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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무술

손록당(孫祿堂): 청말민초 전설의 무림고수

by 중은우시 2019. 6. 9.

글: 종가수(宗家秀)




서양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돌아온 친구가 그의 쿵후를 견식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마지못해 동의한다. 말을 하는데, 방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식은 땀을 흘리고,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모두 견디기 힘들다고 말한다. 순식간에, 손록당이 묻는다: '이제 좀 좋아졌습니까?" 모두 숨을 내쉬며 좋아졌다고 대답한다.

손록당이 말했다: "이것은 기의 작용이다. 물리학에서는 어떻게 설명하는지 모르겠다."

사람들이 경탄해 마지 않고, 연이어 말한다: "신인(神人), 신인!"  아무도 그 이치를 설명하지 못했다.


손록당은 이름이 복전(福全)이고 호는 함재(涵齎)이다. 함풍제때 태어났다(1860년 12월생). 하북 완현(完縣(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성격은 묵직하며 강인했다. 부친은 정칠품 문림랑(文林郞)이며 남에게 베풀어주기를 좋아해 원근에 명성이 높았다. 손록당은 7살때 사숙(私塾, 서당)에 들어갔고, 권사(拳師)에게 권법을 배운다.


손록당은 형의권(形意拳), 팔괘장(八卦章), 태극권(太極拳)의 명인이었다. 스스로 손씨태극권(孫氏太極拳)을 창안했다. 그의 별호는 "호두소보(虎頭少保)", "천하제일수(天下第一手)"이다. 일생동안 무수한 사람들과 겨루었으나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


손록당의 동작은 아주 영민하여, 사람들은 "새활후(賽活猴)"라고 불렀다. 그의 경공(輕功)은 특히 절세적이었다. 손록당이 곽운심(郭雲深)을 따라다닐 때, 곽운심은 자주 말을 타고 달렸다. 손록당은 기를 끌어올려 공중으로 뛰어올라 손으로 말의 꼬리를 잡고, 달렸는데, 하루에 백리를 달려도, 전혀 피로해 하지 않았다. 고삐풀린 말이 마구 달려가면, 손록당은 두 다리를 세워서 제비가 날아서 처마에 내리듯이 청정점수(蜻蜓點水, 잠자리가 물 위를 찍듯이)처럼 말등에 달라붙는다. 곽운심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한번은 손록당이 외출을 하는데, 한 인력거꾼이 그를 데려다 준 후에 돈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이번에 저는 눈을 새로 떴습니다. 선생을 태우고 언덕길을 올라가는데, 빈 인력거를 끌고 갈 때보다 가벼웠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인력거 안에 사람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뒤돌아보니 선생이 그 안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비로소 선생이 등운가무(騰雲駕霧)의 쿵후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가 어찌 당신같은 신선의 돈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손록당은 그러나 전혀 내색하지 않고 말한다: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분명히 당신이 오늘 밥을 든든하게 먹어서 힘이 넘쳤기 때문일 것입니다."


손록당의 내공은 아주 심후했다. 상해의 한 무술명가모임에서, 누군가 손록당에게 절기를 보여달라고 청한다. 손록당은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아서, 건물의 한 담장 아래로 걸어가서, 몸을 틀어서(왼쪽으로 혹은 오른쪽으로) 담장에 붙이고, 담장에 붙은 쪽의 발의 바깥쪽과 같은 쪽의 어깨를 담장에 붙이고, 동시에 또 다른 발을 들었다. 그렇게 한 상태에서 십여초를 버틴 후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왔다. 보기에 간단해 보이는 동작이지만 세상에서 해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손록당은 이렇게 설명했다. 이것은 내공을 통해 중심(重心)을 이동시켜야 해낼 수 있다고.


민국시대 신문계와 민간에서는 일찌기 손록당이 답설무흔(踏雪無痕) 즉 눈을 밟아도 발자국이 남지 않고, 자금성을 날아서 뛰어넘고, 몸이 공중에 뜨는 기적같은 일을 보여주었다고. 당시 상해에서 권법의 이치를 설명하는 자리에서 이런 현상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이것은 바로 신기(神氣)를 운용한 것이고, 중점은 심성을 수양하는 것이다. 심성을 닦지 않으면 헛되이 정신을 쏟는 것이다." "이 기술을 익히는 자는 기술로 다른 사람을 이기려 해서는 안된다. 지사인인(志士仁人)이 호연지기를 기르른 것은 뜻이 그러하기 때문에 힘이 따라가는 것이다. 그런 것이다."


