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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무술

"연자이삼(燕子李三)"은 개세의 경공(輕功)을 지녔는가?

by 중은우시 2013. 12. 21.

글: 북경만보

 

 

 

1930,40년대이래 민간에서는 '연자이삼'에 관한 각종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연자이삼을 원형으로 하여 창작된 영화드라마작품도 여러가지 버전이 있다. 예를 들어, 1972년 홍콩에서 찍은 영화 <연자이삼>이 있고, 1996년 북경전영제작창과 홍콩금정영업공사가 합작으로 찍은 영화 <신투연자이삼>이 있고, 1997년 대륙에서 찍은 34집짜리 드라마 <연자이삼>도 있다...스크린상의 연자이삼은 대체로 무공이 뛰어나고, 몸이 제비처럼 가벼우며, 지붕과 벽을 타고 다니며, 부자의 돈을 훔쳐서 가난한 사람을 도운다...역사상 진실한 연자이삼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도대체 누가 진정한 연자 이삼인가? 연자이삼의 민간전설은 몇 가지 버전이 있는가?

 

천진(天津) 계현(薊縣)의 이분(李芬)

 

연자이삼의 민간전설은 여러가지 버전이 있다. 하나는 천진 계현의 "연자이삼" 이분이다. 이분은 계현 상창진(上倉鎭) 정가장(程家莊) 사람이며, 청나라말기의 의사(義士)이다. 공동무술계의 배분이 셋째여서 분삼야(芬三爺)로 불리웠다. 이분은 무공이 뛰어나고, 협의를 행했으며, 의기(義氣)로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이분은 참형을 당하기 전에 광서제의 한 후비가 그의 대명을 듣고 그가 억울한 점을 알아서, 황상에게 사면을 청한다. 그리하여 "미인이 영웅릉 구한" 전설이 된다. 현지인들은 무술계 배분이 둘째인 초상비(草上飛) 양영(梁英)등 무림고수의 이야기를 그에게 갖다 붙여서, 그를 '연자이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본다. 이 촌에는 그의 묘지가 있고 비문이 서 있었다. 1960년대 파사구 및 나중의 '문혁'기간동안, 이분의 묘지는 현지인의 보호를 받는다.

 

산동(山東) 우성(禹城)의 이성무(李聖武)

 

또 다른 한 사람은 산동 우성의 "연자이삼"이다. 이름은 이성무이다. 이성무는 우성 이가장(李家莊) 사람이다. 형제중 항열이 셋째이므로 자칭 "연자이삼"이라 했다고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권각 쿵후를 배우고, 백수로 지내며 일정한 직업이 없었다. 나중에는 방화살인약탈강도등 온갖 나쁜 짓을 다 했다. 이성무는 일찌기 산동성정부주석 한복거(韓復渠)의 저택에 들어가서 절도를 저지르기도 했다. 그리하여 국민당통치시기에 유명한 '비적(飛賊)'이었다. 이성무는 행적이 표홀부정(飄忽不定)하고, 성이 이씨여서, 어떤 사람은 그와 북경,천진에서 명성이 있는 신투(神偸) "연자이삼"과 연결시켰다. 이성부는 자신의 흑도상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하여, "연자이삼" 이경화(李景華)의 일을 자신에게 갖다 붙였다. 그리고 곳곳을 다니면서 자신이 비첨주벽(飛檐走壁)할 줄 안다고 허풍을 쳤다. 사실상, 매번 그는 경찰에 체포된 후, 돈으로 관계를 뚫어서 석방되곤 했다. 경찰국은 자신들이 욕을 먹지 않기 위하여, 그가 '비첨주벽'하는 무공을 지녔다고 얘기를 해주었다. 제남성이 해방된 후, 국민당 특무기관은 이성무를 매수한다. 이성무는 제남의 경풍금점(慶豊金店)을 강탈하고, 총을 쏘아 사람을 죽인다. 이어서 고의시가 노봉상금점의 24개 금원보도 강탈한다. 그후 다시 부용가 무봉항의 상인 기파정(紀波亭)도 죽인다.  이 일련의 악성사건은 극히 나쁜 영향을 끼친다. 금방 공안기관의 중점 수배대상이 된다. 이성무는 교활하고 간사했다. 여러번 체포되면서도 빠져나가곤 했다. 다만 그는 여색을 탐하고 잠을 많이 잤다. 또한 도망가고 숨는 과정에서 많은 돈이 필요했다. 이런 특징에 따라 공안기관이 엄밀하게 조사하여 마침내 목표를 서주(徐州)의 가기(歌妓) 장홍란(張紅蘭)으로 고정시킨다. 1949년 6월 24일, 서주공안국의 밀접한 협조항, 마침내 그를 체포할 수 있었다. 1949년 10월 27일, 29살의 상습범 이성무는 십이마로 북잡자 밖에서 총살형을 당한다. 이 제남의 연자이삼은 비적이 아니고 실은 강도이다. 인민의 적이다. 세상을 속이고 이름을 훔친 '연자이삼'이다.

