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왕개새(王開璽) 북경사범대학 역사학원 교수
역사학자들은 이런 말을 많이 한다. 재원(載垣), 단화(端華), 숙순등은 북경에 있을 때, 함풍제가 중시한 대신들이다. 함풍제를 따라 열하(熱河)로 도망친 후에는 다른 왕공대신들도 없고하니, 재원등 그 중에서도 특히 숙순이 함풍제의 신뢰를 한몸에 받는다. 이런 주장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완전히 맞는 것도 아니다.
함풍제는 자신의 몸이 아직 건강할 때, 조정의 여러 문무대신들에 대하여나, 아니면 재원, 숙순등에 대하여나 모두 충붕한 자신감이 있었다. 비록 시시때때로 경계하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으로는 모두 신임하고 중용했다.
함풍제가 숙순등을 중시한 이유는 주로 두 가지 층면의 고려때문이다.
첫째, 함풍제는 숙순등과 국내외의 여러가지 문제를 대하는 태도가 기본적으로 일치했다. 대외문제에 있어서, 그들의 사상은 비교적 보수적이었다. 가볍게 대외적으로 굴북하고 싶지도 않고, 또한 실행가능한 대응방법을 내놓지도 못했다. 국내문제에 있어서, 그들은 모두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해야한다는데는 의지가 굳건했고, 일정한 정도로 증국번(曾國藩), 이홍장(李鴻章)등 한족관료 및 상군(湘軍, 증국번을 중심으로 한 호남성 출신의 군사집단), 회군(淮軍, 이홍장을 중심으로 한 안휘성 출신의 군사집단)등에 의존했다.
둘째, 관료사회의 여러가지 폐단을 제거하고, 관료사회의 기풍을 바로잡고, 깨끗하게 만드는데 있어서, 그들은 모두 엄격하고 과단성있는 법집행을 주장했다. 난세를 다스리는데는 중형이 최고라는 것이다. 함풍제는 숙순등이 권력을 농단하는 행위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청나라조정이 그저 형식적으로 관례에 따르기만 하고, 일처리는 미루고 향락에만 빠져 있는데, 오히려 숙순처럼 박력있고 과감하게 일처리를 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숙순등은 기껏해야 권신(權臣)일 뿐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충성을 다한다. 그들의 목적도 대청강산을 위한 것이다. 자신이 정치의 큰 방향과 개혁의 키만 틀어쥐고 있으면, 숙순등에게 맡겨서 처리하게 할 수 있다. 비록 숙순은 엄격하고 성격이 발호하기는 해도, 절대로 간신은 아니다. 최소한 지금은 그렇지 않다. 하물며 조정의 상하를 둘러보아도, 확실히 숙순등보다 더욱 적합한 인물은 없다.
함풍제는 비록 재지가 평범하고, 정치적으로도 뛰어나지 않지만, 황권을 지키는 이 근본문제에서는 절대로 멍청하지 않았다. 그의 신체상황이 점점 더 나빠지면서, 부득이 자신의 사후문제를 고민해야 했다. 숙순등에 대하여는 한편으로 이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방비하는 태도를 취한다.
함풍제는 임종때 두 가지 유지(諭旨)를 내린다.
첫번째 유지는 재순(載淳)을 황태자로 삼는다는 것이다.
두번째 유지는 재원, 단화, 경수(景壽), 숙순, 목음(穆蔭), 광원(匡源), 두한(杜澣), 초우영(焦祐瀛)의 팔대신으로 하여금 "진심보필(盡心輔弼), 찬양일체정무(贊襄一切政務)"(마음을 다하여 보필하고, 일체의 정무를 도우라)하도록 한다.
두번째 유지의 인사 어레인지는 당시 청나라조정의 여러 대신들간의 구체적인 상황으로 보았을 때 크게 문제있는 것은 아니다. 더더구나 원칙에서 잘못된 것은 없다. 기본적으로 "친친존현(親親尊賢)"(자신과 가까운 사람과 친하게 지내고, 현명한 사람은 존경한다)의 조상의 법제에 들어맞는다. 함풍제의 재원, 단화, 숙순등에 대한 신뢰와 중시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함풍제가 숙순등으로 하여금 자신의 아들을 보좌하게 한 것에는 그가 보기에 최소한 3가지 유리한 점이 있었다.
