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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무술

황비홍의 무공은 얼마나 뛰어났을까?

by 중은우시 2014. 12. 12.

글: 문재봉(文裁縫)

 

<황비홍의 영웅유몽>이 최근 영화관에서 인기리에 상영중이다. 여기에 이전에 이연걸이 만들어낸 황비홍의 이미지와 합쳐져서 우리는 황비홍은 불공평한 일을 보면 참지를 못하고, 길거리에서 불의한 일을 저지르는 무리가 있으면 반드시 그가 나서서 징벌을 하여, 백성들의 눈에 그는 정의의 화신으로 비친다고 여긴다. 그는 제폭안량(除暴安良)의 대명사이다. 황비홍은 아무도 대적할 수 없는 무공을 지녀 자주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고 이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이런 이미지를 형성했다: 역사상 진실한 황비홍의 무공은 천하무적이다. 그러나, 역사상 진실한 황비홍은 정말로 그렇게 대단했을까? 그의 무공은 얼마나 뛰어났을까?

 

황비홍을 얘기하면, 불산(佛山)사람들은 자부심을 나타낸다. 그들은 황비홍과 같은 고향사람이라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것이다. 확실히 이처럼 황비홍은 탁월한 인격적 매력과 뛰어난 능력으로 중국무술계뿐만 아니라, 보통백성들 사이에서도 명성을 누린다. 그는 최근 백년이래로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인물이 되었다. 보도에 따르면, 황비홍기념관의 낙성식날, 황비홍시리즈영화를 찍어서 유명해진 감독 서극(徐克)이 친히 그의 제작팀을 이끌고 와서 황비홍기념관의 낙성을 축하했다고 한다. 그러나, 100여년전에 황비홍은 그저 불산의 길거리에서 이름없는 매예인(賣藝人)에 불과했고 하루종일 불산의 술집과 차관 혹은 골목실을 돌아다녔지만, 사람들의 주목을 그다지 받지 못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그가 살아있을 때는 이렇게 적막했지만, 그가 죽은 후에는 영광을 얻어 세계적인 문화명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기실, 진실한 황비홍은 오늘날 사람들이 마음 속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위대하지도 않았고, 그의 무공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일당십도 아니었다. 더더구나 스크린에서처럼 백전백승도 아니었다. 자료에 따르면, 여러번 싸움에서 황비홍은 중과부적으로 밀렸다고 나온다.

 

황비홍의 넷째부인 막계란(莫桂蘭)의 회고에 따르면, 황비홍의 평생절기는 쌍비타(雙飛砣), 철선권(鐵線拳), 호학쌍형권(虎鶴雙形拳), 나한금전표(羅漢金錢鏢), 사상표룡곤(四象標龍棍), 공자복호권(工字伏虎拳)등이다. 그중 가장 뛰어난 것은 호학쌍형권과 쌍비타이다. 호학쌍형권은 황비홍이 각 대가의 정수를 모아서 만든 것이다. 이들 무공중에서 가장 주요한 것은 두 가지 연원이 있다. 첫째는 그의 부친인 황기영(黃麒英)으로부터 전수받은 것이고, 둘째는 그의 부친의 친구인 철교삼(鐵橋三)의 제자인 임복성(林福成)이다. 나머지는 모두 황비홍이 부친과 임복성의 무술을 융합하여 만든 것이다.

 

황비홍의 부친 황기영은 불산십대고수 중 한 명이다. 길거리에서 무술공연을 하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다. 그래서 집안은 아주 빈한했고 황비홍은 자신이 걸었던 길을 걷지 않게 하기 위하여, 황기영은 당초에 아들에게 무예를 전수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황비홍이 사서오경을 익혀서 공명을 얻기 바랬다. 그래야 매일 햇볕을 쬐고 비바람을 맞으면서 동으로 서로 뛰어다니고 그렇게 하면서도 생활은 궁핍하게 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황기영은 황비홍이 4,5살때까지 무예를 가르치지 않고, 힘들게 번 돈으로 황비홍을 학당에 보냈다. 그러나 황비홍은 공부할 재목이 아니었다. 부친이 학당에 보내주었지만 그는 공부에는 생각이 없고, 오로지 부친의 무예를 익힐 생각만 했다. 그래서 황비홍은 학교에서 도망친다. 매일 길거리로 가서 부친의 무술공연을 구경했고, 다 보고 나면 다시 학당으로 돌아가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어린 그가 보기에 부친은 비록 궁핍하게 살지만 당당한 대장부이고, 권각쿵후이든 도창봉법이건 모두 따를 사람이 없었다. 부친은 그의 마음 속의 우상이었다. 그러므로, 어린 황비홍의 마음에는 이미 원대한 꿈이 형성되어 있었다. 어른이 된 후에 부친처럼 무예를 익히는 사람이 되겠다는. 한번은 황비홍이 이를 악물고 황기영에게 부친을 따라서 무예를 배우겠다고 하자, 황기영은 엄청나게 화를 내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가 보기에 아마도 이는 황씨집안에는 글을 하는 사람은 배출하지 않을 운명인가보다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때부터 황비홍에게 무예를 전수해준다. 그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황비홍에게는 무예를 익히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는 것이다. 자신이 오랜 시간을 들여서 배웠던 초식을 나이 겨우, 4,5살인 황비홍이 금방 익히곤 했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의 결점과 부족한 점까지도 지적해냈으며, 그 기초위에서 자신의 초식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리하여 황기영은 안위를 한다. 2년이후, 황비홍은 부친의 무예를 다 익힌다. 그리고 그 때부터 불산의 길거리에서 무술공연을 한다. 그후 십여년을 이렇게 보낸다.

 

한번은, 황기영이 평소와 같이 십여세된 황비홍을 데리고 불산의 길거리에서 무술공연을 하고 있었다. 거의 끝날 때쯤, 부자 두명은 돌연 임복성이 일군의 흑사회에게 쫓기는 것을 보게 된다. 황기영은 평소에 불공평한 일을 참지 못하였고, 게다가 친구가 쫓기는 것을 보자, 당연히 두 말도 하지 않고 바로 도와주게 된다. 이어서 황비홍도 싸움에 가담한다. 부친 및 임복성과 함께, 추격하던 무리들을 물리친다. 황기영의 구명지은에 보답하기 위하여, 임복성은 황비홍에게 독문절기인 '철선권'과 '비타'를 전수해주겠다고 약속한다. 뛰어난 재능으로, 황비홍은 금방 이 두 가지 무예를 익힌다. 이때부터 그의 무예는 더욱 뛰어나게 된다. 부친 황기영조차도 감당할 수 없게 된다. 만일 황비홍이 7,8세때 부친의 무예를 익히고 강호에 발을 내디딘 것을 시작이라고 한다면, 불산십대고수의 한 명인 임복성으로부터 철선권과 비타를 배운 것은 그를 강호의 중심으로 몰아넣었다. 나중에 부친과 임복성의 무공을 모두 흡수한 기초 위에서 황비홍은 다시 호학쌍형권을 만들어내고, 무공은 더욱 올라간다.

 

오늘날 민간에서 유행하는 "불산무영각(佛山無影脚)"은 기실 황비홍이 만든 것이 아니다. 무학에는 이런 무술이 아예 없다. 아마도 후세인이 황비홍의 무공신화를 더욱 강조하기 위하여 특별히 만든 허구의 초식일 것이다. 기실 황비홍의 진실한 무공은 위의 정도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