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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진)

진헌공(秦獻公)의 정치지혜

by 중은우시 2018. 12. 1.

글: 연비(燕飛)



진헌공의 이야기는 중국판 '사자왕'이라고 할 수 있다. 전기적인 색채가 넘친다. 그의 인생은 사자왕보다 훨씬 재미있다.

진헌공이 어떻게 맨손으로 일어났는지, 그리고 어떻게 인생의 최고봉에 올라 칭패하게 되었는지를 보기로 한다. 이 과정에서 무슨 교훈이 있는지도 살펴보겠다.


지금까지 법가를 반대하거나 법가에 찬동하거나, 그들은 모두 상앙변법은 진나라가 더 이상 변법을 하지 않으면 망할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상앙변법은 일거에 진나라가 쇠퇴하는 운명을 막아내고, 이때부터 진나라는 승리의 길을 걸어, 최종적으로 육국을 멸하고 천하를 통일해서 대진제국을 열었다고 본다.


그러나 진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첫째, 상앙변법전에 진나라는 약하지 않았다.

둘째, 상앙변법의 주요내용은 이십여년전에 진헌공이 일찌감치 추진한 것이다. 진헌공이 누구인가? 그는 상앙을 기용한 진효공(秦孝公)의 아버지이다.

셋째, 상앙변법전에, 진헌공은 이미 묵가(墨家)의 도움으로 변법도강했으며 패주의 칭호를 얻었고, 철저히 진나라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바꾸어 말하자면, 진나라의 운명을 바꾼 것은 상앙이 아니고, 진효공이 아니라, 진효공의 아버지인 진헌공이라는 것이다.

먼저, 첫째 이슈부터 보자. 상앙변법전이 진나라는 약하지 않았다.


우리는 사료들을 살펴 보기로 하자. 상앙변법 몇년전의 진나라에 관한 기록이다:

기원전366년, 진헌공19년,

진나라는 한, 위를 낙양에서 격패시킨다(<육국년표>)

(위혜왕) 4년, 한나라와 택양에서 만난다. 성무를 막았으나, 진나라에 패배한다. (<위세가>)

기원전365년, 진헌공20년

진나라는 위나라이 소량(少梁)을 공격한다. 조나라가 위나라를 도우러 온다. 그리하여 겨우 진나라의 공세를 막아낼 수 있었다.(<전국사>)


기원전364년, 진헌공21년

진나라는 석문에서 위나라군대를 격패시키고, 6만을 참수한다. 천자가 축하한다. (<진본기>, <육국연표>)

진헌공이 삼진(三晋)의 군대를 석문에서 패배시키고, 6만을 참수한다. 왕은 보불지복(黼黻之服)을 하사한다. (<주기>)


기원전362년, 진헌공23년

진헌공이 서장국(庶長國)을 보내어 위나라 소량을 정벌하고, 그 태자, 좌(痤)를 포로로 잡는다.


상앙이 진효공과 변법을 추진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359년이다. 즉, 상앙변법전 7년동안 진나라는 연속하여 4년간 전쟁을 일으켰다. 그것도 모두 수동적으로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출격하는 것이었다. 위나라는 전혀 진나라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위, 조, 한의 삼국연합군이 진나라군대에 의해 6만명이나 참수헌다.

석문지전에 관하여 <진본기>에 기록이 있고, <주기>에도 기록이 있다. 두 기록의 내용은 비슷하다. 그저 <주기>가 더욱 상세할 뿐이다. 주천자가 진헌공에게 축하했다는 것을 적었을 뿐아니라, 그가 진헌공백(伯)의 예복을 내렸다. '백'은 여기에서 첫째라는 뜻이다. 이는 주천자가 정식으로 진나라를 제후국의 패주로 인정한 것을 의미한다. 진헌공은 흑, 백, 청색의 꽃무늬를 수놓은 화려한 의복을 입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이미 보통의 강대함이 아니라. 패주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진나라가 약하다고 할 수 있을까?


저명한 역사학자 하병예(何炳隸) 선생은 공개강좌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진헌공이전의 반세기동안 진나라는 약하고 위나라는 강했다. 이것은 그저 상대적인 말이다. 진헌공 말련에 위나라와 석문에서 전쟁을 벌이는데, 6만을 참수한다. 천자가 축하하고 보불의 옷을 내린다. 개선한 후 진나라는 최강의 침략국으로 변신한다.


