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취관역사(趣觀歷史)
모두 알고 있다시피, 삼국은 군웅이 다투던 시기이다. 저명한 모신(謀臣), 무장(武將)이 많이 나타났다. 동한 말기에 굴기한 각로의 군벌을 살펴보면, 그들의 휘하에 인재들이 아주 많았다. 형주(荊州) 일대는 당시 부유한 곳으로 병가의 필쟁지지이다. 자연히 능력있는 인물들도 많이 배출된다. 유감스러운 일은, 한실종실의 형주목 유표는 비록 형주라는 전략요충지를 장악하고 있었지만, 이 '사전지지(四戰之地)"를 지킬 능력이 없었다. 진수(陳壽)는 <삼국지>에서 유표를 이렇게 평가한다: 유표는 한남을 차지하고(跨蹈漢南), 원소는 하삭에서 위명을 떨치고 있다(鷹揚河朔). 그러나 둘 다 겉으로는 관대한 것같으나, 속으로는 의심이 많고, 계모를 잘 세우나 결단력이 없으며, 재능이 있는 자는 쓰지를 않고, 좋은 의견을 들어도 채택하지 않으며, 적자를 폐하고 서자를 세우며, 예를 버리고 애정을 쫓았다. 그리하여 후사가 무너지고, 사직이 쓰러졌다."
이 말은 입목삼푼(入木三分)의 날카로운 평가이다. 유표는 조심스러우나 의심이 많았다. 다만 큰 뜻도 없고, 계책도 없었다. 당연히 인정해야할 것은 유표의 집정기간동안 형주는 안정되었다. 이는 확실히 그 휘하에 우수한 인재들이 많았던 것과도 관련이 있다. 사실상, 유표의 휘하에는 괴량(蒯良), 괴월(蒯越)등 저명한 모사(謀士)가 있을 뿐아니라, 7명의 일류무장들이 있었다. 그들은 유표가 사망한 후 각각 다른 주인을 찾아갔는데, 그중 조조와 유비의 휘하로 각각 3명이 가고, 손권의 휘하로는 오직 1명만이 갔다. 그러나 그는 이들 중 가장 유명하고, 능력이 가장 뛰어난 무장이었다.
먼저 조조의 휘하로 들어간 세 명을 보자. 이 세 명은 바로 문빙(文聘), 채모(蔡瑁)와 장윤(張允)이다. 문빙은 자가 중업(仲業)이고, 남양 완성(지금의 하남 남양) 사람이다. 일찌기 유표가 많이 신임했던 대장이다. 명을 받고 형조의 북부에 있는 양양(襄陽)일대를 지키고 있었다. 그가 재임할 때 형주북부의 안전을 지켜냈다. 조조가 함부로 남진하지 못했다. 유표가 죽은 후, 아들 유종(劉琮)은 조조에 투항한다. 문빙도 그를 따라 조조에 투항한다. 조조는 원래 재능있는 인물을 아꼈다. 문빙은 조조에 의해 중용된다. 그는 조조의 명을 받아 강하(江夏)를 지킨다. 그후 여러번 남방의 손권과 관우로부터의 진공을 막아내면서, 탁월한 방어재능을 보여준다.
채모와 장윤은 일찌기 형주의 수사(水師)를 지휘했다. 그중 채모는 유표의 후처인 채씨의 동생이다. 형주 현지에서 명실상부한 실권파이고, 지위가 아주 높았다. 어린 주공 유종을 설득하여 조조에 투항하도록 한 후, 채모와 장윤 두 명도 조조의 인정을 받는다. 그는 명망과 능력을 인정받아 수군을 지휘한다. 두 사람의 최후는 <삼국지>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삼국연의에서는 주유가 이간계를 펼쳐서 조조로 하여금 채모와 장윤이 모반한다고 여기게 만들어 적벽대전이전에 그들 둘을 참수했다고 되어 있다. 나중에 조조가 크게 후회하긴 하지만 그때는 이미 어쩔 수가 없었다.