첫째, 숙순등은 일처리가 과감할 뿐아니라, 체면을 봐주지도 않는다. 법가의 일처리 풍모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나라를 다스리고 보좌를 한 경험이 있다. 그들은 국가기구가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할 수 있을 뿐아니라, 외국의 침략에 저항할 것이며, 국내의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할 것이다.
둘째, 숙순등은 과감하게 할 일은 하기 때문에 의귀비(懿貴妃, 나중의 서태후) 및 공친왕(恭親王) 혁흔(奕訢)등을 막아낼 수 있고, 자신의 아들이 황위에 안정적으로 앉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셋째, 숙순등은 비록 청나라조정의 중신이지만, 황통의 혈연으로 보면, 그들은 황제의 먼 친척이 되거나, 혹은 황실과 혈연관계가 없는 외성대신이다. 결국 그들은 대청의 신하이고 노재(奴才)일 뿐이다. 일반적인 상황하에서, 이들은 비록 대청 조정의 대권을 잠시 장악하더라도, 황권에 근본적인 위협이 되지는 않는다. 그들이 만일 감히 황권에 도전한다면, 왕질종친들이 들고 일어나서 반대할 뿐만 아니라, 여러 조정중신들도 들고 일어나서 반대할 것이다. 즉 일개 어사나 언관이 그들을 탄핵하는 글만 하나 올려도, 그들은 쫓겨날 수밖에 없다. 즉, 숙순등은 나라를 다스리는 능력에서도 절대로 공친왕 혁흔에 뒤지지 않는다. 그들이 어린 황제를 진심으로 보좌한다면, 장래 어린황제가 정권을 장악할 가능성이 공친왕 혁흔에게 맡겼을 때보다 훨씬 높은 것이다.
이 팔대신보정제도를 보면, 함풍제가 숙순등을 중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중용은 중용이고, 방비를 하지 않을 수는 없다.
함풍제가 숙순등 팔대신을 어떻게 방비했는지를 보자. 재원, 단화, 경수, 숙순, 목음, 광원, 두한, 초우영의 팔대신이 공동으로 보정하는 제도의 관련 규정은 연구를 해볼 가치가 있다.
1643년 9월 21일(숭덕 팔년 팔월 초구일), 청나라의 두번째 황제인 홍타이시(皇太極)이 사망한 후, 순치제가 어린 나이로 즉위한다. 당시 예진왕 도르곤, 정친왕 지르하랑의 두 친왕이 보정(輔政)을 한다. 다만 나중에 도르곤 1명이 대권을 독점하는 현상이 나타난 후, "황부(皇父)"라고까지 칭하는 대신의 정권독점국면이 만들어진다.
1661년 2월 5일(순치십팔년 정월 초칠일), 순치제가 죽은 후, 효장태황태후는 도르곤의 권력독점의 교훈을 받아서, 강희제를 위하여 보정대신을 선택할 때, 숫자를 배로 늘인다. 소니, 수커하사, 어비롱, 아오바이의 4대신보정을 시행한다. 그리하여 상호견제할 수 있도록 한다. 어느 한 대신이 권력을 독점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이제 함풍제가 어린 황제 재순을 위하여 보정대신을 선택하면서 다시 숫자를 배로 늘였다. 이렇게 하는 것은 숙순등 8대신으로 하여금 상호견제하게 하면서, 그들의 정치경험과 집단지혜를 빌리고자 한 것이다. 공동으로 어린 황제를 보좌하여 군국대사를 처리하게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의귀비와 공친왕 혁흔을 권력핵심에서 배제하는 것ㅇ고 그들이 일상적인 정무처리에 관여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함풍제가 설계한 팔대신공동보정제도 하에서, 숙순등은 비록 일체의 일상정무처리에 참여할 수 있었지만, 그 성격은 단지 "찬양(贊襄)"이다. "찬(贊)"이라는 것은 찬조, 도움이라는 뜻이다. "양(襄)"이라는 것은 양조(襄助), 양리(襄理)라는 뜻이다. 그들의 근본직책은 단지 어린황제를 '마음을 다하여 보필하는 것'일 뿐이다. 이는 함풍제의 후사안배에서 뛰어난 점이다.
