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가등영(賈登榮)
당나라말기, 천하는 대란에 빠지고, 사방에서 전쟁이 벌어지며, 여러 영웅들이 나와서 권력을 차지하려고 싸웠다. 일시에 절도사, 자사등은 속속 스스로의 병력을 거느리고, 독립하여 정권을 세운다. 중국대지에 여러 소국이 나타나게 된다.
이 시기에 사천에 있던 왕건(王建)과 맹지상(孟知祥)은 중원제후의 방식을 본받아, 이곳에 그들의 독립왕국을 건립한다. 바로 전촉(前蜀)과 후촉(後蜀)이다. 이 두 개의 독립왕국은 각각 18년과 32년간 존재하다가 붕괴되고 만다.
907년 9월, 당소종(唐昭宗)에 의하여 사도(司徒), 촉왕(蜀王)에 봉해진 왕건은 당왕조의 굴레에서 벗어나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전촉을 세운다.
919년 6월 18세의 왕연(王衍)이 황제의 보좌에 오른다. 다음해 여름이 막 지나면서 왕연은 "북순(北巡)"을 나선다. 출발하는 날 수행하는 대오의 '깃발과 갑옷이 백리에 이어졌다'
당연히, 북순은 거짓말이고, 산수를 찾아서 노는 것이었다. 광한(廣漢)에 도착한 후,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하루종일 "배를 타고 음악을 들으며 연회를 베풀었다." 몇달 후, 왕연의 일행은 다시 사척북부의 중요도시 낭중(閬中)에 이른다. 그는 여기에서 노느라 돌아갈 줄 모르고 가릉강(嘉陵江)에 배를 띄우고 놀면서 술과 음악을 즐겼다. 다음 해 3월이 되어야 비로소 성도(成都)로 돌아온다. 북순기간은 8개월에 이르렀다. 이 기간동안, 변방의 병사들을 위문하러 가지도 않았을 뿐아니라, 각 지방의 정무를 알아보지도 않았다.
왕연은 북순을 떠나기 전에 대시들에게 자신을 위하여 "의화원(宜華苑)"을 건설하도록 지시했었다. 그가 성도로 돌아오기 전에 완공해놓으라고 한 것이다. 과연 왕연이 성도로 돌아왔을 때, 이 "십리에 이르는 호화사치의 극을 달리는 토목공사"는 완공되어 있었다. 이때부터, 이곳은 그가 놀고 즐기는 장소로 바뀐다. 왕연은 여기에도 만족하지 않고, 자주 '밤이면 기생집으로 가서 자고, 술집으로 가서 술을 마셨다." 그는 떠나기 전에 벽에 "왕이 한번 왔었다(王一來也)"라는 글을 남겼다.
왕연이 일을 제대로 하지 않고, 정무를 돌보지 않음에 따라 천부지국(天府之國)이라고 불리는 촉국은 그가 통치한 7.8년간 "숲과 나무가 마르고, 천리에 풀과 나무가 자라지 않았다." 백성들은 살기가 힘들어져서 굶어죽은 시신이 들판에 널렸다. 왕연 통치하의 촉 사람들의 인심이 흩어졌다는 말을 듣자, 925년 당장종(唐莊宗) 이존욱(李存勖)은 촉을 수복하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위왕(魏王) 이계급(李繼岌), 추밀사(樞密史) 곽숭도(郭崇韜)로 하여금 6만을 이끌고 토벌하도록 보낸다. 왕연은 응전하기로 결정한다. 전해지는 바로는 그가 성도를 떠날 때, "하늘과 땅이 시커멓게 ㅚ었고, 병사들이 제대로 줄을 맞추지 못했으며, 까마귀들이 깃대 위에 앉아서 구슬프게 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병사들이 당군과 정면으로 싸우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는 성도로 퇴각한다. 당군이 성도에서 멀지 않은 곳까지 다가온 것을 보자, 왕연은 할 수 없이 투항한다. 당장종은 그를 안락공(安樂公)에 봉하고, 그를 낙양으로 불러들인다. 왕연은 수천의 가족을 이끌고 낙양으로 간다. 서안까지 갔을 때, 나이 겨우 28살이 왕연은 역참에서 피살당한다.
전촉은 이렇게 사라진다
전촉이 멸망한 9년후인 934년, 당시 성도윤(成都尹), 검남서천절도사대사(劍南西川節度使大使)인 맹지상은 당왕조가 지는 해와 같이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는 것을 보고, 용포를 몸에 걸치고 황제가 되어 후촉을 건립한다. 그러나, 맹지상은 황제의 자리에 앉은지 얼마되지 않아 죽는다. 같은 해, 그의 아들인 맹창(孟昶)이 황제이 보좌에 등극한다.