유비에게 투항한 사람은 위연(魏延), 황충(黃忠), 곽준(霍峻)의 세 명이다. 이 세 명은 촉한정권에서 모두 크게 활약하며 탁월한 전공을 세운다. 위연은 자가 문장(文長)이고, 의양 평씨(지금의 하남 동백현) 사람이다. 일찌기 유표의 시위였는데, 유비에 투항한 후 점점 실력을 드러낸다. 위연은 문무쌍전으로 그의 무공을 삼국의 일류수준이다. 그의 지모는 더더욱 일반무장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다. 제갈량의 북벌도중, 위연은 저명한 '자오곡기모(子午谷奇謀)"를 제안한다. 비록 너무 모험적이라 재갈량이 받아들이지 않기는 했지만, 후세에는 보편적으로 만일 이 계책을 시행했더라면, 삼국의 역사는 크게 달리 쓰여졌을 것이라고도 말한다. 한중쟁탈전때, 위연은 더더욱 한중을 취하는 주력이었고, 중대한 작용을 한다. 유비가 한중왕을 칭한 후, 위연을 한중태수로 삼는다. 이 곳을 지키는 책임을 진다. 이를 보면 유비가 그를 얼마나 신임했는지 알 수 있다.
황충은 자가 한승(漢昇)이고, 남양(지금의 하남 남양) 사람이다. 무예가 뛰어났고, 특히 활에 능했다. 중국고대 노익장의 대표인물이다. 형주유표집단이 무너진 후, 황충은 위연과 함께 처음에 형남(荊南)의 한현(韓玄)에게 투신한다. '장사지전'에서 황충은 관우와 여러 회합을 싸우면서 대등한 모습을 보인다. 이를 보면 그의 실력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헌제 건안24년(219년), 촉군과 조조군은 한중을 쟁탈하기 위하여 밀고당기는 전투를 벌이고 있었는데, 황충은 선봉을 맡아서, 정군산에서 조조수하의 대장 하후현을 죽이고, 이를 통해 한중으로 진공하는 돌파구를 연다. 유비는 한중을 성공적으로 탈취한 후, 황충은 중용된다. 나중에는 후장군이 되고, 관내후(關內侯)의 작위를 받는다.
곽준은 자가 중막(仲邈)이고, 남군 지강(지금의 호북 지강) 사람이다. 삼국시대 방어에 가장 뛰어났던 장수중 하나이다. 곽준은 형주의 명망가출신이고, 일찌기 형인 곽독(霍篤)을 따라 수백의 향용을 모아 유표에 투신한다. 곽독이 죽은 후, 곽준이 형의 잔여부대를 이끈다. 유표가 죽은 후, 곽준은 유기(劉琦)를 따라 유비에 투신한다. 유비가 촉에 들어간 후, 곽준은 수백명으로 수만 적군의 맹공을 막아낸다. 그리하여 유비가 사천을 차지하는데 큰 공로를 세운다. 나중에 곽준은 재동태수(梓潼太守)를 맡아 성도 북부의 문호를 막는다. 아들 곽과(霍戈)는 재능이 부친에 못지 않았고, 촉한 후기의 중요한 장수중 하나가 된다.
조조, 유비가 각각 3명의 장수를 얻은 것과 비교하면, 손권은 겨우 1명만을 얻었다. 그러나 그는 유표 휘하의 7명 맹장 중에서 실력이 가장 강한 장수였다. 바로 감녕(甘寧)이다. 감녕은 자가 흥패(興覇)이고, 파군 임강(지금의 중경 충현) 사람이다. 어렸을 때 강위의 유명한 비적이다. "금범적(錦帆賊)"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감녕은 일찌기 유표와 황조(黃祖)를 모신다. 그러나 중용받지 못했다. 건안13년(208년) 감녕은 손권에 투신한다. 그후 황조, 조조와의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합비지전'에서 일찌기 100명으로 조조의 군영을 기스하여, 조조군을 휘저으면서 자신은 사람하나 말하나 잃지 않는 장거를 펼친다. 손권은 감녕을 크게 칭찬한다: "맹덕(조조)에게는 장료가 있지만, 나에게는 감흥패가 있으니 상대할 만하다." 진수도 그를 '강표의 호신(江表之虎臣)"이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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