즉, 진나라는 생사존망의 중요한 시기에, 웅재대략의 진헌공이 나타난 것이다. 그는 일거에 진나라가 쇠퇴하는 운명을 바꿔어 놓는다.

진헌공은 당연히 성이 영()이다. 이름은 외자로 연(連)이다. 그의 부친은 진령공이다. 그는 평안하게 성장하여 어른이 되어 부친의 왕위를 이어받으면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그를 공자련(公子連)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예상외에도, 그의 부친이 죽은 후, 갑자기 숙조부(叔祖父)가 나타나서 왕위를 빼앗아 간다. 겨우 9살된 공자련은 하서의 하곡일대로 유배간다. 나중에 그는 위나라로 망명하고, 29년에 이르는 망명생활을 하게 된다.

위나라에서의 이 29년간의 망명생활에서 두 가지 사건은 이 진나라 망명태자를 크게 자극한다.


하나는 위나라의 위문후(魏文侯)가 이회(悝), 오기(吳起), 서문표(西門豹)등을 기용하여 변법을 하여 국력이 강성해지고, 중원의 패주가 되었다.

둘은 갈수록 강성해지는 위나라는 항상 진나라를 못살게 굴었고, 오기가 지휘하여, 위나라군대는 자주 진나라군대를 공격한다. 그리고 진나라의 하서 땅을 케이크 잘라가듯이 모조리 잘라가버렸다.


조국의 내란과 쇠퇴, 위나라의 발전이 선명하게 대비되었다. 이는 공자련을 크게 자극한다. 생각해보라. 그는 어려서부터 후계자로 길러졌다. 진나라에 대하여 당연히 사명감이 있었다. 이 망명태자는 군왕의 자리를 빼앗아, 위나라와 같이 변법을 행하여 나라를 강하게 만들겠다는 바램이 생긴다. 그는 한편으로 위나라의 변법경험을 학습하고, 다른 한편으로 진나라 국내의 정세를 주시하며, 기회를 기다렸다.


이 망명태자는 위나라에서 기다리고 기다리며 거의 30년이 되었다. 마침내 기회가 온다. 그의 숙조부인 진간공(秦簡公)이 사망한 후, 진혜공(秦惠公)이 즉위한다. 진혜공이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진출공(秦出公)이 즉위한다. 진출공은 공자련의 당제이다. 그가 즉위할 때 나이는 겨우 2살이고, 그의 모친이 조정을 주재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여인들은 왕왕 친정사람들에 의지하는 면이 있다. 이 진출공의 모친도 에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외척과 환관을 좋아한다. 그리하여 진나라의 공실성원과 많은 대신들이 불만을 갖게 된다. 게다가 국사가 혼란하고, 하서까지 위나라에 빠앗겼다. 진나라사람들은 능력있는 군주가 나타나서 그들을 이끌고 이 엉망인 상황을 바꿔주기를 희망했다.


공자련은 시기가 되었다고 봤다. 더 이상 기다릴 수는 없었다. 원래 그가 앉았어야 할 군주의 자리를 빼앗아 와야 한다. 그리하여 진나라를 진흥시켜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돌아갈 것인가? 어떻게 군주의 자리를 빼앗을 것인가? 빈손으로 돌아가서 진출공에게 내놓으라고 말하기만 하면 될까?

그것은 죽기를 자초하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누군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망명한 태자가 아닌가. 정치적인 밑천이 있다. 태자의 신분으로 돌아가서 소리치면, 분명히 구름처럼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겠는가


정치투쟁이 그렇게 쉬울 수 있겠는가. 망명태자라고 하더라도 어려서 집을 떠나서 나이가 든 후에 돌아가는데. 게다가 진나라를 떠나 있은지 30년이다. 누가 너를 알아보겠는가. 예를 들어, 너희 집이 원래 회사를 가지고 있었는데, 나중에 파산했고, 수십년이 지난 후에 돌연 원래 회사의 로비로 가서 소리높여 여기가 내 것이다라고 외치며 회사를 돌려달라고 해도 누가 신경이나 쓰겠는가. 아마 두번 소리치기도 전에 경비에게 끌려나가게 될 것이다.


