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오수(吳垂)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립한 후, 군대관리에 대하여 고심을 하게 된다. 명나라는 무력으로 천하를 평정했고, 당연히 무장들의 공로가 가장 컸다. 그리하여 무장들이 발호하는 상황이 나타난다. 그리고 소수인들을 제외하고 대두분의 무장들은 스스로를 절제할 줄 몰랐다.
가장 전형적인 사례는 개국장군 남옥(藍玉)이다. 그는 자신의 집에 많은 노비를 두고, 또한 많은 양자를 거두었다. 그렇게 자신의 개인세력을 키운다. 그리고 법을 위반하는 일도 많이 저지른다. 민간의 전답을 빼앗고, 어사가 그것을 문책하자 직접 어사를 쫓아냈다.
이런 일이 발생하자, 주원장에게는 하나의 경종이 된다. 그는 반드시 제도를 건립해야 했다. 군대를 관리하고, 장수들을 견제하는. 유백온의 도움으로 주원장은 전국의 군대를 위소(衛所)로 재편한다. 경성에서 지방까지 모두 위소를 둔다.
위소에서 사병들은 둔전에 농사를 지어서 자급자족하도록 하는 정책을 쓴다. 이렇게 하여 국가는 군사비지출을 줄일 수 있었다. 병력배치에서 주원장은 경성지구에 60만을 주둔시키고, 나머지 지역에 나누어 150만을 주둔시킨다. 즉, 당시의 병력은 경사(京師)에 치중되어 있었다.
군권이 지나치게 어느 한 대신의 손에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주원장은 과거에 설립했던 대도독부(大都督府)를 폐지하고, 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를 설치한다. 그러나, 오군도독부는 모든 병권을 장악하지 못한다. 그들은 주로 군적(軍籍), 훈련과 군정(軍政)을 장악했다.
군관의 임면, 승진, 군령이동등은 병부(兵部)가 책임졌다. 그리하여 명나라초기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병부는 출병(出兵)의 영을 내릴 수 있지만, 통병(統兵)의 권한이 없고, 오군은 통병의 권한은 있지만, 출병의 영을 내릴 수 없다."
그러나, 병부는 오군도독부의 사무에 간여할 권한이 없었다. 만일 간섭하면 그것은 위법하다. 즉, 명나라초기, 전체 국가의 최고군사지휘관은 오군도독부의 최고장관인 좌우도독과 병부상서라고 할 수 있다.
명나라초기의 무력이 숭상받던 분위기에서 오군도독부의 최고장관인 좌도독, 우도독의 직급은 병부상서보다 높았다. 좌,우도독은 정일품(正一品)이고, 병부상서는 정이품(正二品)이었다.
병부는 과거에서 선발된 인원에서 뽑히는 것과 달리, 오군도독부의 인선은 모두 공신, 숙장(宿將)이었다. 이런 방식은 이점도 있고 폐단도 있다. 공신숙장은 대부분 주원장의 심복으로 전쟁에 참여했다. 전쟁을 잘 안다. 다만 폐단도 아주 분명하다. 즉, 후계자들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원장 후기, 명나라의 병권은 각지 번왕(藩王)의 수중으로 넘어간다. 다만, 건문제 주윤문이 등극한 후, 삭번에 착수하여, 무장의 지위를 탄압하고, 육부상서의 직급을 올려준다.
명성조 영락제 시기 오군도독부는 비록 지위가 아주 높지만, 실권은 이미 병부의 손으로 넘어가기 시작한다. 오군도독부의 많은 직권은 계속 삭감당하고, 병부의 권력은 계속 커져간다.
병부가 장악한 직권에는 황제, 황후, 황태후가 출행할 때의 수레호위행열, 행사배치, 궁정수비가 포함된다. 경성군대의 훈련과 크고 작은 군정은 하나하나 병부의 손에 들어간다.
그러나, 영락제때, 오군도독부는 여전히 입김이 셌다. 진정 오군도독부가 쇠퇴하기 시작한 것은 역시 명나라 중기이후이다. 정통연간에 발생한 토목보의 변이 그 계기이다. 1449년, 북경에 거주하던 정통제 주기진은 몽골 오이라트군이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는 환관의 종용하에 몽골을 친정하러 나선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황제는 가잦 좋은 자원을 모조리 동원한다. 각양각색의 무기, 공신숙장, 문무대신을 모조리 데려간다. 그러나 멍청한 지휘로 명나라군대는 토목보까지 행군했을 때 몽골군에 격패당하고, 많은 대신들도 이 전투에서 전사한다.
이들 중에는 직접 전쟁에 참가하여 스스로의 전공으로 군직을 얻은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주체(영락제)시기의 명장도 있었다. 예를 들어 영국공(英國公) 장보(張輔). 그리고 공신숙장의 후손도 있었다. 예를 들어 평락백(平樂伯) 진회(陳懷). 이들은 모두 오군도독부의 기둥이었다. 그들이 죽은 것은 오군도독부의 역량에 크나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토목보의 변 이후, 병부상서 우겸(于謙)은 경성의 방어업무를 장악하고, 몽골군대의 침입을 막아낸다. 이 때, 우겸이 장악한 병권은 병부만아 아니라, 오군도독부의 병권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우겸이 사망한 후에도, 병부의 권력은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지위는 더욱 중요해진다. 과거에, 오군도독부는 무장의 발탁과 임명, 군대를 훈련할 직권을 장악한다. 명나라 중후기부터 각지의 도사위소(都司衛所)가 조정에 보낸 보고서는 모조리 오군도독부를 거치지 않고 직접 병부로 간다.
군대훈련도 오군도독부가 관할하지 못한다. 이들 권력은 모두 순무(巡撫)에게 부여되고, 하급군관들이 책임진다. 오군도독부는 실제로 허수아비로 된다. 이들은 더 이상 오군도독부의 지휘감독을 받지 않고, 총독이나 병부에 보고하게 된다. 그래서 명나라 중후기 조정의 실질적인 최고군사지휘관은 이미 병부가 되고, 더 이상 오군도독부가 아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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