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취간역사(趣看歷史)
황장자 윤제(胤禔)는 그의 부친 강희제가 말한 것처럼 어리석은 인물(蠢材)이었다. 발전가능성이 없는 멍청한 자. 그래서 생모인 헤비도 구자탈적중 할 수 없이 자신이 기른 황팔자 윤사(胤禩)를 지지한 것이다.
황장자 윤제는 구자탈적중 유일하게 옹정제나 건륭제로부터 용서받지 못한 황자이다.
윤제는 생모인 혜비도 좋아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황실내에서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윤제는 '구자탈적'중 사후에 유일하게 황제로부터 용서받지 못한 황자이다.
강희제때 '구자탈적'에 참여한 9명의 황자는 각각 황장자 윤제, 황이자(皇二子)인 폐태자(廢太子) 윤잉(胤礽), 황삼자(皇三子) 윤지(胤祉), 황사자(皇四子) 윤진(胤禛) 즉 나중의 옹정제(雍正帝)이고, 황팔자 윤사, 황구자(皇九子) 윤당(胤禟), 황십자(皇十子) 윤아(胤䄉), 황십삼자(皇十三子) 윤상(胤祥), 그리고 황십사자(皇十四子) 윤제(胤禵)이다.
그중 황장자 윤제는 자신이 하나의 당으로 여겼다. 대아가당(大阿哥黨); 그리고 폐태자 윤잉과 황삼자 윤지는 태자당(太子黨)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황사자 옹정제와 황십삼자 윤상은 처음에 태자당에 속했으나, 태자가 2번에 걸쳐 폐위된 후 후계다툼에 뛰어든다. 사야당(四爺黨)이라 부를 수 있다; 남은 황팔자, 황구자, 황십자 및 황십사자는 하나로 뭉친다. 팔야당(八爺黨)이라 부를 수 있다.
최종적으로 황사자 윤진이 승리를 거두고 황위를 계승한다. 황십삼자는 자연히 옹정조때 가장 총애와 신임을 받는 왕야가 된다. 그리고 사후에 철모자왕의 대우를 받는다. 옹정제와 황십삼자 윤상의 우애는 고금에 보기 드문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승리자들의 결말은 다로 말할 필요가 없겠지만, 나머지 7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황장자 윤제와 폐태자 윤잉은 강희제때 강희제의 명으로 연금된다. 옹정이 즉위한 후에도 그들 둘은 사면해주지 않는다. 다만 옹정제의 그들 둘에 대한 대우는 차이가 아주 명확했다.
옹정제는 황이자 윤잉과 그의 장남 홍석(弘晳)은 모두 아주 잘 대해주었다. 옹정제는 홍석을 왕으로 봉했고, 홍석은 홍자배의 인물들 중에서 가장 먼저 왕에 봉해지게 된다. 당시는 옹정제의 친아들인 건륭제도 아직 왕에 봉해지지 않았을 때이다. 그리고 윤잉의 사후 옹정제는 그를 이밀친왕(理密親王)에 추증한다. 홍석도 친왕의 작위를 승계한다. 그리고 옹정제는 폐태자 윤잉은 죽음으로써 죄는 모두 소멸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좋은 형님이었다고 얘기한다. 즉 옹정제는 윤잉을 대신하여 강희제로부터 받은 죄를 모두 없애주었다. 이는 부친 강희제를 대신하여 윤잉을 용서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황장자 윤제의 가족에 대하여는 그렇게 좋게 대하지 않았다. 윤제의 아들은 홍석처럼 옹정제에게 후대받지 못했고, 윤제의 사후 옹정제는 윤잉에게 했던 것처럼 죽음으로 죄를 소멸시켜주지 않았다. 그저 윤제를 패자(貝子)의 예로 장례지내고, 윤제의 아들 홍방(弘昉)은 겨우 진국공(鎭國公)의 작위를 계승한다. 친왕, 군왕 심지어 패륵, 패자같은 작위와 비교하면 공작은 너무나 형편없는 작위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옹정제의 황장자와 황이자에 대한 대우의 차이를 엿볼 수 있다. 이는 주로 옹정제의 11세때 효의인황후(孝懿仁皇后)가 병사한 후, 계속 윤잉이 그를 길렀다. 그래서 옹정과 윤잉의 감정은 아주 깊었다. 그외에, 강희제가 시종 마음에 두었던 것은 폐태자 윤잉이다. 임종전에도 재삼 윤잉을 잘 대해주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유조를 내려 옹정의 즉위후 홍석을 왕의 작위에 봉하게 한다. 그래서 옹정은 즉위후 폐태자 윤잉 부자에게 매우 잘 대해준다.
황장자와 황이자를 제외하고, 옹정은 즉위후 팔야당을 정리한다. 옹정이 취한 책략은 각개격파이다. 먼저 옹정2년(1724년), 황십자를 옹정은 가장 먼저 손본다. 작위를 박탈하고 감금한다.
이어서 옹정3년(1725년), 옹정제의 동모동생인 황십사자 윤제도 먼저 연금당하고 나중에 감금당한다.