이때의 공자련은 이미 사십세에 가까웠다. 자연히 그렇게 멍청하지 않았다. 다만 아무리 총명해도 소용이 없다. 기회는 왔지만, 실력은 야심을 따라가지 못한다. 맨돈으로 어떻게 창업을 한단 말인가?

이때, 한 사람이 나타난다. 그는 공자련을 도와서 왕위에 올려주겠다고 한다. 그가 누구인가? 바로 위나라의 군왕인 위무후(魏武侯)이다.


당시 위나라와 진나라는 지연정치의 이유로 대대로 원수였다. 양국간에는 전쟁이 멈춘 적이 없다. 위나라 사람의 눈에, 어찌되었건 망명태자도 태자이다. 이는 정치적 신분이다. 하나의 명분이다. 일단 시기가 성숙되면, 그 명분이 작용을 발휘할 수도 있다.

진나라의 혼란한 국면에 대하여 공자련도 기회라고 여긴다. 위무후도 기회라고 여긴다. 삼십년이나 길러온 카드를 이럴 때 쓰지 않으면 죽은 패인 것이다.


그래서 위무후는 공자련에게 말한다. 너를 도와줄테니 왕위를 빼앗아라. 그러나 조건이 있다. 공자련이 즉위한 후에 반드시 위나라와 친선을 유지해야 한다.

위나라의 당시 실력으로 공자련을 도와 군주의 자리에 오르게 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위무후는 공자련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괴뢰정권을 세우려는 것이다.


공자련은 받아들여야할 것인가.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것인가?

만일 받아들이지 않으면, 괴뢰는 될 수 없다고 말하면, 아마도 영원히 왕위에 오를 기회는 잃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만일 위무후의 조건을 거절하면, 그냥 돕지 않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살신지화를 불러오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공자련은 위무후에 있어서 이미 아무런 가치가 없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이상 먹여살릴 필요가 없지 않은가. 납세자들의 돈을 낭비할 뿐일테니까.


만일 받아들이면, 군주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겠지만, 얼마나 오래 앉아 있을 수 있겠느냐는 문제가 남는다. 왜 그런가? 적국의 지지를 받아서 군주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 이전에 너를 지지하고, 너를 동정했던 사람들이 아마도 더 이상 너를 지지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 골치아픈 일은, 네가 위나라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는데, 위나라가 다시 영토를 내놓으라고 하면, 내줄 것인가 말 것인가? 위나라가 만일 다른 나라를 공격하면서 너에게 병사도 내놓고 식량도 내놓으라고 하면, 내놓을 것인가 말 것인가. 만일 그렇게 한다면 진나라백성들에게는 뭐라고 말할 것인가. 결국, 통치기초가 아주 약해진다. 그러면 결말은 아마도 위나라의 주구로 살다가 제거되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련은 이 곤경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그는 먼저 위무후의 호의를 거절한다. 귀국하여 왕위를 차지하는 일을 가지고 위나라를 번거롭게 하지 않겠다. 나 자신의 심으로 하겠다. 그 후에 위나라가 여러해동안 돌봐준 것에 감사를 표시하고, 자신이 일단 군주에 오르면, 위무후이 재위기간동안 진나라는 절대로 위나라와 적이 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우리는 공자련의 대답을 분석해보기로 하자.

첫째, 입장표명이다. 괴뢰는 되지 않겠다. 이것은 원칙이다. 원칙적인 문제는 양보할 수 없다. 그의 태도는 선명했고, 전혀 모호하지 않았다. 위무후의 도움을 거절한 것은 그가 예지로우며,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 후에 그는 약속한다. 위무후의 재위기간동안 진나라는 절대로 위나라와 적이 되지 않겠다고. 이는 그가 인정을 알고, 세상을 아는 것이다. 위무후의 체면도 세워주고 그가 배은망덕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표명한다. 위무후는 비록 만족스럽지 않지만, 그에게 손을 쓸 수는 없었다. 공자련이 이렇게 약속한 것은 한편으로 위무후의 나이가 이미 상당히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그가 돌아가서 진나라의 군주가 되고 난 후에 원래 내정을 살펴야 하므로, 진나라가 강대해진 후에나 위나라와 싸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공자련은 정말 노련한 인물이고, 일을 생각하는데 아주 심모원려하다.