일대이 무학종사로서 손록당은 고심막측한 쿵후가 신화는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절대로 간단하게 근골을 열심히 익힌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더구나 수시로 내보여주고 다른 사람과 싸우는데 쓸 수는 없는 것이다.


손록당은 그의 자녀에게 이렇게 가르친 바 있다: "무술을 익히려면 먼저 반드시 무덕(武德)을 중시해야 한다. 무덕은 두 가지 방면으로 나뉜다. 하나는 구덕(口德)이고 다른 하나는 수덕(手德)이다." "덕으로 다른 사람을 따르게 하고, 이치로 다른 사람을 설득해야 한다. 힘으로 다른 사람을 굴복시키려 해서는 안된다. 그래야 사람들이 말뿐만 아니라 마음 속으로 따르게 되는 것이다."


팔괘장의 종사인 동해천(董海川)의 득의제자인 정정화(程庭華)가 손록당을 만났다. 그는 자신의 쿵후가 손록당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나서서 팔괘장을 전수해 주며 그와 결의형제를 맺는다. 손록당은 재삼 사절하고, 정정화를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한다. 정정화는 할 수 없이 그를 제자로 받아들인다.


보정의 무술, 씨름명인 평경일(平敬一)이 일찌기 손록당과 씨름을 해보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두 사람이 손을 맞잡자 마자, 평경일이 손록당을 등으로 업어치기 했다.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이어서, 평경일이 아무리 해도 손록당은 평경일의 등에 편안히 누워있고, 내다꽂을 수가 없었다. 평경일은 할 수 없이 졌다고 인정한다. 손록당은 무술로 친구를 사귀었다. 백년동안 실전에서 패배한 적이 없다. 그러나 사람을 다치게 한 적은 거의 없었다. 설사 외국인이 도전하더라도, 손록당은 왕왕 손속에 사정을 봐주곤 했었다.


당시의 <세계일보>에는 이렇게 기록한 것이 있다. 민국8,9년때, 일본의 저명한 유도가 사가가키(阪垣)가 손록당과 힘을 겨루었다. 두 사람은 카페티 위에 누워서, 사가가키가 두 다리로 손록당의 두 발을 끼우고, 두 손으로 손록당의 왼쪽 팔을 꺽었다. "내가 두 손에 힘을 주기만 하면, 너의 왼쪽 팔을 부러져 버릴 것이다." 손록당이 웃으면서 대답한다: "나의 생각으로 너를 제압할 수 있다." 사가가키가 무슨 뜻인지 생각할 틈도 없이 두 팔에 힘을 주었는데, 힘을 주자마자 전신에 중대한 타격을 입은 것처럼 굴러서 2장여 떨어진 방구석에 쳐박힌다.


사가가키는 수치심이 분노로 바뀌어 일어난 후, 돌연 권총을 끄집어 내어 손록당을 겨누었다. 손록당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사가가키는 반드시 맞힐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총성이 울리자, 사가가키의 등뒤에서 손록당의 웃음소리가 들인다. 관중들도 크게 웃는다. 사가가키는 기가 죽어서 고개를 숙인다. 며칠 후, 사가가키는 사람을 통해 손록당에게 제자가 되어 무술을 배우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손록당은 시종 동의하지 않았다.


1930년, 손록당은 이미 70고령이었다. 5명의 일본무사가 손록당에게 도전한다. 손록당은 이렇게 말한다: "서로 주먹질을 하면 다치기 쉽다. 너희 5명이 내 몸을 눌러라. 셋을 셀 때까지 내가 일어나지 못하면 내가 진 것으로 치겠다." 일본문사는 손록당의 내공이 대단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전혀 경시하지 않고, 5명이 손록당을 꼭 누르고 있었다. 곁에 있는 사람이 수를 세었다. "하나, 둘..." 셋이라는 말이 입에서 나오기도 전에

5명은 돌연 튕겨나가 1장여 밖에 쓰러진다. 손록당은 급히 몸을 일으켜 앞으로 걸어가서 그들에게 다치지는 않았는지 물어본다.