맹창이 막 보좌에 올랐을 때, 그는 자신의 좌우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전촉 왕연의 "박이호경염지사(薄而好輕艶之辭)"는 절대 따라 배우지 않겠다. 그리고 한 마음으로 정무를 열심히 보아서 백성들에게 복을 가져다 주고, 촉국이 진정한 천부지국이 되도록 하겠다고. 그는 이렇게 말하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맹지상이 신임했던 대신 이인한(李仁罕), 장업(張業)이 법도를 어기고, 저택을 크게 짓기 위하여, 백성의 논밭을 빼앗고, 남의 묘를 파헤쳤다. 맹창은 바로 이인한을 체포하여 죽여버린다. 그리고 미주자사(眉州刺史) 신귀(申貴)가 백성들에게 잔학하게 대하며, 아주 탐욕스럽다는 말을 듣고는 그를 파직시킨 후에 사사(賜死)한다. 동시에 그는 조당에 '궤함(㔲函)'을 설치하는데, 오늘날의 '고발함'과 같다. 신하와 백성의 투서를 받아 직접 민정을 알려고 하였다.
맹창의 이런 조치는 일벌백계의 효과를 낳았다. 관리들은 조심했다. 관리들에게 경고하기 위하여, 맹창은 다시 941년에 24구 96자의 <계유사(誡諭辭)>를 짓는다:
짐념적자(朕念赤子), 간식소의(旰食宵衣). 탁지영장(托之令長), 무양안수(撫養安綏),
정재삼이(政在三異), 도재칠사(道在七絲), 구계위리(驅鷄爲理), 유독위규(留犢爲規)
관맹소득(寬猛所得), 풍속가이(風俗可移), 무령침삭(毋令侵削), 무사창이(毋使瘡痍)
하민이학(下民易虐), 상천난기(上天難欺), 부여시절(賦與是切), 군국시자(軍國是資)
짐지작상(朕之爵賞), 고불유시(固不逾時), 이봉이록(爾俸爾祿), 민고민지(民膏民脂)
위인부모(爲人父母), 망불인자(罔不仁慈), 특위이계(特爲爾戒), 체짐심사(體朕深思)
그리고, 이 <계유사>를 전국에 발송하여, 관리들이 외우도록 했다. 여기서 한 가지 언급할 점은 북송이 후촉을 멸망시킨 후, 송태조 조광윤은 맹창의 <계유사>에서 4구를 뽑아서 송나라의 "관잠(官箴)"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봉이록(爾俸爾祿), 민고민지(民膏民脂), 하민이학(下民易虐), 상천난기(上天難欺)"
송 태평흥국8년(983년)에 송태종은 다시 이 16자의 "관잠을 "계석명(戒石銘)"이라 이름하여 천하에 반포한다. 그리고 돌에 세겨서 각 주,부,현의 아문에 세우게 한다.
이 사자운문은 맹창이 남긴 중요한 작품이다. 북송의 시인이자 서예가인 황정견은 조정의 명령을 받아 16자의 비문을 쓴다. 문자 내용은 바로 맹창의 <관잠>에서 따온 것이다.
관료사회를 바로잡는 동시에, 맹창은 생산의 발전에도 힘을 기울여 경제를 회복시킨다. 그는 "부역구성(賦役俱省)"의 정령을 내려 부역과 세금을 감면해준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편안히 살 수 있도록 한다. 그는 농상(農桑)을 권장하는 명령을 반포하여 촉의 백성들이 농업, 양잠, 방직업을 발전시키도록 한다. 그는 또한 각급 관리들에게 주요 힘을 농업, 양잠업의 생산을 늘이는데 쏟도록 요구한다. 그리고 농업, 양잠생산의 발전을 관리평가의 지표로 삼는다.
맹창의 여러 해에 걸친 노력끝에 촉국의 면모는 천지가 개벽하는 변화를 맞이한다. 그러나 그후에, 맹창은 전촉의 교훈을 잊는다. 예전의 왕연과 마찬가지로, 그는 성색견마(聲色犬馬)에 빠져버린다. 944년, 그는 조령을 내린다: 양가집 여자들을 성발하여 후궁으로 들이라. 황궁을 화려하게 꾸밀 뿐아니라, 오줌받이도 금은보석으로 장식한다. 이를 보면 얼마나 사치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맹창은 음악에 빠져서 자주 스스로 작사작곡을 하여, 음악인들과 함께 연주하고 노래한다. 맹창은 점점 정무를 게을리 하고 후촉은 점점 쇠퇴한다.
"남음(南音)"은 중원 고악(古樂)의 지금까지 남아있는 활화석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복건성 천주(泉州)의 민남(閩南) 일대에 남아 있어서 "천주남음"이라고 부르는데, 그 시조를 맹부낭군(孟府郎君)이라고 하여, 또 다른 이름은 '낭군악(郎君樂)'이다. 이들이 시조로 모시는 악신(樂神)은 바로 후촉의 맹창이다.
후촉이 멸망하기 전의 마지막 제석(除夕)날(964년), 맹창은 학사 신인손(辛寅遜)등에게 글을 짓도록 하여, 도부(桃符)에 글을 쓰고 오색등을 밝히면서 송구영신한다. 그러나 그는 학사들이 올린 문구가 좋지 않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자신이 붓을 들어 이렇게 써서, 자신의 침궁 문 위에 걸어놓는다:
신년납여경(新年納餘慶)
가절호장춘(佳節號長春)
이것은 중국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춘련(春聯)이다.
965년, 32년간 집정해온 맹창은 송군의 병력이 밀려들어오자, 투항을 선언한다. 이어서 그는 송왕조의 수도인 개봉으로 끌려가서, 송태조 조광윤을 만나고, 진국공(秦國公)에 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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