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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함풍제)

함풍제는 임종전 십일간 권력분배방안을 어떻게 설계했는가?

by 중은우시 2012. 9. 18.

글: 역사상나사사(歷史上那些事)

 

황위계승자문제에 대하여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함풍제는 아들이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즉, 서태후(자희태후)가 낳은 재순(즉, 나중의 동치제)뿐이다. 그러므로, 옹정제때 만든 비밀건저(秘密建儲)도 실시할 필요성과 가능성이 없었다. 함풍은 조부인 가경제처럼 후계자를 편안하게 뽑을 수도 없었고, 부친 도광제처럼 후계자문제를 놓고 고민해야할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함풍제가 죽을 때 31살이고, 자손을 많이 낳지 못했다. 이는 아마도 대청제국이 이미 말로를 걷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함풍제가 당시 고려한 주요한 문제는 아들 재순이 당시 겨우 6살이었고, 최소한 10년은 지나야 친정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앞으로 10년간 어떻게 대청황권을 자신의 아들의 손에 장악되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지 않게 할 수 있을까라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함풍제는 임종전 수십일동안 반복해서 고민하고, 이리저리 생각한다. 그는 조정의 주요 정치역량을 자신의 머리 속에 정리해보았다. 그리고 전전반측하며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함풍제가 먼저 생각한 것은 자신의 여섯째 동생 혁흔이다. 혁흔은 어려서부터 함풍제와 함께 자랐고, 함께 공부하고 함께 놀았다. 일찌기 허물없이 지내던 형제였다. 다만, 함풍은 황제가 되고, 혁흔은 결국 친왕에 봉해졌다.

 

함풍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이 동생은 능력이 있다는 것을 능력은 자신보다 훨씬 뛰어났다. 만일 그가 황숙의 명의로 소황제를 보정(輔政)한다면, 명분에도 들어맞는다. 그리고 대청제국을 잘 이끌고 나가서 난관을 넘길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때 함풍제는 다시 옛날 이야기가 떠오른다. 청나라의 제2대황제 청태종이 사망한 후, 순치제가 어린 나이로 즉위한다. 황숙 도르곤은 섭정왕이 된 후 대권을 독점하고, 감히 '황부'라 칭한다. 효장태후가 배후에서 조종하지 않았다면, 순치의 강산은 하마터면 도르곤 자손의 가산으로 바뀔 뻔했다.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 함풍은 마음 속으로 잘 알았다. 자신의 이 아들은 어려서부터 놀기를 좋아한다. 그가 비록 유아두 정도는 아니더라도 절대로 강희제처럼 될 가능성은 없었다. 그렇다면 보정의 권한을 누구에게 맡기는 것이 좋을까? 안심할 수 있을까? 함풍제는 병세가 위급할 때, 혁흔이 북경에서 국면을 주재하고 있었다. 그는 함풍의 신체가 갈수록 나빠지고 몇번이나 토혈을 했다는 말을 듣고는 마음이 조급해진다. 그래서 여러번 글을 올려 열하로 가서 함풍제를 병문안하겠다고 청한다.

 

혁흔이 이렇게 급하게 열하로 가려했던 이유는 형제가의 수족지정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미래정국의 안배에 대한 관심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혁흔도 알고 있었다. 함풍제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는 것을. 그도 함풍이 죽기 전에 형님을 만나고, 형제간의 앙금을 풀고 싶었다. 그래서 평생후회를 남기지 않으려 했다.

 

혁흔의 주절을 보고 함풍제도 만감이 교차했다. 그는 혁흔과 함께 보낸 어린 시절이 떠올랐고, 옛날 후계자의 자리를 놓고 경쟁하던 난감했던 시기와 자신이 즉위한 후 형제간의 시기와 저어도 떠올렸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함풍제는 고개를 흔든다. 혁흔은 먼저 부결되었다. 그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앉아서, 친필로 혁흔에게 회신을 쓴다: 작년 가을에 헤어진 후, 순식간에 반년여가 흘렀다. 나도 시시때때로 너와 손을 잡고 얘기하던 것을 떠올리면 마음의 안위를 얻는다. 그러나, 최근 나의 몸은 실로 좋지 않다. 자주 기침이 멈추지를 않고, 어떤 때는 토혈을 하기도 한다. 나는 너와 만나게 되면 옛 일이 생각나서 공연히 슬픈 생각이 더 들까봐 걱정된다(徒增傷感). 그것은 나의 병에 실로 좋은 게 없다. 현재 열하까지 와서 보고해야할 급한 일은 없으니, 너는 북경에 남아서 일을 잘 처리해라. 내 병이 나아져서 돌아간 후에 다시 형제의 정을 나누자.

