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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함풍제)

함풍제의 신체를 망가뜨린 3가지 취미

by 중은우시 2019. 6. 19.

글: 노하(老何)


애신각라 혁저(奕詝)는 청나라의 9번째 황제로 역사에서는 '함풍제(咸豊帝)'라 칭한다. 1851년, 함풍제가 즉위하니 나이 21살이었다. 그는 11년간 재위했으며, 31살의 나이로 사망한다. 함풍제가 죽은 후, 남겨진 젊은 예허나라씨(서태후)는 나이어린 장남 재순(載淳)을 보좌하여 황위를 승계받게 되니, 대청의 혼란에 화근이 심어지게 된 것이다.


청나라황제중 함풍제는 31살에 사망했으니, 단명황제라 할 수 있다. 공자가 말하기를 "삼십이립(三十而立)"이다. 즉 고대에 30여세는 한창 나이인 것이다. 그런데 함풍제는 가장 좋은 나이에 죽어버린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일까/


설마 유전자가 좋지 않아서일까? 그의 부친 도광제는 69세까지 살았다. 나이 50이 넘어서도 아들을 낳았다. 그의 할아버지인 가경제는 61세까지 살았다. 그의 증조부인 건륭제는 89세까지 살았고, 중국에서 가장 장수한 황제중 하나이다. 이를 보면, 함풍제의 유전자는 좋은 편이고, 가족병력도 없다.


기실, 함풍제는 조산아였다. 그는 도광제의 넷짜아들이고, 앞의 3명의 형은 요절한다. 특히 큰형인 혁강(奕綱)은 그가 태어나기 두달전에 죽었다. 황위계승자가 없어졌으므로 누구든지 아들을 낳으면 황위계승자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전해지는 바로는 당시 궁안에 여러명이 비빈들이 임신을 해 있었다. 함풍제의 모친은 하루빨리 함풍제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 계속하여 출산촉진약을 먹었다. 가장 빨리 도광제의 황자를 낳겠다는 생각이었다 .결국 함풍제가 앞서서 출생한다. 그러나 조산으로 인하여 몸이 쇠약했고, 여러서부터 약을 달고 살았다.


신체가 약했으므로 함풍제는 말을 타고 활을 쏘는데는 뛰어나지 못했다. 어려서 말에서 떨어지기 때지 해서 다리를 다친다. 그리하여 평생 다리를 절게 된다.


만일 신체가 약하기만 했다면 정성껏 보살폈다면 그래도 31살에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약을 달고 살면서도 장수한 사례는 너무나 많다. 그러나, 함풍제는 신체가 허약한 것 이외에 3가지 기호가 있었다. 그것이야 말로 단명하게 만든 주요 원인이 된다.


사서기록에 따르면, 함풍제는 술꾼이다. 그리고 주량이 없는 술꾼이다. 매일 반드시 술을 마셨는데, 마시기만 하면 대취한다. 더욱 엉망인 것은 술주정이 심했다.


함풍제의 술주정은 때리고 욕하는 것이다. 곁에서 모시던 궁녀나 태감들이 가장 먼저 당한다. 술기운이 오르면 함풍제는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고 자주 궁녀, 태감들을 두들겨 팼다. 다음 날 술이 깨면, 그는 후회하며, 자기에게 욕을 먹고, 얻어맞은 궁녀, 태감들에게 하사품을 내리곤 했다. 이를 통해 그들이 받은 신체적 고통을 위로하는 것이다.


술을 많이 마시면 몸이 상하고, 화를 많이 내면 몸이 상한다. 술을 마신 함풍제는 희노무상했고, 그의 병약한 신체는 이를 버틸 수가 없었다.


두번째는 아편전쟁때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북경을 쳐들어오자 함풍제는 비빈을 데리고 승덕의 피서산장으로 피난간다. 당시 국난이 닥쳤는데도 함풍제는 여전히 여색을 밝혔고, 하루종일 비빈들과 어울렸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당시 산서에 조씨 과부가 있었는데, 아주 예쁘게 생겼다. 그리고 삼촌금련의 전족을 한 소각(小脚)을 가지고 있었다. 함풍제는 그 말을 듣고는 참지 못하고 사람을 시켜 조씨를 궁중으로 불러들인다. 함풍제는 보자마자 바로 빠져서, 조씨를 총애한다.


병약한 몸으로 여색에 지나치게 빠지니, 이는 독약을 마시고 주마가편하면서 염라대왕을 만나러 가는 격이었다.


청나라때는 대량의 아편이 중국으로 들어왔다. 영국은 인도에서 아편을 대량 재배한 후, 건륭시기부터 계속하여 광주를 통해 중국으로 수출한다. 도광제때 아편의 판매량은 급증하여, 대량의 백은이 유출된다. 그리하여 청나라의 백성들은 신체상황이 날로 악화되었다.


1839년 임칙서는 호문에서 금연운동을 시작한다. 청정부는 아편을 막기 위하여 제1차 아편전쟁을 벌인다. 함풍제때는 다시 제2차 아편전쟁이 발발한다.


아편은 이미 청나라정부의 암적인 존재였다. 다만 함풍제 본인도 아편에 중독된다. 그리하여 중국최초의 아편쟁이 황제가 된다.


술도 좋아하고, 여색도 밝히고, 아편까지 하는데 원래 몸도 약했다. 그러니 함풍제의 생명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함풍제가 재위한 기간동안, 국가는 동란에 빠졌다. 즉위초기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는데 그가 죽을 때까지도 평정되지 못했다. 그후 다시 수년동안 이어진 '제2차 아편전쟁'이 발발한다. 경성이 점령당하고, 황제는 도망쳐야 했다. 일련의 혼란은 함풍제의 몸이 더욱 버티기 힘들게 만든다. 결국 그의 몸음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쓰러진다.


1861년, 함풍제는 승덕의 피서산장에서 사망한다. 그는 나이어린 아들과 젊은 처인 예허나라씨를 남겼을 뿐이다. 이제 중국의 운명은 이 두 모자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