다만, 이렇게 하는 것은 아주 모험적이다. 그는 아주 험난한 길을 선택한 것이다. 만일 위무후의 도움을 받아들였다면 거의 가서 즉위만 하면 된다. 십중팔구는 문제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거절했다. 이는 여러가지 골치를 가져다 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공자련은 아주 멍청하다고. 정치를 모른다고. 정치라는 것은 흑백논리가 아니다. 수완을 쓸 줄 알아야 한다. 정치적인 지혜가 있어야 한다. 먼저 거짓으로 응락하여, 먼저 군왕이 된 후에 다시 보면 될 것아니냐. 그 조건은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것이니까. 그냥 무시해되 된다. 하물며 위나라는 적이고, 적에게 무슨 신의를 지키느냐. 식시무자위준걸(識時務者爲俊傑)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때는 그때고 이때는 이때이다. 나중의 상앙, 그리고 후세의 많은 정객들은 확실히 그렇게 했다. 말을 바꾸기를 손바닥 뒤집듯이 했다. 이것도 정치적 지혜이다.


진헌공은 멍청하지 않다. 그런데 왜 이렇게 했을까?


그것은 선진(先秦)의 사람, 더욱 정확하게 말해서, 법가와 같은 마키아벨리즘에 의하여 도덕관 가치관이 파괴되지 전의 사람들은 일을 고려할 때 성공하는 것 이외에 또  한가지 요소를 고려했다: 그것은 바로 신의와 도의이다. 특히 당시의 군왕, 그리고 귀족은 먼저 어려서부터 받은 교육에서 신의와 도의를 지키도록 요구한다. 만일 신용을 지키지 않고 말을 바꾸면 천하인들의 비웃음을 산다. 거기에는 상응한 댓가가 따른다. 공자련이 만일 승락하고나서 다시 약속을 어기면, 위나라는 이를 근거로 출병할 수 있다. 심지어 다른 제후국들과 연합하여 군대를 일으켜 진헌공에게 죄를 물으러 올 수 있다.


공자련이 바로 정치가이다.

정치가는 당연히 정치적 지혜와 정치적 수단을 가져야 한다. 권모술수도 알아야 한다. 다만 정치가의 우선 덕목은 책임질 줄 알아야 하고, 정치적 신념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정치신념을 위하여 댓가를 치를 수 있어야 한다. 실패하더라도, 원칙은 버리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정치가와 정객의 구별이다.


위무후는 공자련의 말을 듣고, 비록 불쾌했지만, 그렇다고 화를 내지는 못한다. 이미 공자련을 도와주겠다고 했으니 수수방관하기도 미안하다. 군대는 보낼 수 없다. 그러니 금은보화를 보낸다. 공자련이 이번에는 사양하지 않고 모두 받아들인다. 확실히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기록에 따르면, 385년, 진나라의 서장(庶長), 진나라의 총리에 상당하는 인물이 하서에서 공자련을 영접한다. 진출공의 모친은 이를 알고 난 후, 급히 군대를 보낸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이 군대의 장수는 이미 매수되어서, 거꾸로 근 40년간 망명했던 태자를 옹립하고 진나라의 도성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진출공과 그의 모친을 죽여버린다.


망명태자가 마침내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그가 바로 진헌공이다.

이 진헌공은 신과 같은 인물이다. 즉위후 짧은 20년동안, 대내적으로 변법도강하여, 철저히 진나라의 군약신강(君弱臣强)국면을 타파하고, 대외적으로 하서를 수복하는 전쟁을 일으킨다. 위나라를 거의 반격하기 어려울 정도로 만들어 버린다. 마지막으로 주천자로부터 패주의 칭호와 예복을 하사받는다. 이렇게 그는 패주의 이상을 실현한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이를 해냈는가?

사마천은 "천조(天助)'라고 여겼다. 즉 하늘이 도왔다는 말이다.

"진나라는 처음에 소국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여러 중원국가들이 그를 손님으로 여기고, 융적으로 보았다. 진헌공 이후에 제후들을 호령한다...마치 하늘이 도운 것같다."