현대인이 알고 있기로는 격투 과정에서 상대방이 배패시키고 상대방을 두들겨 패는 무술이야말로 진짜 쿵후라고 생각한다. 기실 정반대이다. 진정한 전통중국무술은 일종의 수행이다. 또한 전통중화문화가 잉태하고 양육한 것이다. 한자의 "무(武)"자는 그 자체로 "지과(止戈)라는 뜻을 담고 있다. 고수가 진짜 빛나는 것은 왕왕 일상에서 처신하는 도행에서 체현된다.


일찌기, 손록당은 소림을 방문하고, 무당을 찾아가고, 아미에 오른 적이 있다. 일찌기 여러 이인도사들을 만나서 수심양기(修心養氣)의 법을 배웠다. 나중에 사천에서 한 고승으로부터 <역경>을 수개월간 배운다. 문무를 겸비했던 손록당은 무관을 열고, 국술을 가르쳤을 뿐아니라, <형의권학>, <팔괘권학>, <권의술진>, <팔괘검학>등 무학서적을 저술한다. 그의 서예, 학문과 수양은 아주 높다. 한림출신인 서세창(徐世昌)이 경앙(景仰)할 정도였다.


서세창은 일찌기 손록당을 지현(知縣), 지주(知州)를 맡도록 추천한 바 있다. 손록당은 말했다: "평생의 뜻이 관직은 아닙니다. 무학문화를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서세창을 그를 더욱 존경하게 된다. 매번 새해가 되면, 두 사람은 각각 한 폭의 글을 써서 서로에게 보냈다. 이를 통해 군자지교담여수(君子之交淡如水)라는 것을 보여준다. 서세창의 호는 도재(弢齎)인데, 그가 손록당에게 호를 '함재'로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했고, 손록당은 기꺼이 받아들인다.


북경의 쿵후가 뛰어난 국술권사들중 일부는 생활이 아주 곤란했다. 손록당은 그들에게 일자리를 추천해 주어 그들이 생활할 수 있게 도운다. 권사가 그의 집을 찾아오기만 하면, 손록당은 항상 고기요리 2접시, 야채요리 2접시등 4개의 요리와 탕 하나로 대접하곤 했다. 떠날 때는 그들에게 돈도 집어 주었다. 하북의 한 젊은 부인은 남편이 외지로 나가 몇년간 돌아오지 않자, 개가하려고 했다. 그러자 손록당은 그 부인을 찾아가서 그녀의 남편이 자기에게 부탁해서 돈을 가져다 주라고 해서 왔다고 하면서 십여위안을 부인에게 건넨다. 그리고 그녀를 안심시킨다. 남편이 곧 돌아올 것이라고. 남편은 연말에 돌아왔고, 그제서야 부인은 남편과 손록당은 전혀 모르는 사이이며, 남편이 그에게 돈을 가져다 주라고 부탁한 적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1933년 화북에는 물난리가 난다. 손록당은 가산을 털어서 이재민을 도왔다. 그는 자신의 돈을 모두 제자인 뇌사묵(雷師墨)이 일하는 중국은행에 예금해두고 있었다. 합계 6만위안이었다. 손록당은 돈에는 신경쓰지 않았다. 얼마가 있는지도 몰랐다. 뇌사묵은 예금을 5만과 1만의 둘로 나누어, 5만의 예금통장은 사모(師母)에게 주어서 이후 나이가 든 후에 양로자금으로 쓰도록 당부하고, 1만위안의 예금통장은 손록당에게 건넨다. 손록당은 그 돈을 모조리 찾아서 이재민을 구하는데 쓴다.


손록당은 평생 첩을 두지 않았고, 자녀들에게는 매우 개방적이었다. 그들이 무술을 배우도록 강요하지도 않았다. 셋째는 영어를 좋아해서, 손록당은 그를 영어학교에 입학시킨다. 셋째는 졸업후 태창4중에서 교사가 되어 외국어와 무술을 가르친다. 다섯째 딸에게는 어려서부터 서예와 그림을 가르친다. 손록당은 그녀를 명가인 방만운(方曼雲)에게 데려가 그림을 배우게 하기도 했다. 말년의 손록당은 자주 서화로 자신의 뜻을 표현했다. 난초, 매화를 잘 그렸다.