 

북평(北平)의 이경화(李景華)

 

또 한명은 바로 북경의 "연자이삼"이다. 원명은 이경화이며, 이홍(李鴻)이라고도 부른다. 이경화는 정종의 '연자이삼'으로 알려져 있다.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째, 이경화가 처음으로 '연자이삼'으로 불리웠다는 것이고, 둘째, 당시 북평의 여러 신문에서 이경화에 관한 보도에서 그를 '연자이삼'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1927년 8월 13일의 <신보>는 그를 "저명한 흑잠대도(黑潛大盜) 연자이삼"이라고 불렀다. 1929년 7월 3일의 <익세보>는 <비첨주벽의 대도 탈옥후 다시 체포되다>라는 글에서, 이경화라는 이름에는 괄호를 써서 "(즉, 연자이삼)"이라고 하였다. 그외에, 당시 경찰, 법원 및 감옥의 문서에서 모두 연이어 "연자이삼(즉,이경화)"라는 칭호를 쓰고 있다.

 

"연자이삼"은 개세경공을 지니고 있었는가?

 

TV드라마에서의 연자이삼은 비첨주벽하고 신격화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어느 겨울 저녁, 이삼의 어머니가 화소(火燒, 일종의 구운 찐빵)를 먹고 싶다고 했다. 그는 1개시진정도만에 화소를 사서 돌아왔다. 다른 사람들은 그가 현성(縣城)에서 사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부근에는 현성에서만이 참깨화소를 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삼은 사람들에게 천진에서 사왔다고 한다. 그리고 득의양양하게 천진의 상호가 쓰여있는 포장지를 내보인다. 오는 길은 수백리길이다. 그가 어떻게 갔다 왔단 말인가? "연자삼초수(燕子三抄水)"의 점수이행(點水而行)등 경공은 기실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인물의 이미지를 조성하기 위하여 예술적으로 과장한 것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전설에서의 축골술(縮骨術)도 일종의 과장이다. 이경화는 절도시에 거의 실수를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매번 절도를 하기 전에 주도면밀하고 세밀하게 준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별히 만든 약물과 각종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사건을 저지르면서 소리를 거의 내지 않고,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그것은 항상 5,6쌍의 포저(布底)양말을 신었기 때문이다. 이경화는 확실히 지붕으로 뛰어올라가 뛰어다닐 수 있는 재주를 지녔다. 그러나 비첨주벽이라는 것은 사실 나무, 전봇대, 그리고 담장을 뛰어올라가는 힘을 이용하는 것이다. 한지발총(旱地拔蔥)할 수는 없는 것이다.

