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취역사(趣歷史)
명나라의 멸망에 대하여는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한다. 비애의 왕조이고 비애의 시대이다. 많은 사람들은 모두 명나라가 도대체 왜 멸망했는지를 연구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시대를 넘어 명나라를 구해주고 싶어했다. 유행하는 견해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째, 명나라는 "당쟁(黨爭)"때문에 망했다. 어느 왕조이건 당쟁이 있었다. 그리고 황제는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당쟁을 조장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조정의 평형과 안정을 얻으려 한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당쟁은 천하를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군주의 통치를 공고히 해주는 역할을 했다.
둘째, 청나라는 "창위(廠衛)"때문에 망했다. 동창(東廠)과 금의위(錦衣衛)는 황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탄생했다. 동창과 금의위는 영화드라마에서 묘사한 것처럼 그렇게 과장되지는 않았다. 창위는 그저 불법관리를 감독하고, 백성들은 전혀 해치지 않았다. 그래서 명나라가 창위때문에 멸망했다는 것은 웃기는 말이다.
셋째, 명나라는 "환관전정(宦官專政)"때문에 망했다. 명나라때 환관이 권력을 독점했는가? 겉으로 보기에는 만력제 중기이후, 환관의 지위는 쇠락한다. 어떤 사람은 위충현(魏忠賢)을 얘기한다. 위충현은 확실히 발호했다. 그러나 천계제가 위충현을 기용한 것은 바로 동림당을 상대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위충현이 아무리 발호해도, 건곤은 천계제가 장악하고 있었다.
넷째, 명나라는 "삼대정(三大征)"때문에 망했다. 어느 왕조건 전쟁은 빈번했다. 천계제, 숭정제 두 왕조때 요동전투가 많지 않았던가? 위진남북조, 오대십국때 그렇게 많은 소국이 매년 매월 매일 전쟁을 진행하지 않았던가? 어느 국가도 전쟁을 한다고 하여 바로 망하는 경우는 없다. 만력제의 삼대정은 수백만냥의 돈을 썼다. 그러나 삼대정때 쓴 돈은 모두 만력제가 내정에서 부담한 것이다. 수백만냥의 은자때문에 명나라가 망했다고? 그것은 더욱 가소로운 말이다.
다섯째, 명나라는 "명신종의 부상조(不上朝)"때문에 망했다. 명신종이 조회에 나오지 않았다. 그런다고 천하가 멸망하는가? 명나라의 문관체제는 이미 완비되어 있었고,황제가 정무를 돌보지 않더라도, 대명왕조는 돌아가고 있었다. 하물며 만력제는 모든 대사를 황제의 주도하에 진행했다. 명신종이 완전히 조정을 돌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여섯째, 명나라는 북반구기후의 "소빙하기"때문에 망했다. 70년에 걸친 기후의 소빙하기가 명나라말기 북방의 식량생산을 줄어들게 만들었고, 전염병이 유행하고, 이재민이 증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이 명나라가 멸망한 근본원인일까? 아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당나라 정관연간에 명성조 주체의 시기에 북반구는 역시 빙하기에 처해 있었다. 북방의 재난이 아주 심각했다. 그러나 모두 잘 지나갔다. 왜냐하면 정부가 이재민을 구제하고, 당시의 정부는 통제력이 강했기 때문이다.
일곱째, 명나라는 토지겸병(土地兼倂)때문에 망했다. 고대봉건시대의 지조(地租)는 10에 3이었다. 그후 지주는 "3"중 0.5를 농업세로 납부한다. 그래도 농민은 70%를 가져갈 수 있었기 때문에 괜찮게 살 수 있었다.