 

'도증상감'이라는 네 글자에서 함풍제 당시 심경의 처량함을 느낄 수 있다. 아마도 강한 척하려는 함풍제는 자신의 친동생, 옛날의 경쟁자가 자신의 임종시의 쇠약한 모습을 보지 않기를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황위경쟁에서 함풍은 승리자이다. 그러나 하늘은 공평했다. 황제인 그는 오래 살지 못하고 곧 세상을 떠나야 한다. 그러나 황권을 놓친 혁흔은 여전히 몸이 건강했고, 세월을 잘 보내고 있었다. 형제의 관심에 함풍은 감동했지만, 미래의 권력분배에서 혁흔은 물러나야 한다. 왜냐하면 이때의 함풍은 이미 미래의 보정인선을 마쳤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이친왕(怡親王) 재원(載垣), 정친왕(鄭親王) 단화(端華), 호부상서 숙순(肅順)등을 우두머리로 하는 8대신의 팀을 짜놓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함풍의 총애를 받았고, 그들은 혁흔과 정치적 견해가 달랐다. 일단 혁흔이 개입하면, 정국의 안정에 불리할 뿐아니라, 오히려 발목을 잡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황족종친을 배제하고, 외성을 기용하여 보정대신으로 삼은 것은 청나라역사상 선례가 있다. 순치가 죽은 후 도르곤이 권력을 찬탈하려 했던 교훈을 살려, 소니, 수커하사, 어비롱, 아오바이의 4명을 보정대신으로 삼은 바 있다. 황족종친이 대권을 빼앗아가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서였다. 다만, 강희가 어렸을 때, 아오바이는 마찬가지로 발호하고 권력을 전횡한다. 만일 소년강희가 영명신무하여 아오바이를 붙잡지 않았다면, 청나라의 강산은 아마도 위기에 처했을 것이다. 역사의 교훈은 반드시 배워야 한다. 위협이 가장 큰 공친왕 혁흔을 배제한 후, 함풍제는 강희연간의 4대보정의 인원수를 배로 늘인다. 그리하여 8대신보정으로 한다. 다만, 이 안배가 황권의 안정을 보장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하여 함풍은 다시 하나의 교묘한 안배를 한다. 그것은 바로 검인(鈐印)제도였다. 소위 '검인제도'는 함풍이 임종때, 자신이 평소에 가장 아끼던 두 개의 사인이 있는데, 하나는 "어상(御賞)"이고 다른 하나는 "동도당(同道堂)"이다. 각각 황후 뉴구루씨와 아들 재순에게 주어, 황권의 상징으로 삼는다(재순이 어리므로, 서태후는 순조롭게 검인의 책무를 대리하게 된다).

 

검인제도에서는 황제가 어려서 친정할 수 없을 때, 황제의 명의로 하달되는 유지는 첫머리에 반드시 '어상'을 날인하고(즉 소위 印起), 유지의 말미에는 반드시 '동도당'을 날인해야 했다(즉 소위 印訖). 이런 유지만이 유효하다. 이 두 개의 도장을 날인하지 않은 유지는 무효이다. 함풍의 8대신보정과 검인제도의 안배는 조정의 운영을 양궁태후의 대정(代政)과 8대신 보정을 평행하게 두는 체제였다. 

 

함풍의 구상에서, 팔대신보정은 이 8명의 고명대신의 정치경험과 집단지혜를 발휘하도록 하는 것과 그들이 서로간에 견제와 감독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에 양궁태후의 대정제도는 황후와 재순(실제로는 서태후)가 검인제도를 이용하여 팔대신을 방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양궁태후는 일상적인 정무처리와 군국대사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필요가 없다. 지자천려, 필유일실이라고, 함풍제가 임종시에 정교하게 설계한 권력분배방안은 기실 여러 방면의 견제로 권력의 균형을 이루고 황권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안배는 보기에는 교묘하게 균형을 맞춘 것같고, 전혀 빈틈이 없어보이지만, 그 중의 중요한 모순을 보지 못했다. 그것은 바로 평행체제중의 협력문제이다. 권력의 집행자(8대신)과 황권의 상징(양궁태후)가 미래 조정에서 잘 협력할 것인가? 소위 보정팔대신은 이친왕 재원, 정친왕 단화, 호부상서 숙순, 긜고 부마인 경수(景壽), 군기대신 목음(穆蔭), 광원(匡源), 두한(杜翰), 초우영(焦祐瀛)의 8명의 대신이다. 당시 상황으로 보면, 재원,단화,경수,숙순의 4사람은 황실의 먼 종친이다. 재원,단화는 양조의 노신이고, 두 사람은 도광임종시의 고명대신이기도 하다. 그리고 함풍을 보필한 공로가 있다. 경수는 도광제의 여섯째 사위이다. 목음, 광원, 두한, 초우영의 4명은 원래 군기대신이다. 이 안배는 아주 정상적이다. 이 8명의 대신중 재원의 지위가 가장 높았다. 그이 조상은 강희제의 십삼아거 윤상(胤祥)이다.