 

확실히, 드라마에 나오는 연자이삼은 어느 특정인물은 아니다. 민국연간에 하북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 연자이삼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십여명에 달했다. 많은 강호대도들이 자신의 진실한 신분을 감추기 위하여, 자주 연자이삼의 이름을 걸고 도둑질을 했다. 당시의 경찰에서는 해결하지 못한 사건이 있으면 연자이삼이 저지른 것이라고 했다. 심지어 부호, 고관의 집을 터는 큰 사건인 경우에는 통일적으로 이삼이 범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삼사건"은 절도사건의 대명사가 된다. 해결되지 않은 절도사건은 모조리 연자이삼이 저지른 거으로 쳤다. 드라마에서 나온 이삼은 최소한 3,4명의 이전에 진짜 나타났던 이런 류의 도둑의 이미지를 가지고 예술적으로 가공하여 창작해낸 것이다.

 

변호사가 본 연자이삼

 

진실한 이삼, 즉 사학계에서 공인된 연자이삼은 이경화이다. 1895년, 이경화는 하북 탁주(涿州)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숙부를 따라 창주(滄州)로 간다. 창주는 무술을 익히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그도 스승을 모시고 무술을 배운다. 담장을 뛰어올라가고 나무를 기어오르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쉬운 일이었다. 일반인들이 따라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의 변호사였던 채례(蔡禮)의 회고에 따르면, "창주인들은 무술을 익히는 사람이 많았다. 그는 거기서 약간의 무예를 배운다...18,9세때 창주의 한 강호를 떠도는 무리를 따라 하남 낙양으로 가서 무술공연을 해서 돈을 번다. 낙양에 있을 때, 무리들 중에서 물건을 잃어버리는데, 사람들이 그를 의심하여, 그를 쫓아버린다. 그는 낙양이 땅도 낯설고 사람들도 친한 사람이 없었다. 갈 곳이 없어서 도둑질을 배운다." 한번은 그가 낙양경비사령관 백견무(白堅武)의 횡행패도를 보고, 아주 화가 난다. 그래서 밤에 백씨집으로 몰래 들어가서, 백견무가 차고 있던 권총을 훔쳐간다. 그리고 권총을 그의 집 뒷 정원에 걸어두고 종이조각을 붙여 놓는다. "연자이삼이 이곳을 다녀가다". 이것은 백견무를 화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소식이 퍼져나가면 자신의 체면이 상할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대거 사람을 동원하여 일을 벌이지는 않는다. 그후, 이경화는 현지에서 여러 부잣집을 털었다. 그리하여 현지 상류사회인사들의 분노를 산다. 당국은 도처에서 그를 체포하려 하였다. 이경화는 체포를 피하기 위하여 이름을 감추고 소림사로 들어간다.

 

소림사에서 나온 후, 이경화는 북경,천진 일대로 간다. 그의 사건은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부잣집 권력자집을 털었지, 가난한 백성은 괴롭히지 않았다는 것이고, 둘은 사건을 저지른 후 흔적을 남겼다는 것이다. 소설에서 화호접(花蝴蝶), 백국화(白菊花)등 대도의 방법을 본떠서, 백지로 접은 "연자(燕子, 제비)"를 사건을 저지른 곳에 꽂아두었다. 혹은 "연자이삼"이라는 쪽지를 남겨놓는다. 이렇게 하여 명인불주암사(明人不做暗事), 호한주사호한당(好漢做事好漢當). 이것은 그의 명성을 더욱 높인다. "연자이삼"이라는 별명은 이렇게 하여 얻게 되었다.

 

채례는 <내가 연자이삼의 변호를 맡았던 회고>에서 이경화의 신투지공(神偸之功)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머리를 아래로 향하고, 몸을 도마뱀처럼 벽에 붙여서 올라간다. 그는 일찌기 백탑사의 높은 대전의 벽을 기어올라간 바 있다. 이 초식을 "갈자파(蝎子爬)"라고 부른다. 그는 기공을 좀 할 줄 알았다. 어떻게 운기를 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발 뒷꿈치의 그 뼈가 안으로 들어간다. 그는 몸에 밧줄을 가지고 다니는데, 밧줄의 끝에 철조자(鐵爪子)를 달고, 줄을 나무위 혹은 기둥위로 던지면, 철조가 나무에 걸린다. 그는 줄을 타고 올라간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수사팀은 비록 여러번 그에 대하여 체포하고자 했지만, 붙잡기 어려웠다. 붙잡아도 그를 볼 수 없었다. 그가 발 뒷꿈치뼈를 안으로 수촉시키면, 철료((鐵鐐, 족쇄)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북경에서 7번 체포되고도 7번 도망칠 수 있었다."