'54신문화운동'으로 전통문화는 부정되고 비판받는다. 당시 사람들은 갈수록 무술의 동작에 노력을 들였다. 진정한 무술은 전통문화의 심후한 양분으로 생존한다는 것을 의식하는 사람은 적었다. 손록당은 비록 무학저작이 자기 키만큼 많았지만, 그래도 유감스러워했다: "나의 말이 비록 상세하게 다 적었지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백에 한 둘도 없을까 걱정된다.나는 이 무술이 실전될까 두렵다." 사실상, 전통국술무학은 손록당 이후, 확실히 내리막길을 걷는다.


민국시대 무술계의 명인인 두심무(杜心武)의 도학스승인 조벽진(趙壁塵) 선생은 이렇게 말하다. 손록당은 근대에 유무입도(由武入道)한 수행인이라고. 근대의 수행인들은 적지 않지만, '유무입도하고 수련을 제대로 한 사람은 몇 되지 않는데, 손록당의 도학, 경공, 무공은 근대인들 중에서 비견할 자가 없다.


손록당의 가족들이 회고한 바에 따르면, 민국15년을 전후하여, 관씨 성의 사람이 자주 손록당의 집을 찾아왔다. 두 사람은 방안에서 도공을 수련하고 외인들은 방해하지 않았다. 1년여가 지난 어느 날, 관씨의 가족이 찾아온다. 그러자 손록당이 말한다: "찾지 말라. 너희가 찾를 수 없다. 그는 이미 떠났다." 손록당이 죽기 전에, 가족이 울었다. 그러자 손록당이 큰소리로 질책한다: "너희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나는 일찌감치 떠났을 것이다. 오늘까지 미뤄서 떠났겠는가. 너희가 그런데 뭘 울고 난리냐."


손록당의 손자인 손보안(孫保安)은 이렇게 회고한다. 매번 길거리에서 인연있는 화상, 도사가 나타나면, 손록당은 집안에서도 미리 알았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만두를 들고 길거리에서 기다리게 했다. 아이들이 길거리에 나가면, 인연있는 화상, 도사가 딱 맞게 도착한다. 지금까지도 손록당이 어떻게 알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1933년, 손록당은 가족들에게 자신이 죽을 날짜를 얘기한다. 부인은 깜짝 놀라서, 급히 딸에게 손록당을 데리고 독일병원(지금의 북경의원)으로 가서 신체검사를 받도록 한다. 손록당이 웃으며 말한다: "내 몸은 아무렇지 않다. 무슨 병원을 가느냐. 그저 대가와서 선불(仙佛)이 맞이하러 오면 나는 갈 뿐이다." 가족들이 그의 말을 어떻게 믿겠는가.


신체검사후 독일의사가 말했다: "손선생의 신체는 아무런 나쁜 흔적이 없습니다. 젊은 사람의 몸보다도 좋습니다." 돌아온 후에도 손부인은 여전히 안심하지 못하고, 다시 명의 공백화(孔伯華)를 집안으로 불러서 손록당을 검진하게 한다. 결론은 "손선생은 육맥이 조화롭고, 전혀 이상한 곳이 없다. 이렇게 좋은 맥은 내가 처음 만나본다."


같은 해 가을, 손록당은 고향인 하북으로 돌아간다. 20일간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매일 권법을 수련한다. 1933년 12월 16일 아침 묘시에 손록당은 가족에게 말한다: "선불이 나를 맞이하러 왔다." 6시 05분, 손록당은 동남쪽으로 머리를 향하고, 서북쪽을 등지고, 집안에 단정하게 앉아서, 가족들에게 울지 말라고 당부한 후, "나는 생사를 유희로 생각한다." 그리고 세상을 떠난다.


손록당이 죽은 후, 국민정부 행정원 및 중앙국술관, 강소국술관, 절강국술관, 상해국술관등 수십개의 무술단체는 상해 공덕림(功德林)에서 선생을 위헤 공제(公祭)를 지낸다.


형의권, 팔괘권의 명가인 장조동(張兆東)은 말년에 손록당을 이렇게 평했다: "내가 평생 아는 것이라고는 무공이 신의 경지에 이르러 등봉조극한 사람은 오직 손록당 한 사람 뿐이다." 국술명가 이경림(李景林)은 이렇게 평했다: "이 세상의 권술을 집대성하여 최고의 것을 창조해낸 사람은 오직 손록당 선생 한명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