 

윤상은 옹정제때 가장 신임을 받았다. 그래서 세습할 수 있는 '철모자왕'이 된다. 재원은 윤상의 오대손이다. 도광5년(1825년) 재원이 이친왕을 세습한 후, 도광의 중시를 받고 그가 서거할 때 고명대신에 임명된다. 함풍제때도 재원은 지위가 높고 권력도 컸다. 그리고 계속하여 함풍의 중용을 받는다.

 

그러나, 함풍이 열하에서 용어과천(龍馭過天)할 때, 재원은 이미 나이가 많았다. 팔대신이 비록 그를 높이 받들었지만, 구체적인 업무는 당시 연부역강한 숙순이 핵심이었다. 숙순은 역사상 그에 관한 이야기가 적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를 모멸하거나 중상하는 말이다. 야사에 따르면, 숙순은 종실출신으로, 그의 대에 이르러 이미 가세가 기울었다고 한다. 젊었을 때 숙순은 몸집이 크고 용모가 당당했으나 제대로 하는 일은 없었고, 길거리에서 닭싸움이나 하고 개나 몰고 다녔으며 무뢰한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하루는 숙순의 종실날중 묵유가 길거리에서 숙순을 만났는데, 양가죽옷(좋은 옷이 아님)을 걸치고 개를 끌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을 본다. 종실인 관계로, 묵유는 어떤 때는 그를 접대해주곤 했다. 숙순의 이런 모습을 보고는 묻는다: "너의 이 모습은 스스로 어떤 사람으로 보인다고 생각하느냐?" 숙순은 거침없이 말했다: "무뢰배이다" 묵유는 화를 낸다. "무뢰배가 자랑스러우냐?" 숙순이 말한다. "아무데도 의지할 데가 없어서 무뢰배가 된 것이다." 묵유는 그 말을 듣고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는 방법을 생각해내서 숙순에게 하급관직을 내리게 한다. 누가 알았으랴. 숙순은 관료사회에 들어간 후 속속 승진하여 그 기세를 어쩔 수가 없을 정도가 되고, 묵유보다 훨씬 높게 올라갔다.

 

사실상, 숙순은 만주 상남기 사람(서태후와 같은 기)이다. 그는 1816년에 출생했고, 정친왕 우르군공어의 6째아들이다. 가족은 계속하여 종실귀족이었고, 세습제인 8명의 '철모자왕'중 하나이다. 정친왕 단화가 바로 그의 형이다. 숙순은 능력이 뛰어났고, 개성도 강했다. 그는 어전대신, 총관내무부대신, 호부상서, 협판대학사등의 직위를 지낸다. 함풍의 신뢰를 깊이 받았다. 조정에서 숙순은 그의 형인 정친왕 단화와 서로 도우며 일세를 풍미한다.

 

재미있는 점은 숙순의 득세는 마침 공친왕 혁흔과 대응한다는 것이다. 혁흔이 실의에 빠졌을 때가 숙순이 득세한 때이다. 혁흔과 숙순은 모두 능력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갈등은 아주 깊었다. 예를 들어 대외사무에서, 숙순은 강경파이고, 혁흔은 주화파이다. 두 사람의 정견은 정반대였다. 1857년, 영국프랑스연합군이 광주를 침입했을 때, 숙순과 혁흔은 함풍제의 면전에서 서로 싸운다. 혁흔은 주화(主和)를 숙순은 주전(主戰)을 주장한다. 두 사람은 어전에서 싸웠으나 결론을 내지 못한다.

