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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함풍제)

함풍제의 풍류사건

by 중은우시 2009. 6. 25.

글: 유병광(劉秉光)

 

함풍황제의 집권시기는 두 개의 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집권전반기에는 관료사회를 정돈하고, 현명한 인재를 등용하고, 과감하게 일처리를 하였으며, 진취적인 측면이 있었다; 집권후반기에는 자신감을 잃고, 회피하고 숨기를 좋아하며, 스스로 타락하여, 상당히 퇴폐적이 되었다.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사나운 기세를 보고, 태평천국의 난이 요원의 불꽃처럼 번져가는 것을 보면서, 대청강산의 해가 저무는 상황하에서 함풍제는 스스로를 마비시키고, 성색견마(聲色犬馬, 가무, 여색, 개기르기, 말타기를 가리키는데, 고대 통치계급의 음란한 생활을 가리킴)의 일생을 보냈다.

 

함풍제의 후반기는 호색과 풍류로 역사상 그 이름이 높다. 그의 이력서를 들춰보면, 춘약, 방중술같은 류의 글이 곳곳에 나타난다. 그의 후궁으로 눈을 돌려보면, "사춘(四春)", 조과부(曹寡婦)와 같은 여인들이 부지기수이다. 여색에 빠진 것을 제외하고도 함풍제는 희극의 팬이었다. 각종 희극을 즐겼는데, 위로는 국수인 경극(京劇)부터, 아래로는 지방극인 곤곡(昆曲)까지 두루 걸쳤다. 이와 관련하여 대신들과 서로 질투한 풍류사건도 발생한다.

 

당시 희극계에서 활약하던 배우가 한 사람 있었는데, 이름이 주련분(朱蓮芬)이다. 주련분이라는 이름은 여성스럽지만, 그는 분명히 남자였다. 주련분의 본명은 주복수(朱福壽)로 소주에서 태어났고, 유명한 곤단(昆旦) 주복희(朱福喜)의 친동생이다. 그는 곤곡에 조예가 깊어서 나중에 동광십삼절(同光十三絶)의 하나로 꼽힌다. 그는 피부가 하얗고, 몸매가 날씬하고, 자태가 풍류적이며 성격이 여성스러워서 적지 않은 관리나 부호들의 "압사유(狎邪遊)"의 대상인물이 되었다.

 

"압사유"라 함은 청나라때 관리들이 상공(相公, 남자기생)과 어울려노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적지 않은 관리들의 성취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청나라정부의 관리들은 기녀(妓女)와 어울릴 수 없도록 하였으므로, 겉으로 드러나게 기녀들 만나는 것은 없었지만, 숨어서 상공과 어울리는 일은 많아졌다. 그리하여 200여년간 '남풍(男風)'이 연면히 이어져 내려오게 된다. <<홍루몽>>을 보면, 설반이 유상련을 좋아하고, 충순왕이 장옥함을 좋아하는 것으로 나온다. 이것은 바로 조설근이 당시의 문란한 풍기를 대담하게 드러낸 것이다.

 

여러 배우들 중에 으뜸으로서, 주련분은 적지 않은 관리들의 특별한 '보살핌'을 받아왔다. 그중 광록사경 반조음(潘祖蔭)과 어사 육무종(陸懋宗)이 가장 대표적이었다. 반조음은 학식이 넓고, 주연분과 서로 사랑했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부부처럼 행동했다. 육무종은 음률에 능통했고, 경성에서 유명하였으며, 주련분과 교분이 밀접했다. 함풍제는 주련분을 한번 보자마자 부지불식간에 '용양(龍陽, 호모)'의 근성이 발동했다. 주련분으로서야 항거할 방법이 없었다. 그저 함풍제의 희생물이 되는 수 밖에는...

 

주련분이 입궁을 하게 되었다. 반조음은 그다지 문제가 없었는데, 육무종에게 있어서는 생활에서 큰 공백이 생긴 것같았다. 육무종은 주련분을 생각하면서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못했다. 아주 우울해지고 성격이 날카로워졌다. 주련분을 다시 자신의 곁으로 되돌아오게 하고자, 육무종은 자신의 직위를 이용하여, 황상에게 간언을 한다. 그는 궁이 사치스럽게 되면 얼마나 큰 해가 되는지를 역설하면서, 궁안의 배우들을 해산시켜, 비용을 절감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상소문에서 그는 수많은 경전과 근거를 인용하여, 수천자에 이르는 글이 되었다. 이는 함사사영(含沙射影, 몰래 숨어서 사람을 공격하거나 비난함)의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함풍제는 상소문을 보자 바로 육무종의 속뜻을 알아차렸다. 그는 웃으면서 좌우의 신하들에게 말했다: "육노인이 질투하는군." 바로 그 상소문에 다음과 같이 답신을 적었다: "개가 뼈다귀를 뜯는데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면 어찌 밉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 어사가 한 남자로서 황제와 감히 애인을 다투다니, 그리고 황제도 한 남자를 얻기 위하여 다른 대신과 다투다니. 함풍제는 이렇게 화당했다. 조정대신도 이렇게 형편없었다. 이러한 사회기풍하에서 청나라가 얼마나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