아인은 모래알처럼 흩어진다. 이때 몽골군은 반격을 시작한다. 쿠만인이 먼저 궤멸되고, 패퇴하면서 다시 러시아군의 진형까지 흐트러버린다. 그리하여 그들은 몽골군대의 공격하에 조직적이고 효과적인 반격을 해보지도 못하고 모조리 궤멸한다. 이 전투에서 몽골인의 엄격한 군기와 위장전술은 아주 잘 발휘되었다.


몽골인의 강인한 규율에 대하여는 중국사료에도 기록이 있다: "그래서 교전을 시작하면 매번 기병대는 적진을 가볍게 돌파한다. 한번 돌진하면 흔들리고 적군이 많든 적든 그대로 돌진한다. 적이 비로 십만이어도 역시 버티질 못한다. 흔들리지 않으면 앞부대가 옆으로 빠지고 다음부대가 다시 돌격한다. 다시 들어가지 못하면 그 다음부대가 똑같이 한다. 적진으로 돌격할 때, 시간을 끌어서 병력을 좌우와 후방에 배치하게 하고 병력이 사방으로 모이면 마지막으로 도착한자가 소리지르고 사방팔방으로 힘을 다해서 일시에 돌진해서 부딛쳐 간다."


기실, 당시 세계에서 궁마에 뛰어난 유목민족은 몽골인만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몽골인이 격하면 쿠만족은 전형적인 유목경기병이다. 그리고 경기병,중기병의 협력작전도 몽골인의 전매특허는 아니다. 기원전의 파르티아인, 그후의 페르시아 사산조, 유연인, 돌궐인등도 모두 잘했다. 다만 몽골인이 진정 두드러진 점이라면, 칼카강전투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놀라운 기율이다.


기병전술각도에서 분석하면, 몽골인은 상대방보다 더욱 엄격한 군기와 전투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병이사립(兵以詐立, 병법은 속임수이다)'의 각종 전술을 시전할 수 있었다.기율이 잘 지켜지므로 상대방을 깊숙히 유인하거나 분할포위하는 전술에 뛰어났고, 최소의 댓가를 치르면서 적군을 섬멸할 수 있었다.


몽골기병의 기율은 제도와 조직에서 나온다. 특히 징기스칸이 만든 대찰살(大札撒, 법전)이 있다. 몽골인이 채용한 것은 십진위의 군사체제이다. 하층의 군사단위는 10호이고, 십부장(十夫長)이 지휘한다. 10개이 십부는 백호를 형성하며 백부장이 지휘한다. 이렇게 하여 천호와 만호까지 나온다. 만호 하나는 만명이 기병대를 이끈다. 이것은 표면적으로 봤을 때 다른 유목제국과 차이가 없다.


다만, 실제로 이전이 유목제국의 만호제는 기실 여전히 부락을 핵심으로 했다. 그러나 몽골의 만호제도는 일종의 호적제도에 유사했다. 왜냐하면 대찰살에는 이렇게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지정된 십호, 백호와 천호 관할구역내에 거주할 수 있다. 마음대로 다른 단위로 옮겨갈 수 없다. 다른 지방으로 가서 비호를 받을 수도 없다. 만일 명령을 어기고 이주한 자는 그 자리에서 처형한다. 받아들인 자도 엄중하게 처벌받는다. 이렇게 하니 느슨한 부락연맹이 계급이 분명한 군사조직으로 변신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군사단위는 왕왕 서로 다른 부락에서 온 몽골인으로 구성했다. 이렇게 하여 칸에 충성을 다하도록 하고, 자신들만의 소그룹을 만들지 않도록 했다.


그외에 징기스칸은 자신의 숙위군(宿衛軍)을 둔다. 겁설군(怯薛軍). 그리고 각급 장수, 부락우두머리의 자제를 불러서 훈련시키고, 지도하고 관리와 작전에 참여시킨다. 이렇게 군사인재를 배양하고, 부하가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방지하여 일거양득이 된다. 그리고 겁설군의 역할은 전쟁터에서만이 아니었다. 대찰살에는 이렇게 규정되어 있다. 겁설군의 보통군사의 신분은 바깥의 천부장보다 높다. 이렇게 하여 겁설군은 칸의 눈과 팔이 된다. 이렇게 하여 전체 몽골제국 전체 몽골군대는 칸의 수중에 완전히 장악되는 것이다. 이런 군사체제를 통하여, 몽골군대는 군령여산(軍令如山)의 기율이 엄한 군대가 된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전쟁터에서 철과 같은 기율을 자랑했고, 공을 다투기 위하여 함부로 돌진하는 법도 없고, 쉽게 패퇴하는 일도 없었다. 군대의 전투력이 이전의 유목제국과 비교하여 질적인 비약을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