함풍제가 확정한 황후와 소황제 검인(鈐印)제도는 함풍제가 대권이 숙순등에게 장악되지 못하게 막는 또 하나의 후사안배로 뛰어난 점이다. 함풍제는 임종때, 자신이 평소에 아주 좋아하는 두 개의 사인(私印, 개인도장) "어상(御償)"과 "동도당(同道堂)"을 각각 황후 뉴후루씨와 아들 재순에게 준다. 그리고 이렇게 규정한다. 무릇 황제의 유지는 첫머리 시작부분에 반드시 '어상'인을 찍어야 한다. 즉 인기(印起)이다. 그리고 유지의 끝나는 부분에는 반드시 '동도당'인을 찍어야 한다. 소위 인흘(印訖)이다. 이는 다른 목적을 가진 사람이 개인적인 내용을 유지의 앞이나 뒤에 추가하여 장난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이 두개의 도장이 찍힌 것이야말로 황제가 인정한 유지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효력이 없다. 황후와 황상에게 최고, 최후의 재가권과 부결권을 부여한 것이다.
함풍제는 스스로 팔대신에게 정무를 찬양하고, 공동으로 보좌할 권력을 부여하여, 팔대신이 상호 견제하고 어느 한 친왕이나 대신이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막았으며, 다시 효과적으로 당시의 의귀비, 나중의 서태후의 정치간여를 배제하도록 하였다. 동시에 다시 효과적으로 공친왕 혁흔이 어린 황제의 황위에 위협이 되지 않도록 했다. 그리고 황후와 어린황제의 검인제도는 다시 팔대신이 뭉쳐서 권력을 농단하지 못하게 막았고, 숙순등이 천자를 끼고 마음대로 횡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근본적으로 최고권력은 자신의 아들에게 장악되어 있도록 만든 것이다. 결론적으로, 함풍제가 보기에, 그의 이 후사안배는 실제로 권력의 균형을 이루면서, 완전무결한 제도안배였다.
그러나 사실은 증명한다. 함풍제의 이 안배는 고명하지 못했다. 숙순등이 청나라조정내부의 권력투쟁이라는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하였을 뿐아니라, 청나라말기정국의 거대한 변동을 몰고온다. 그리하여 서태후가 47년에 이르는 태후수렴청정이 가능하도록 만든다.
함풍제는 비록 '동도당' 인장을 아들 재순에게 주었지만, 당시 재순은 겨우 6살에 불과했다. 적절하게 보관할 수 없을 뿐아니라, 효과적으로 이 도장을 사용할 수도 없었다.다. 그저 그의 생모인 의귀비에게 보관을 맡길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의귀비는 순조롭게 아들을 대신하여 검인을 할 권한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 아들을 대신하여 검인을 할 권한을 잘 운용하기만 하면, 황제와 같은 무상의 권력을 가질 수 있었다. 과연, 나중에 서태후는 일련의 투쟁과 정변을 통하여, 마침내 직접 나서서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당시의 인물인 왕개운(王愷運)이 <독행요(獨行謠)>애서 이렇게 말한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조제중고명(祖制重顧命) 강사부좌주(姜姒不佐周)
수여동도당(誰與同道堂) 번괴수렴소(翻怪垂簾疏)
....
기상개동치(祺祥改同治) 어좌병파리(御座屛波離)
'함풍지사(咸豊之死)'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북수경년필로장(北狩經年蹕路長) 정호궁검암난양(鼎湖弓劍黯灤陽)
양궁야반피봉사(兩宮夜半披封事) 옥새친검동도당(玉璽親鈐同道堂)
나중에 서태후의 수령청정의 국면에 대하여, 함풍제는 중대한 책임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함풍제는 숙순등에게도 책임이 있다. 숙순은 불행히도 황권정치투쟁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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