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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손권의 "강표십이호신(江表十二虎臣)"

by 중은우시 2019. 4. 22.

글: 정전각(亭殿閣)


조조에게는 "팔호기(八虎騎)"와 "오자양장(五子良將)"이 있고, 원소에게는 "하북사정주(河北四庭柱)"가 있으며, 유비에게는 "오호상장(五虎上將)"이 있다. 그렇다면, 손권에게는 무엇이 있을까? 원래 손권에게도 "강표십이호신"이 있다. <삼국지 권55, 오서10, 정황한장주진동감능서반정전>에는 12명의 동오 개국공신을 합하여 하나의 전으로 썼다. 이 12명은 각각 정보(程普), 황개(黃蓋), 한당(韓當), 장흠(蔣欽), 주태(周泰), 진무(陳武), 동습(董襲), 감녕(甘寧), 능통(凌統), 서성(徐盛), 반장(潘璋), 정봉(丁奉)이다. 이들을 "강표십이호신"이라 부른다. 손권의 이 십이호신은 듣기에 대단해 보이지만, 그러나 필자의 생각에 실제로 그중 일부는 억지로 숫자를 채운 느낌이 있다. 명실상부한 호신은 아닌 것이다.


선훼인망(船毁人亡)의 동습


동습은 양주 회계(會稽) 여요(餘姚) 사람이다. 손책이 회계군의 왕랑(王朗)을 격파한 후, 손권에 투신하고, 손책을 따라 산음의 도적들을 토벌하고, 적장 황용라(黃龍羅), 주발(周勃)을 참살한다. 동습은 10일만에, 수만의 반군을 격패시키고, 파양(鄱陽)의 팽호(彭虎)의 반란을 평정한다. 나중에 손권이 황조(黃祖)를 토벌할 때, 동습은 용맹하게 전진하여, 항조의 몽충함(蒙沖艦)의 줄을 끊는다. 그리하여 손권이 황조를 순조롭게 참살할 수 있었던 것은 동습의 공로가 아주 크다. 유수(濡須)전투에서 폭우가 내릴 때, 그가 탄 선박이 전복된다. 동습은 끝까지 배를 버리고 도망치지 않고, 배와 생사를 함께 하여, 결국 목숨을 잃는다. 동습은 비록 용맹하지만, 최종적으로 죽은 원인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유용무모(有勇無謀)의 인물이고, 호신이라고 할만한 사람은 아니다.


갑옷과 투구를 잃어버린 서성


서성은 일찌기 겨우 200명의 장병을 이끌고, 황조의 아들 황사(黃射)의 수천군대의 공격을 막아낸 바 있다. 그러나 오자양장중 하나인 장료(張遼)를 만나서는 낭패한 모습을 보인다. 소요진전투에서, 서성의 부대는 장료에게 패배하여 갑옷과 투구를 잃었고, 서성 본인은 무기까비 버리고 도망친다. 체면이 바닥에 떨어질대로 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서성은 비록 일찌기 황사와 같은 무명소졸을 격퇴시킨 바가 있으녀, 진정한 명장인 장료를 만나서는 본래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의 무예는 평범하여, 호신이라 할 수가 없다.


대임(大任)을 맡을 수 없었던 진무


손권은 진무를 중용했다 이는 주로 진무의 가족이 큰 영향력을 지녔기 때문이고, 진무가 정말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진무의 유일하게 기록에 남은 전투는 '장료가 소요진에서 위세를 떨치다"는 거기이다. 진무의 부대는 원래 강동의 최정예부대였는데, 장료의 돌격대를 맞이할 때, 원래는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지만, 결과는 궤멸하고, 주장인 진무는 전사한다. 그래서 진무는 기실 대임을 맡을 인물은 아니라고 본다. 만일 가족배경이 대단하지 않았더라면, 손권이 어찌 그로 하여금 정예부대를 이끌게 했겠는가?


유용무모의 주태


주태는 전투에서 아주 용감했다. 매번 전투때마가 솔선수범했다. 선성(宣城)전투에서 손권이 적에게 포위되었을 때, 주태는 손권을 구하기 위해, 여러번 적진으로 돌진하며, 12곳에 부상을 입으며, 결국 손권을 구해냈다. 손권은 주태의 구명지은에 감격하여, 주태를 유수독에 임명한다. 그의 지위는 서성보다 위였다. 다만 전쟁터에서의 활약은 서성만 못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무런 실적이 없었다고. 제2차 유수전투에서, 손권은 주태를 소환하고, 여몽, 장흠으로 바꾸어 기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보면, 주태가 십이호신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손권을 구해주었기 때문이지, 명실상부한 호신은 아니다.


순전히 경력에 의존한 한당


한당은 손책시기에 이미 중요장수였다. 그러나 손권시기에 들어, 직위는 오히려 그보다 어린 장수들보다 못했다. 한당은 실제로 내놓을만한 전공이 없었기 때문이다. 손권이 그에게 상을 내릴 이유도 없었다. 그가 천천히 관직이 오른 것은 순전히 그의 나이가 계속 더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는 경력의 의존하여 승진한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무명소배인 장패(臧覇)도 이기지 못한다.


나머지 사람들은 어떠할까?


정보는 전투에서 사병들보다 앞장섰고, 일찌기 혼자서 손책을 구해준 적이 있다. 그의 용맹함은 주태에 못지 않다. 남군전투에서, 정보와 주태는 함께 조인을 격패시킨다.


황개는 적벽대전때 거짓으로 조조에 투항하여, 화공으로 조조의 수군을 대파하고 대승을 거둔다. 황개는 나중에 다시 500명의 부대를 이끌고 모릉만(武陵蠻)을 격파하여 반란을 평정하기도 했다.


장흠은 제3차 유수전투에서, 여몽과 함께, 조조의 공격을 막아낸다. 장흠은 여몽과 함께 형주를 기습하는 전투에도 참가한다.


감녕은 황조의 수하로 있을 때, 손권의 부하장수 능조(凌操)를 사살한 바 있다. 나중에 손권에 투항하고, 제3차 강하전투에서, 감녕은 손권에 정보를 제공하여 황조를 격패시킬 수 있었다. 남군전투에서 이릉을 탈취하고, 조인의 공격을 막아낸다. 제2차 유수전투에서 감녕은 백기(百騎)로 적의 군영을 기습하여, 조조를 깜짝 놀라게 만든다.


능통은 강하전투에서 동습과 함께 황조의 부하장수 장석(張碩)을 참살한다. 손권이 소요진에서 패배할 때, 능통이 용맹하게 나서서 손권을 구해주었다.


반장은 형주전투에서 부하를 이끌고 관우를 생포한다. 이릉전투에서 반장은 부하를 이끌고 풍습(馮襲)을 참살한다. 강릉전투에서, 반장은 하후상이 놀라서 도망치게 만든다.


정봉은 동관전투에서 '혈중분단병(血中奮短兵)"으로 위군을 대파한다. 이것은 계석정 전투이후에 동오의 최대 승리였다.


누가 진정한 호신이고, 누가 억지로 숫자를 채웠는지는 이것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