옹정4년(1726년)에 이르러, 다시 황팔자와 황구자에게 옹정제는 손을 쓴다. 그들 둘은 '구자탈적'중에서 가장 비참하게 당한 두 사람이다. 그들 둘은 옹정제의 명령으로 작위를 삭탈당했을 뿐아니라 종적(宗籍)도 박탈된다. 그리고 이름도 "아치나(阿其那)"와 "사스헤이(塞思黑)"으로 바꿔버린다. 다른 형제들을 연금이나 감금한 것과 비교하면 그들 둘은 아예 감옥에 들어가서 고통을 겪게 된다. 겉으로 보기에는 감금당하는 것이나 감옥에 갇히는 것이나 별다른 차이가 없다고 볼 수 있지만, 환경과 대우에 차이가 아주 크다. 그래서 반년만에 둘은 고생끝에 차례로 목숨을 잃는다.
마지막으로 옹정제에게 처리당한 사람은 황삼자이다. 기실 황삼자 윤지는 야심이 비교적 적은 사람이었다. 그가 옹정제의 타격과 박해를 벗어나지 못한 이유는, 첫째는 그가 태자 윤잉에 죽어라 충성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의 아들 홍성(弘晟)이 황팔자 윤사와 너무 밀접하여 황팔자에게 붙은 혐의가 있었기 때문이고, 셋째는 황삼자 윤지는 황십삼자 윤상과 사이가 아주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옹정제가 윤지의 작위를 삭탈하고 감금한 이유는 황십삼자 윤상과 관계가 있다. 옹정은 윤지가 옹정제의 사랑하는 연비(年妃)가 사망했을 때, 그리고 옹정이 사랑하는 아들 복혜(福惠)가 사망했을 때, 그리고 황십삼자 윤상이 사망했을 때 그다지 슬퍼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 옹정8년(1730년) 윤지의 작위를 박탈하고 경산(景山) 영안정(永安亭)에 감금한다.
감금된지 2년만에 우울증에 빠져 윤지는 사망한다. 다만 윤지가 죽은 후에는 옹정제가 그에게 잘 대해준다. 군왕(郡王)의 예로 장례지내준다. 그러나 옹정제는 시종 윤지에게 뒤집어 씌운 죄명을 벗겨주지는 않았고, 윤지에게 시호를 내려주지도 않았다.
이렇게 보면, 옹정제는 황장자 윤제에 대하여 그래도 괜찮게 대우해준 편이라 할 수 있다. 윤제는 폐태자 윤잉을 제외하면 다른 형제들 보다는 모두 좋은 대우를 받았다. 어쨌든 그는 자신의 직군왕부(直郡王府)내에 감금되어 있었고, 자유와 정치권력이 없는 것을 제외하면, 윤제의 생활과 대우는 나중에 옹정제에 의해 감금되거나 수감된 다른 형제들보다 훨씬 나았다.
그리고 윤제는 강희47년(1708년) 납월부터 감금되기 시작하여, 옹정12년(1735년) 사망할 때까지, 37세부터 사망하는 63세까지, 고박 26년여를 감금당한 상태에섲 ㅣ낸다. 이 26년의 감금생활동안 윤제는 모두 20명의 자식을 낳는다. 이를 보면 그의 생활은 다른 나중에 옹정제에게 감금당한 형제들보다 훨씬 좋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윤제의 사후 명분은 다른 황자들 중에서 가장 형편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건륭제때 윤제를 제외하고 구자탈적에 참여했다가 옹정제에게 박해받은 황자들은 모두 명예회복되고 용서받는다. 오직 윤제만 용서받지 못한다.
건륭제가 즉위한 후, 가장 먼저 석방한 것은 아직 살아있던 두 명의 숙부인 황십자 윤아와 황십사자 윤제이다. 건륭제는 먼저 그들 둘을 공작에 봉하고, 나중에 황십자 윤아가 먼저 병사하는데, 건륭제는 패자의 예로 장례지낸다. 그리고 그를 패자로 추증한다. 나중에 건륭제는 황십사자의 이전 군왕작위를 회복시키고, 부친 옹정제가 황십자와 황십사자에게 뒤집어 씌운 모든 죄명을 벗겨준다. 그들 둘을 용서했다고 할 수 있다.
이어서 건륭제는 다시 황삼자 윤지의 죄명을 벗겨주고, 윤지를 용서한다. 그리고 윤지에게 시호를 내린다. 윤지에게 사후에 명분을 가질 수 있게 해준 것이다.
마지막으로 황팔자 윤사와 황구자 윤당을 명예회복시킨다. 다만 황팔자와 황구자는 옹정제 생전 최대의 정적들이다. 막 즉위한 건륭제는 비록 부친 옹정제가 이들 두 숙부를 고생시켜 죽음에 이르게 한 조치에 불만이 있었지만, 그는 즉시 그들 둘을 명예회복시켜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건륭43년(1778년)에 이르러 황팔자와 황구자의 정치적 영향력이 모두 소멸되었을 때 건륭제는 이들 두 숙부를 명예회복시켜준다.