하늘이 도왔다고 하지만 실제는 인모(人謀)이다. 사람이 꾸민 것이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필자는 당초 진헌공이 막 즉위했을 때의 일부 문헌기록을 보고, 진심으로 그를 위해 식은 땀을 흘렸다. 그가 직면한 국면은 실제로 너무 복잡했고, 너무 위험했다.


진헌공이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서장과 일부 장수들의 옹립때문이다. 그의 통치기초는 아주 박약했다. 국내의 원래 권력이 있는 귀족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왕이니 말을 듣지 않으면 죽여버릴 것인가? 정치가 그렇게 간단하겠는가. 막 돌아왔고 아직 의자에 제대로 앉지도 못했는데, 이런 복잡한 정치국면과 여러 갈래의 정치세력 앞에서 어찌 마음대로 죽일 수 있겠는가. 귀족과 권신이 옹립했는데, 앞의 군주도 죽였는데, 네가 말을 듣지 않으면 너의 운명도 앞의 진혜공과 같아질 수 있는 것이다.


만일 평범한 인물이었다면, 그냥 그렇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저 회장자리를 유지하면서 몇년간 영화부귀를 누리면 된다. 그렇게 살다가 죽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을 가진 사람은 그렇게 운명의 장난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진헌공이 천신만고끝에 돌아온 것은 바로 진나라를 진흥시키기 위해서이다.

진헌공은 왕위에 앉은 후 전후로 3가지 일을 한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일을 하는 순서는 완전히 그가 웅재대략의 군주임을 보여준다. 아주 지혜롭고, 과감하고, 담량이 있다.


1. 정략결혼


진헌공은 즉위한 후 바로 가장 실력있는 귀족의 여자를 취한다. 정략결혼의 방식으로 귀족세력을 단결시키고, 그들의 지지를 얻어낸다.


2. 역양(櫟陽)천도


진헌공이 즉위한 다음 해, 도성을 역양(지금의 섬서성 서안 염량구 무둔향). 만일, 지리를 잘 배웠다면 분명히 놀랄 것이다. 그리고 진헌공의 담럄과 지혜에 탄복핡 것이다. 왜냐하면 역양은 이미 하서의 변에 있기 때문이다. 진나라사람들이 그들의 도성에 올라서면, 바로 위나라를 볼 수 있다.

진헌공이 역양천도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작용을 했다:

첫째, 결심을 표명하고, 정치강령을 내놓은 것이다. 

도성을 위나라에서 이렇게 가까운 곳으로 옮기다니, 이는 국민들에게 하서땅을 빼앗아 오겠다는 것을 나타내고, 진나라의 굳은 결심을 알리는 것이다. 이를 통해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내고자 했다. 이 조치로 일거에 민심이 응집된다.


둘째, 귀족의 통제를 벗어난다.

진나라의 구 도성은 진나라의 거의 모든 귀족들이 모여 있었다. 귀족들은 전통을 존중하고, 사상이 비교적 보수적이다. 게다가 진헌공은 위나라에서 변법을 배웠다. 모두 귀족들의 기득권을 건드리게 된다. 일단 변법을 추진하면, 귀족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날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은 지난해에 네가 왕위에 오르도록 도와주지 않았는가. 그들의 말을 들을 것인가. 말 것인가.

진헌공은 정말 지혜로웠다. 그는 듣는 것도 듣지 않는 것도 모두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았다. 이들 벌집은 가급적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도망치는 것이다. 그 골치아픈 벌집은 와두고, 너희는 서쪽에서 놀고 있어라. 나는 동쪽으로 가겠다. 이는 정말 대단한 수법이다. 떠나면서 명분은 하서를 수복하고, 진나라를 진흥시키겠다는 것이니, 반대하기도 어렵다.

진헌공의 이 수법은 바둑의 고수와 같다.

바둑을 두는 사람이면 알 것이다. 쌍방이 일단 중앙에서 사활이 걸리면, 쉽게 교착상태에 이른다는 것을. 대마 두 마리가 서로 얽혀 있게 되면 수준이 낮은 바둑꾼은 왕왕 이때 죽기살기로 덤빈다. 그러다가 양패구상한다. 그러나 진정한 고수는 상대방의 손따라 두지 않고, 가볍게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 바둑판의 다른 곳에 돌을 놓는다. 그리하여 새로운 국면을 개척한다. 그후 상대방의 부지불식간에 그가 만든 국면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졌는지도 모르게 져 있을 것이다. 진헌공의 이 수와 정말 비슷하지 않은가?