 

1859년, 숙순은 러시아사신과 북경에서 담판하는 중에, 비준을 받지 않고 교환한 <아이훈조약>을 탁자위에 집어던지며, "한 장의 공문(空文)이다,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숙순은 확실히 관료체질이다. 그는 젊었을 때 글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그의 기억력은 아주 좋았다. 사람과 한번 만나기만 하면, 평생 다른 사람의 모습을 기억했다. 한가지 일을 처리한 후, 몇년이 지나고 그 안의 내용을 다 기억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그의 능력을 종합해서 평가한 적이 있다 그는 "재주는 얕으나 멀리보는 식견이 있고, 학문은 모자라나 견식이 있다(才淺而遠見, 學疏而有識)." 들은 것이 많고, 기억력이 좋으며, 일처리가 과감했다. 아쉬운 점이라면, 권력을 독점하기를 너무 좋아했다는 것이다. 그에게서 칭찬할 점이라면, 국내에서 전란이 빈번한 때, 숙순은 한족과 만주족을 평등하게 기용하도록 했고, 한인을 중용했다. 당시 태평군을 진압하는 청나라군대의 장수는 호림익, 증국번, 좌종당 등이었다. 숙순은 조정에서 그들에게 큰 도움을 준다. 재원, 단화, 숙순등이 북경에 있을 때도 함풍의 중용을 받고, 열하에 따라간 후에도 이들은 함풍의 신뢰와 총애를 계속 받았다.

 

특히 숙순은 함풍제가 그를 호부상서 겸 협판대학사로 임명하여 내무부의 도장 서신, 열쇠등을 관장하게 했고, 영시위내대신으로 임명해서, 열하행궁으 일체의 일을 책임지게 했다. 바꾸어 말하면, 숙순은 당시 모든 군국대사에 참여했을 뿐아니라, 황실사무도 그가 처리했다. 열하행궁의 전권대총관인 셈이다. 함풍제는 최종적으로 숙순등을 어린 황제의 보정으로 선임한다. 원인은 세 가지이다: 하나, 숙순등은 함풍제와 정치적 견해가 비슷했다. 그들은 대내적 대외적으로 문제를 보는 시각이 일치했다. 예를 들어, 대내적으로 한족을 기용하고 상군을 중용하자고 주장한다. 대외적으로 그들은 보수적인 생각으로 강경파의 입장이고 외교에 능하지 못했다. 둘, 함풍은 숙순등이 일처리가 과감하고 정리에 얽매이지 않아서 그들의 능력과 지혜라면 대청조정의 정상운영과 태평군의 난을 진압하는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보았다. 셋, 숙순등은 비록 지위가 높지만, 혈통적으로 보면, 그들은 먼 종실이거나, 혹은 활실과 근본적으로 관계가 없다. 즉, 이들은 대권을 장악하더라도, 어린 황제에게 중대한 위협이 될 수는 없다. 이상이 바로 함풍제가 최종적으로 자신의 친동생 공친왕 혁흔을 포기하고, 재원, 단화, 숙순등을 뽑아서 보정하게 한 원인이다. 함풍은 아마도 만일 혁흔이 보정대신에 들어오면, 황권에 위협이 될 뿐아니라, 양파의 정견차이로 내부소모가 계속되어 결과적으로 조정의 기강이 문란해지고 대청왕조가 더욱 위기에 처할 것으로 생각했던 것같다.

 

함풍제가 열하로 간 후, 신체가 허약하여, 숙순을 가장 중시한다. 자주 그를 만나서 함풍은 심지어 숙순이 평소에 평복을 입고 언제든지 행궁을 출입할 수 있도록 허락해준다. 나중에 숙순은 비빈들도 회피하지 않을 지경에 처한다. 이것은 궁내의 일부 사람을 분노하게 만든다. 내궁의 주인인 황후 뉴구루씨는 숙순이 임의로 행궁을 출입하는 거동에 극도의 불만을 지니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는 후궁에 외신이 함부로 드나들 수 없다는 조상의 법도를 어기는 것일 뿐아니라, 남녀유별의 전통도덕과 예의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다만, 뉴구루씨는 사람이 평화롭고 선량했다. 그녀는 불만을 지나치게 표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달랐다. 그는 바로 서태후이다.