여덟째, 명나라는 "백은(白銀)수입의 감소"때문에 망했다. 서방학자는 명나라말기에 외국의 백은이 대량으로 중국에 수입되어 통화팽창이 일어나고, 나중에 백은생산으로 이익을 볼 수 없게 되자 백은의 채굴량이 감소한다. 이리하여 중국은 백은수입량이 감소하고, 민간에서 백은을 많이 묵히고 있었기 때문에, 통화축소가 나타난다. 이미 통화팽창이 생겼기 대문에, 최종저으로는 물자가 비싸지고, 백은은 부족해진다. 그리하여 경제가 붕괴되었다. 이 건해는 잘못되었다. 왜 잘못되었냐교? 백은수입감소는 오늘 날의 말로 하자면, 시장에서의 화폐공급량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물가가 하락하는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말기에 시장에서 유통되는 백은이 감소한 상황은 오히려 물가인상을 불러왔다. 그것은 이전에 백은이 너무 많아서가 아니라, 이전에 백은이 많아 물가를 올려놓은 상태에서 백은의 유통량이 감소하니 물가는 자연히 뜰어지게 된다. 이것은 우려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 왜 백은이 감소하는 상황하에서 물가가 떨어지지 않은 것일까? 그것은 구조적 통화팽창때문이다. 즉 기초상품인 양식의 생산량이 감소하면서 양식가격이 올라간다. 그리하여 다른 상품의 가격까지 끌어올렸다. 그래서 근본문제는 역시 양식문제이다. 백은문제가 아니라. 백은이 감소하면 정부에 돈이 없어 식량을 사서 이재민을 구조할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웃기는 말이다. 명나라말기에 식량이 감산되면, 네가 백은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양식을 살 수 있겠는가? 명나라의 멸망은 백은의 수입이 많고 적고와는 별로 관계가 없다.
아홉째 ,명나라는 탐관오리때문에 망했다. 이것은 모두 헛소리이고, 검증을 버틸 수 없는 근거없는 말이다.
열째, 명나라는 이자성의 반란과 청나라병사의 입관(入關)때문이다. 이것은 결과이지 원인은 아니다.
열한째, 명나라는 기수(氣數)때문에 망했다. 이것은 가장 웃기는 말이다. 이 이유는 완전히 학자가 무지를 덮으려는 것이다. 어떤 결과도 모두 그 발생이유가 있다. 그러나 절대로 기수에 원인을 돌려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명나라가 멸망한 진정한 원인은 도대체 무엇일까?
첫째, 문관집단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져서 황권이 억제받게 되었다. 사실상 엄숭(嚴嵩)이 죽은 후, 대명의 문관들은 하나로 뭉쳤다. 황제는 더 이상 이들을 분화시켜 통제할 수 없었다. 만력제가 조회에 나가지 않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만력제가 조회에 나간 것도 그 이유고, 나가지 않은 것도 그 이유이다. 이학(理學), 심학(心學)을 신봉하는 문관들은 유사종교같은 광기가 있었다. 비과거출신의 인원들을 모두 무시한다. 그들은 조정을 좌지우지하고, 황권을 억압했다. 그들의 신앙과 교조를 위해 피를 흘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직접적인 결과는 황제도 어쩔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외에 그들은 그저 공리공담만 했고, 헛소리를 지껄이던 해서(海瑞)는 그들의 모범이 된다. 일단 황권이 억제되면, 국가에서 제정한 정책은 전체적인 국면을 고려하지 않게 된다. 그냥 문관집단의 이익만 고려하게 된다. 즉 부르조아계급의 이익만 고려하게 되는 것이다. 대명의 문관집단은 바로 명말 강남자산계급의 대표자들이다. 명태조가 빈한한 출신이기 때문에, 민간의 사정을 잘 알았다. 게다가 명나라초기에는 전란을 겪은 후여서 모든 것을 새로 일으켜야 했다. 그래서 명태조는 백성들을 쉬게 해주었다. 그 직접적인 결과는 명나라의 세금이 계속 낮았다는 것이다. 상업세는 더욱 낮았다. 그래서 명나라의 재정은 계속 곤란했다.
