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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삼국시대 구석(九錫)을 받은 4명의 인물

by 중은우시 2019. 6. 4.

글: 취미적역사(趣味的歷史)


고대에 '구석(九錫)'은 기실 '구사(九賜)'이다. 왜냐하면, '석'과 '사'는 통가자(通假字)이기 때문이다. 구석은 중국고대 황제가 대신에게 주는 최고의 예우이다. 주로 차마(車馬), 의복(衣服), 호분(虎賁), 악기(樂器), 납폐(納陛), 주호(朱戶), 궁시(弓矢), 협월(鋏鉞), 궤울(柜鬯)의  9종류 물건을 가리킨다. 역사상 많은 개국황제들은 구석을 받았다. 그러므로 구석은 찬역(纂逆)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삼국역사상 모두 4명이 구석을 받았다.


첫째, 조조


196년, 조조는 순욱의 건의를 받아들여, 한헌제를 허창으로 모셔와서 '협천자이령제후(挾天子以令諸侯)"하는 목적을 이루게 된다. 관도지전에서 원소를 대파한 후, 북방의 여러 적들을 제거한다. 207년, 원소의 세력이 철저히 제거되고 오환(烏桓)이 투항한다. 211년, 조조는 마초와 한수를 격패시키고 양주를 평정한다. 213년, 조조는 위공에 봉해지고, 같은 해 구석의 예를 받는다. 214년, 조조는 위왕에 봉해지고, 이때는 비록 한나라의 신하이지만 실제로는 이미 황제였다.


둘째, 손권


220년, 관우가 양양전투를 일으키고, 우금이 포로로 잡히며, 방덕이 피살되고, 조인의 포위당한다. 서황이 구원을 갔으나 성공하지 못한다. 조조는 한때 천도까지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사마의의 계책을 써서 손조연합군이 관우를 협공하여, 결국 관우가 형주를 잃게 된다. 유비가 칭제한 후, 관우의 복수를 위해, 그리고 형주를 되찾기 위ㅣ해, 이릉지전을 일으킨다. 손권은 조위가 이 틈을 타서 공격해올까 우려하여, 조비에게 칭신한다. 조비는 이로 인하여 손권에게 구석을 내린다. 229년, 손권이 칭제하여 오나라를 건립하고 건업을 수도로 삼는다.


셋재, 사섭(士燮)


사섭은 교지태수(交趾太守)이다. 그러나 그의 형제는 각지에서 군수를 맡고 있었다. 교주의 정무,군사는 모두 사섭이 장악했다. 그는 명목상으로는 한나라의 신하이지만, 실제로는 이미 영남의 할거하는 군벌이었다. 조조는 남북으로 손권을 협공하기 위하여, 한헌제의 명의로 사섭에게 구석의 예를 내린다. 아쉽게도, 사섭은 끝내 손권에 의탁하고, 손권은 그를 위장군에 봉한다. 사섭은 교지를 40년간 다스린다.


넷째, 사마소(司馬昭)


부친 사마의와 형인 사마사가 사망한 후, 사마소는 이미 조위정권을 완전히 장악한다. 263년, 위군이 3로로 나누어 촉한을 공격하고, 유선은 투항한다. 사마소는 진공(晋公)에 봉해진다. 이대 사마소가 조위를 대체하려는 야심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264년, 위원제(魏元帝)는 사마소를 상국(相國)에 임명하며, 진왕에 봉하고, 구석을 내린다. 다만 사마소는 결국 조위를 대체하지 못한다. 그가 원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병이 들어 다음 해에 사망하기 때문이다. 나이 겨우 54세였다.


위의 4명을 제외하고 삼국역사상 또 다른 3명도 구석과 관련이 있다. 그들은 구석의 예를 받지 않은 것이다.


고평릉전투이후, 사마의는 이미 조위정권의 핵심인물이 되어, 군정대권을 독점한다. 위나라황제 조방(曹芳)은 그를 상국으로 임명하나, 사마의가 받지 않는다. 그 후에 구석을 하사하는데 사마의는 여전히 받지 않는다. 공손연이 동북에 웅거하며 표면적으로는 위나라에 칭신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요동을 장악한 군벌이엇다. 나중에 암중으로 손권과 연합하여 조위에 대항하려 했다.


손권은 아주 기뻐하며, 공손연에게 구석을 하사하며 그를 회유하려 한다. 그러나 공손연은 조위의 보복이 두렵고, 손권이라는 먼 곳의 물로는 가까운 불을 끌 수 없다고 여겨서 결국 거절한다.


유비가 죽은 후, 제갈량은 촉한의 군정대권을 장악한다. 또 다른 보정대신인 이엄이 여러번 제갈량에게 구석을 받으라고 권하지만, 모두 제갈량이 거럴한다. 먼저 조위를 멸한 후에 받겠다고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