 

이경화에게 도둑을 맞은 사람은 모두 고관대작이다. 당시 임시집정 단기서(段祺瑞)의 북평 길조후통 동쪽입구에 있는 저택, 국무총리 반복(潘復) 그리고 대군벌 장창종(張昌宗), 저옥박(褚玉璞)등의 재물을 훔친 바 있다. 그는 훔친 재물을 어떤 때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재물은 그가 먹고,마시고,도박하고,계집질하고,마약을 하는데 써버렸다. 1934년, 이경화는 다시 체포된 후 북평감화소(北平感化所)에 들어간다. 감화소의 옥졸들의 급여가 얼마되지 않는 것을 보고, 그는 한 가지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옥졸들이 저녁에 그를 풀어주면, 도둑질을 한 후 다시 돌아오고, 훔친 물건을 나누어 갖기로 한 것이다. 나중에, 그는 감화소의 순관 사해산(史海山)과 결의형제가 된다. 그래서, 이경화는 낮에는 돌아와서 잠을 자고, 저녁에는 나가서 절도를 저질렀다. 아무런 거리낌없이 여러 사건을 저지른다. 그러나 그는 약속을 지켰다. 절도를 저지른 후 제 시간에 돌아와서, 사해산등에게 적지 않은 '재물'을 준다. 8월의 어느 저녁, 서단 여화주단장의 경리 반국영은 합이비극장으로 가서 극을 본다. 이경화는 끝날 때, 그가 탄 인력거를 따라가서 서단2조의 주택안에서 적지 않은 고급주단과 의복을 훔쳐낸다. 얼마후, 사해산은 이경화가 준 고급 모배심(毛背心)을 염색점에 맡긴다. 염색점주인은 반씨가 잃어버린 것이라는 것을 알고, 즉시 반국영에게 알린다. 원래, 반국영은 도둑을 맞은 후 경찰에 신고하는 외에, 관련 점포에도 통지를 했던 것이다. 유의해서 살펴봐달라고. 수시팀이 사해산과 기타 장물을 받은 사람들은 체포한다. 그리하여 전문외 요아후통에 있는 수사본부에서 심문한다. 이경화는 이 소식을 들은 후 심문하는 대청의 지붕에 숨어서 몰래 듣다가, 수사팀에 발견되어 체포된다.

 

1934년 12월 9일 <경보>는 이렇게 보도한다: "법원 간수소는 그가 다시 도망칠까봐 우려하여, 이를 막기 위하여, 특별히 이삼에게 목구형구(木狗刑具)를 차게 하여 이를 엄히 방비했다". '목구'는 '목구자'라고도 하는데, 옛날에 나무로 만든 형구의 하나이다. 범인의 두 다리 사이에 넣어서 자유롭게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원시적이고 야만적이고 비인도적인 형구이다.

 

1935년 1월, 북평지방법원에서는 '연자이삼"절도사건을 심리한다. 나중에 여러번 곡절을 거쳐, 사건은 최고법원까지 간다. 법원은 이경화에게 '강도죄'를 인정하여, 유기징역12년에 처한다. 이경화는 판결에 불복하여 상소한다. 당시 북평율사공회 부회장을 맡고 있던 채례는 이경화를 위하여 무료로 변호해준다. "12년 유기징역은 과중하다", "설사 엄히 처벌하더라도 8년을 넘으면 곤란하다." 그러나, 최고법원의 회신을 받기도 전에 1936년 1월 9일, 이경화는 장기간 아편흡입으로 인한 폐결핵으로 북평간수소에서 병사한다. 당시 나이 40살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