 

서태후와 숙순의 갈등은 유래가 길다. 일찌기 북경에 있을 때, 숙순은 함풍제에 대하여 서태후가 상소문에 답을 쓰고, 조정에 간섭하는 것에 대하여 불만을 표시한 바 있다. 서태후도 그 말을 들었을 것이다. 함풍일행이 열하로 도망가는 도중에, 준비부족으로 서태후가 당시 탄 것은 아주 엉망인 수레였다. 그녀는 가는 길이 울퉁불퉁하여 고생을 겪는다. 그녀는 할 수 없이 세번이나 숙순에게 좋은 수레로 바꾸어 달라고 눈물로 호소한다. 그러나 도망가는 도중에 산은 높고 길은 멀었다. 숙순이 더 좋은 수레를 구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귀찮아져서 서태후에게 면박을 준다: "황제도 고생을 견디는데, 네가 무슨 자격으로 이것내놔라 저것내놔라 하느냐?" 이 말은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이다. 서태후는 이로 인하여 가슴에 원한을 품는다. 숙순은 그러나 개의치 않았다. 열하에 도착한 후, 생활조건은 북경의 황궁과는 차이가 컸다. 행궁대총관인 숙순은 후궁의 생활을 주도면밀하게 보살피지 못했고, '공급이 아주 박했다' 동태후, 서태후를 포함한 후궁들은 숙순에 대하여 원망이 모두 컸다. 더욱 화가 나는 일은, 서태후가 한번은 함풍제에게 "간석(看席)"을 없애 비용을 줄이자고 건의한 바 있다(간석은 황제가 식사를 할 때, 보기만 하고 먹지는 않는 연석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합리적인 건의는 숙순의 반대에 부닥친다. 이유는 비상시기에 황제의 존엄을 유지하는 것은 정치의 안정을 나타내는 것이고, '간석'을 철거하면 쉽게 외부인들에게 황제가 놀랐고 국면이 혼란함을 나타내는 것이 될 수 있다. 궁내의 대우와 이전의 은원으로 서태후가 어찌 화를 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칠월 십칠일, 즉 함풍제가 서거한 당일, 후궁사무를 관리하는 경사방이 어지를 전하는데, '황후'(뉴구루씨.동태후)는 '황태후'로 하고, '황태자'는 '황상'으로 한다. 그리고 황태후(뉴구루씨. 동태후), 임황태비(琳皇太妃), 숙중당(숙순), 황상이 영전에 나가 술을 올리라고 한다. 이 어지는 재미있다. 통상적인 이치대로라면, 대행황제가 사망한 후, 황태자가 새로 황상에 오르고, 황후는 황태후가 된다. 이것은 이해가 쉽다. 관건은 재순이 황후소생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의 생모 즉 서태후(당시 의귀비)의 명호를 어떻게 바꿀 것이냐의 문제이다.

 

명나라이전에, 황제가 죽은 후, 새로 즉위한 황제는 황후를 황태후로 앉히고, 새로 즉위한 황제가 황후소생이 아니고 다른 비빈의 소생이면, 신황제의 황제는 그저 태비(太妃)가 되었지, 태후는 되지 못했다. 그러나, 서출인 명신종 주익균이 즉위한 후, 수보 장거정은 신황제와 그 생모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황후를 '인성황태후'로 하고, 주익균의 생모인 이귀비를 '자성황태후'로 한다. 이때부터 양궁병존의 선례가 생긴 것이다. 청나라의 제도는 양궁병존의 제도를 강화하는데, 원인은 청나라황제의 대부분이 황후소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청나라규정에 따르면, 후임황제가 즉위한 후, 생모는 살아있든 아니든 모두 황태후로 봉해진다. 예를 들어, 청나라 강희제가 즉위한 후, 원 황후는 '인헌황태후'가 되고, 자신의 생모는 '자화황태후'로 올린다. 옹정제가 즉위한 후에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생모인 덕비 우야씨를 '황태후'로 올린다. 그러므로, 황후 뉴구루씨를 황태후로 하는 동시에, 마찬가지로 재순의 생모인 의귀지(자희)도 황해투로 삼아야 조상의 법제에 맞는다.

 

그러나 당시 열하에서 책임을 맡고 있던 숙순등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음 날에야 비로소 의귀비를 황태후로 한다고 선포한다. 이게 업무상의 소홀인지, 아니면 고의로 의귀비를 폄하하여 신분차별을 드러내려는 것인지는 잘 알 수가 없다. 이로 인하여 함풍이 설계한 권력균형의 팔대신보정체제는 처음부터 위기를 맞이한다. 이것은 그후 '신유정변'의 화근을 심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