셋째, 시장을 만들어, 경제를 발전시킨다.

사마천은 역양의 지세를 "북으로는 견융과 마주하고, 동으로는 삼진과 통한다"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역양의 지리위치는 아주 좋다. 교통요충지에 있는 것이다 .진헌공이 역양으로 천도한 후, 이곳에 시장을 세운다. 고심경영하여, 지나라경제는 크게 발전하게 된다.


넷째, 전선사령부

역양의 특수한 위치로 일단 위나라와 전쟁이 일어나면, 이곳은 군사도시로 되고, 전선지휘소가 된다. 전국의 군사력을 동원하거나, 물자조달을 하거나, 군대를 동쪽으로 진군시키거나, 전략적으로 모두 기선을 제압할 수 있다.


진헌공은 이런 일련의 작업을 통하여, 국가권력을 확실히 손에 쥔다. 그리고 그는 위나라에 있을 때부터 하고 싶었던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신정(新政)을 추진하는 것이다.


3. 신정추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변법을 추진하는 것은 자고로 아주 어렵다는 것을. 왜 어려운가? 항상 일부 사람들의 이익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진헌공이 군공을 장려하는 신정을 추진해서, 평민중에서 군공이 있는 사람은 국가주요직위에 발탁하는 정책을 썼다. 귀족들은 이 신정을 반대한다. 왜먀하면 그들이나 그들 자제의 수중에 있던 직위의 일부분을 떼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헌공의 변법은 왜 순조롭게 추진되었을까?

첫째, 그는 비교적 온건하게 추진했고, 신축성있는 조치를 취한다.

예를 들어, 일국양제를 하기도 했다. 일부 신정은 우선 동부에 시행한다. 새로운 도성의 주변에서만 시행한다. 서부귀족이 모여있는 곳에서는 추진하지 않는다.


둘째, 그는 비교적 각 방면의 이익의 균형을 잘 맞춰주었다.

그리고 한 가지가 아주 중요한데, 바로 국계민생에 관련되는 것은 상업이건 농업이건, 수공업이건 균형있게 발전시킨다. 나중의 상앙처럼 그저 전쟁만 벌이고, 상업발전을 제한한 것과 다르다.


기실 상앙변법의 많은 내용들 예를 들어 군공장려, 군현제추진, 호적관리, 정전제폐지등은 모두 진헌공이 일찌기 추진한 신정이다. 그리고 아주 좋은 효과를 낸다. 진헌공이 변법은 지나라의 중요한 순간에, 철저히 국면을 전환시키고, 진나라의 국운을 바꾼다. 그의 아들 진효공이건, 상앙이건, 모두 개창자가 아니다. 상앙은 진헌공의 기초 위에서 더욱 엄격하고 폭력적으로 변법을 추진한 것이다.


그래서, 어느 방면으로 보더라도, 진헌공은 연구해볼 가치가 있다.


한편으로, 그는 어느 정도 선진의 풍도를 지니고 있었다. 어느 정도 신의를 지키고, 도의를 지켰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진취적이고, 변법을 추진했다. 변법추진도 상앙처럼 극단적으로 백성의 이익은 신경쓰지 않으면서, 국가폭력을 일관되게 믿거나, 심지어 국가층면에서 정직, 자애, 선량등 인류의 가장 기본적인 문명이념까지 제거하려 하지 않았다.


상앙변법은 진나라의 최종승리로 지나치게 높이 평가되어 왔다. 이런 결과론적인 견해는 문제가 있다. 전쟁의 승부는 여러 방면의 요인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기실 변법의 개창성을 따지자면 이회는 상앙보다 훨씬 더 연구가치가 있다. 변법의 전략성을 따진다면 진헌공을 더 배워야 한다. 반대로 상앙변법은 특히 우민, 약민, 천민, 빈민, 피민등 정책이다. 그리고 아주 잔혹하고 냉혹한 조치이다. 그리하여 많은 역사교훈을 남겼고, 우리가 경계하고 반성해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