명나라 초기에는 전쟁, 수리, 재난구제에 조정은 모두 재력이 되었다. 그러나 명나라말기에 이르러서는 불가능하게 된다. 왜냐하면 명나라말기의 농업은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내려갔다. 상업이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올라갔다. 세수는 여전히 농업세 위주이다. 숭정제에 이르러, 전쟁을 할 돈도 없어진다. 이재민을 구제할 돈도 없어진다. 그러나 강남의 부유한 상인들은 일거에 수십만냥 백만냥을 내놓았다. 황상이 세금을 늘이려고 하면 즉시 대신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닥친다. 명나라 말기에는 상업이 발달하여, 상인이 해외무역에서 거액의 돈을 번다. 동림당이 방해했기 때문에, 상업세는 올릴 수가 없었다. 만력제는 실로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광세(鑛稅)를 거두기 시작한다. 그 결과 대신들이 지방관을 교사하여 세리를 죽여버린다. 이를 봐도 당시 상황을 알 수가 있다. 만일 황권이 강했다면, 재정이 충분하고, 북방에서 수리사업을 할 수가 있었고, 재난이 생겨도 대응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공리공담을 일삼아 나라를 망치고, 백성들에게 재앙을 가져오면서 스스로가 옳다고 믿고, 보복을 즐기면서 세금을 회피하는 것만 알았던 동림당은 절대로 대명왕조의 간신이다. 동림당에 타격을 가한 위충현은 절대로 대명왕조의 현신(賢臣)이다. 그는 자신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았다. 위충현이 죽은 후, 동림당이 다시 권력을 장악하고, 상업세도 끝난다. 나의 견해는 황제는 마땅히 부유한 성의 관리를 임용하는 것을 줄여야 한다. 특히 사신(士紳)배경의 관리는 그러하다. 그래야 제정되는 정책이 전체적인 국면을 고려하게 되고, 전국적인 범위내에서의 자원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
둘째, 명나라말기의 경제제도가 시대를 앞서서 발달했다. 중국고대에 왜 중농억상(重農抑商) 정책을 썼을까? 그것은 기후, 하류, 지리의 요소가 중국을 농경국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유럽처럼 상업이 위주가 아니라. 그래서 중국의 대부분 인구는 농업인구이다. 이는 양식생산의 안전이 중국고대의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양식이 없으면 백성이 반란을 일으킨다. 중국고대에 중농억상의 정책을 사용하고, 해외무역을 금지한 것은 바로 농업인구가 비농업에 종사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그렇게 되면 양식의 감산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런데 명나라말기, 강남에 대규모로 경제작물을 재배하게 되고, 해외무역이 활발했다. 많은 농업인구가 수공업 혹은 해외무역에 종사한다. 장거정의 세금개혁은 실물세를 화폐세로 전환시킨다. 사람들은 양식을 생산하지 않아도, 세금을 낼 수 있었다. 강남에 대규모로 경제작물을 심은 악영향은 바로 강남인구의 식량을 호광(湖廣)에 의존해야 하는 것이다. 명나라말기에 전란이 일어나자, 강남의 부유한 상인들은 집도 살 수 있고, 땅도 살 수 있지만, 식량은 살 수 없게 된다. 청나라병사들이 남하한 후, 남방사진(南方四鎭)의 20만정예병은 군량이 없어서, 모두 청나라에 투항하여 청나라병사로 변신한다. 정부에 식량이 없으니 병사를 모집하기도 어려워진다. 남방의 식량이 부족한데 ,북방에 재난이 발생하면, 천하는 이미 구제할 식량이 없어지게 된 것이다. 생각해보라 강남이 대거 양식을 생산하여 수년동안 쓸 수 있는 식량을 운송하여 북방의 각성에 저장해두고, 재해가 있는 해를 대비하고, 창고를 열어 이재민을 구제하면 상황이 좋아지지 않겠는가.
셋째, 다시 장거정의 세금개혁을 얘기해보자. 장거정의 세금개혁은 명나라를 상품경제로 한 걸음 크게 내딛게 만들었다. 그러나 장거정의 세금개혁은 명나라말기의 상품경제를 지나치게 발전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명나라의 멸망을 불러왔다. 다만 장거정의 세금개혁이전에 농민은 수확한 양식으로 세금을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세제개혁이후에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반드시 시장에 내다 팔고, 돈으로 바꾼 다음 돈으로 세금을 내야 했다. 그리고 식량을 수확하는 시기나 식량을 내다 파는 시기는 동일하다. 그래서 모두 식량을 팔려고 내놓는다. 그렇게 되니 식량상인들은 가격을 후려친다. 이는 농민들이 다시 한번 착취를 당하는 꼴이 되게 만들었다. 우회적으로 세금을 늘인 셈이다. 강남과 같은 지방은 그래도 낫다. 왜냐하며 이곳에는 은자가 많고, 경제의 외향성이 커서, 그래도 이윤이 큰 경제작물을 돈으로 바꾸면 된다. 그러나 서북지방같이 양식이 부족하고 경제가 내향적인 지방은 아주 심각하다. 농민은 현금화하기 위하여 더욱 크게 착취를 당하게 된다. 그래서 재난 이외에 농민의거가 왜 서북에서 폭발했는지를 보면 이것이 아주 중요한 원인이었다. 게다가 앞에 말한 바와 같이, 장거정의 세제개혁은 경제작물을 심도록 장려했고, 양식을 심도록 장려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대명왕조의 멸망은 이성량도 아니고, 만력제, 천계제, 숭정제, 위충현도 아니고, 오히려 장거정때문이다. 그는 대명왕조의 제일능신이다. 역사는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농업을 기초로 하는 국가에서, 상업이 과도하게 발전하면, 제국의 자원을 다 써버리게 되고, 결국은 제국이 무너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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