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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장인규(張仁奎): 민국시대 청방(靑幇)의 우두머리

by 중은우시 2019. 4. 6.

글: 역사일호포(歷史一號鋪)


만일 민국시대의 "상해삼대형(上海三大亨)"을 얘기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특히 소위 '두월생어록(杜月笙語錄)'이 인터넷에서 아주 인기를 끌고 있다. 그 어록의 진실성 여부는 차치하고서라고, 그것은 측면에서 두둴생의 영향력을 반영한다고 할 것이다.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는 것은 상해탄(上海灘)에 일찌기 이런 인물이 있었다는 것이다. 모든 방회가 일단 군정요인과 마찰이나 충돌이 생기면, 그 가운데서 조정하던 사람은 황금영(黃金榮)도 아니고, 두월생도 아니며, 더더구나 장소림(張嘯林)도 아니다. 그는 바로 "민국대부(民國敎父)"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장인규이다.


청말민초에 청방(靑幇)은 상해탄에서 가장 세력이 큰 방회였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창시자가 방을 만든 초기에 방에 가입한 시간을 기준으로 배분을 정하는데,"청정도덕(淸淨道德), 문성불법(文成佛法), 인론지혜(仁論智慧), 본래자신(本來自信), 원명흥례(元明興禮)"로 정했다. 민국시대에 이르러, 이 스무자를 다 써버렸다. 청방의 원로들은 다시 "대통오학(大通悟學)"의 네 글자를 추가한다.


처음에 청방의 파벌은 4개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상해본토부분; 절강호주(湖州)부분; 강소양주(揚州)부분; 산동(山東)부분. 산동부분은 장인규가 우무머리이다. 장인규 본인은 청방내의 배분이 "대(大)"자배이다. 상해본토부분은 우두머리들이 모두 일직 죽는 바람에 금방 몰락한다; 호주부분은 북양군벌과 너무 가까이 지내다가 나중에 갈갈이 찢겨지게 된다; 양주부분의 우두머리는 원세개에게 투항하고, 나중에 폭사당한다. 


유독 장인규만이 기회를 잘 포착하여, 상해탄으로 들어갔고, 세력이 놀랄만큼 커진다. 장인규는 이로 인하여 상해의 각 방파에서 "덕고망중(德高望重)"의 장노태야(張老太爺)"로 불린다. 장인규는 일찌기 산동 등현의 의화단에 가입한다. 그때의 우두머리는 마풍산(馬風山)이었다. 그는 청방의 제20대 "예(禮)"자배이다. 


1900년 경자지변때 서태후가 서안으로 도망치는데, 장인규는 마풍산을 따라 함께 서태후를 한구간 호송했었다. 청나라조정이 의화단을 이용하다가 토벌할 때, 마풍산은 피살되고, 장인규는 화를 피한다. 나중에 장인규는 풍국장(馮國璋)에게 중용되어 강소 제76혼성여단 여단장 겸 통해진수사(通海鎭守使)에 임명되고, '육군상장(陸軍上將)'의 계급을 받는다.


장인규는 이때부터 강회(江淮)일대의 군정대권을 장악한 풍운인물이 된다. 그는 의리를 중시하여, 군정요인이건, 공상계의 인사이건, 아니면 자방의 깡패들이건, 모두 그와 교분을 맺고 싶어했다. 이런 말이 있다. 황금영, 두월생도 장인규를 만나면 '후배'로 자처했다.


이것은 아주 정상적이다. 왜냐하면 두월생의 사부가 바로 장인규의 제자이기 때문이다. 배분으로 따지면 그는 '사조(師祖)'가 된다. 황금영과 장소림은 그를 "사숙(師叔)'이라고 불러야 한다. 전성기때 장인규의 제자, 도손는 3만여명에 이른다. "민국대부"라는 말이 명실상부하다고 할 수 있다.


1937년 송호회전이 발발한 후, 장인규는 수하제자들에게 적극적으로 행동하도록 명령한다. 항전에 노력하도록. 장소림이 군통에 제거되자, 일본군은 이것을 장인규가 스스로 문호를 정리한 것으로 여기고, 여러번 장인규로 하여금 '상해업무를 주재하도록' 요구하고 협박하나, 장인규는 거절한다. 1944년 12월 장인규가 병사하는데, 향년 79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