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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중기)

낭세녕(郎世寧): 중국에 51년간 머문 이탈리아화가

by 중은우시 2019. 6. 8.

글: 희랄인(嘻剌人)


낭세녕은 청나라의 유명한 궁중화가이다.


필자는 어려서부터 낭세녕의 대명을 오랫동안 앙모하여 왔다.

나이가 들면서, 청나라황제의 배경에 대하여는 더 잘 알게 되었지만,

낭세녕에 대한 이해는 그저 "서양에서 온 궁중화가"라는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


청나라때 궁중화가는 전기나 이력을 남기지 않았고, 스스로 자화상도 남기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정보들을 모아서 낭세녕의 전모를 파악할 수밖에 없다.



(<심사치평(心寫治平>은 건륭제와 12명의 후비를 그린 것이다. 앞의 3명은 낭세녕이 그렸고, 나머지 10명은 다른 화가들이 차례로 완성했다. 그림을 그릴 당시의 건륭제는 25살로, 처음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때이다)


[이탈리아출신]


낭세녕은 원래 이름이 Giuseppe Gastiglione이다.(1688-1766)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양호한 회화교육을 받는다.


1707년, 19살이 낭세녕은 제노바에서 예수회에 가입한다.


[포르투갈 -> 중국]


1714년 포르투갈 리스본, 코임브라로 이사간다. 이 기간동안 그는 포르투갈 왕후와 공주를 그린 바 있다.

그후, 예수회 포르투갈 선교부의 파견으로 멀리 중국으로 떠난다.


1715년 27살의 그는 마카오에 도착하여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하고, '낭세녕'이라는 한명(漢名)을 갖게 된다.


[광주에서]


낭세녕은 그 후 마카오를 떠나 광주로 간다. 그리고 기회를 잡아 북경으로 가서 선교하려 한다.


당시, 강희제는 서양인의 각양각색의 지혜에 대하여 호기심이 많았다.

그러나 북경으로 오는 외국인은 반드시 먼저 광주상관내의 천주교학당에서 한어를 배우게 하고, 한어를 다 배우면 상소를 올리게 하였다.

강희제는 이렇게 당부한다: "중국말을 할 줄 모르면, 북경에 오더라도 쓸 데가 없다. 중국어를 말할 때 너희는 상소를 올려서 보고하라."


낭세녕은 언어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 1년도 되지 않아 외국인으로서는 배우기 어려운 중국어를 다 배운다.


[선교는 못하다]


낭세녕이 광주에 있을 때, 광주순무 양림(楊琳)이 상소를 올려: "서양화가 낭세녕이 상선을 타고 광주에 왔습니다"라고 아뢴다.

강희제는 즉시 비시를 내린다: "서양인을 속히 북경으로 보내라"

낭세녕은 이때부터 북경으로 가서 궁중화가가 된다.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의 세 황제의 아래에서 궁중화가로 일했고, 중국에서 머문 기간이 51년이나 된다.

시종 선교할 기회는 얻지 못했고,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이국에서 사망한다.


[관직이 정삼품에 이르다]


1747년, 낭세녕은 59세가 된다.

황가원림공정을 책임지는 봉신원(奉宸院) 원경(院卿)의 직위를 받는데, 관직이 정삼품이다.

원명워내의 '장춘원(長春園)' 서양루(西洋樓)의 설계와 시공에 참여한다.


1757년, 낭세녕은 70세가 된다.

생일날, 건륭제는 원명원에서 그를 접견하고, 하사품을 내린다. 그리고 친필로 송사(頌辭)를 써준다.

북경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낭세녕은 대교(大轎)에 앉았고, 24명의 악대가 연주를 하며 길을 열었다.

만족, 한족 관리들이 말을 타고 그 뒤를 따른다.



(팔준도)



[서양화가]


건륭제때, 궁중화가는 약 50여명이 있었다.

그중 서양화가는 낭세녕 외에 체코 보헤미아 사람인 애계몽(艾啓蒙), 프랑스사람인 왕치성(王致誠), 하청태(賀淸泰), 그리고 같은 이탈리아사람인 안덕의(安德義), 반정장(潘廷章)등이 있었다.


낭세녕은 건륭제의 총애를 받았는데, 다른 중국서양화가들과는 비교할수 없을 정도였다.


[일상생활]


낭세녕이 경사에 와서 동화문밖의 천주교교당(지금의 왕푸징 천주교당)에 거주한다.

매일 새벽에 거처에서 출발하여 걸어서 입궁한다.

7시에 동화문 금위에 도착보고하고 여의관(如意館)으로 가서 그림을 그린다. 오후 5시에 퇴근한다.


회화의 주제는 아주 광범위했다. 어떤 것은 중대한 역사사건을 기록하기도 하고, 어떤 것은 문치무공을 드러내기도 했으며, 고화를 임모하기도 하기도 했다.


[화실]


화가들은 비록 관직등급이 있었지만, 진정한 행정관리들같이 관리의 위풍이 있는 것은 아니고, 그저 그림을 그리는데만 집중했다.


화실은 여름에 더웠고, 겨울에는 추웠다. 프랑스화가 왕치성은 일찌기 친구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렇게 원망하기도 했다: "우리가 거처하는곳은 하나의 평방(平房)인데, 겨울에 춥고, 여름에 덥다. 실로 일반백성수준이다. 황상의 은총이 크고, 다른 선교사들보다 낫지만, 매일 내정에서 일하다보니 감금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그림을 그릴 때도 여러가지 제약이 많아서, 마음대로 그릴 수가 없다."


[국궁진췌]


청나라조정의 내무부 '조판처(造辦處)'는 궁내 예술품제작의 세부사항과 관련인원의 상벌에 대하여 모조리 상세히 기록해 놓는다.

문헌을 보면 건륭제는 모시기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예를 들어,


건륭13년, 황제가 구유(口諭)를 내린다: "낭세녕이 그린 자기병의 모양이 좋지 않다."

다음 해, 황제는 궁중의 내시를 통하여 이렇게 말한다: "흑칠소원갑(黑漆小元匣) 6개를 낭세녕에게 새로 칠하게 하라"


낭세녕은 수십년동안, 하루종일 황상이 지시한 크고 작은 사무를 처리하느라 바빴고, 고생을 마다하지 않으며, 국국진췌했다.

일찌감치 선교할 여력은 없었다.


[카자흐스탄공마도]


팔국연합군이 중국을 침략할 때, 이 그림은 프랑스군사령관인 포레가 가져가서 현재 파리의 기메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좌반부)


(우반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