다만, 건륭제는 직접 옹정제가 황팔자와 황구자에게 뒤집어 씌운 죄명을 벗겨주지 않았고, 건륭은 옹정제의 입을 빌린다. 건륭은 이렇게 말한다. 부친 옹정제는 말년에 황팔자와 황구자를 너무 심하게 타격한 것에 대하여 후회하는 뜻이 있었다. 건륭제는 황팔자와 황구자에게는 패역의 사실이 없었다. 즉 실제행위는 없었다는 것을 들어, 황팔자와 황구자의 종적신분을 회복시킨다. 그들 둘의 명예를 회복시켜 준 것이다.
이는 그가 이들을 명예회복시켜주었다기보다는, 건륭제가 부친 옹정제를 대신하여 황팔자와 황구자를 용서하였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건륭제는 황팔자와 황구자는 결당영사(結黨營私)하기는 했지만, 구체적인 모역행위는 없었다. 그래서 간접적으로 부친 옹정제가 주심(誅心)의 명목으로 황팔자와 황구자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옹정제 시기에 이미 윤잉의 사후, 옹정제는 부친 강희를 대신하여 윤잉을 용서했고, 사람이 죽으면 죄는 사라진다, 그리고 그는 좋은 형님이었다는 말을 하면서 윤잉은 용서받는다.
그래서 '구자탈적'에 참여하였다가 실패한 황자들 중에서 오직 황장자 윤제만이 용서받지 못했다. 옹정제에 의해서이건 아니면 그의 아들 건륭제에 의해서이건 모두 윤제의 죄명을 벗겨주지 않았다. 당연히 비교하자면 윤제의 생전생활은 다른 형제들보다 나은 편이었다. 그러나 고인들은 사후의 명분을 아주 중시했다. 어쨌든 사후에 죄명을 쓰고 있다는 것은 자손들에게 치욕이 되기 때문이다.
다만 왜 다른 사람들은 용서받고 명예회복되었는데, 오직 윤제만 그렇지 못했던 것일까? 기실 이는 윤제의 생모 혜비가 왜 양자인 황팔자를 지지했는지의 원인이기도 하다.
윤제는 너무 모자랐다. 생모 혜비도 결국 그를 더 이상 보호해주지 않기로 결정한다.
윤제가 건륭제에게 용서받지 못한 이유는 건륭제가 황팔자와 황구자에게는 패역의 사실이 없는데, 오직 '주심'으로 타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윤제는 실제적인 패역행위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용서받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생모 혜비도 결국 그를 더 이상 보호해주지 않게 된 것이다.
진정한 역사상의 황장자 윤제는 용모가 준수했다. 그리고 윤제에게는 일정한 능력이 있었다. 그래서 초기에 비교적 부친 강희제의 사랑을 받았던 것이다.
윤제는 강희제의 황장자이다. 아쉽게도 생모 혜비의 가족출신이 그다지 높지 못했다. 그래서 그저 서비(庶妃)에 머물러 있었다. 윤제는 그리하여 장남이지만 태자의 자리와는 인연이 없었다.
다만 윤제의 황장자 신분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현재 지위에 만족할 수 없었다. 윤제는 황장자이나 서출이어서 태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어른이 되어서부터 수시로 태자 윤잉의 일거일동을 관찰한다. 그리고 기회를 보아 태자를 끌어내리려 한다. 그가 보기에 강희제의 유일한 적자인 태자만 끌어내리면, 그가 장남으로서 순조롭게 태자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윤제는 일찌기 백부 상녕(常寧)을 따라서 그리고 부친 강희를 따라서 2차에 걸쳐 갈단(葛爾丹)을 정벌하여, 전공을 세운다. 그래서 일찌감치 강희제에 의해 직군왕에 봉해진다. 그리고 비교적 강희제의 사랑을 받는다. 강희제는 당시 기본적으로 외출순행할 때면, 태자 윤잉으로 하여금 감국(監國)하게 하고 황장자 윤제를 데리고 갔다.
이는 윤제에게 강희제의 앞에서 태자 윤잉에 대한 나쁜 인상을 심어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밖에서 윤제가 강희제의 면전에서 태자에 대한 나쁜 말을 하고, 안에서는 윤잉이 강희제의 지나친 총애로 방종해져서 갈수록 괴이하고 거친 행동을 하게 된다. 이것들은 모두 강희제가 윤잉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는 계기가 된다. 결국 강희 47년(1708년), 더 이상 참지 못한 강희제가 윤잉을 태자의 자리에서 폐위시킨다.
윤잉이 쫓겨난 후, 윤제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자신이 태자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적자가 없으면 장자가 태자로 되는 것이니, 결국 황장자와 황이자의 싸움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윤제는 윤잉이 폐위된 후 너무 지나치게 흥분하고 기뻐했다. 그리하여 강희제는 그에게 불만을 가지게 된다. 윤잉이 폐위된 초기 강희제는 윤제와 옹정제로 하여금 잠시 윤잉을 감시하도록 한다. 이때 옹정제는 강희제에게 상소를 올려 윤잉을 용서해달라고 청한다. 그러나 윤제는 전혀 동정하지 않고, 윤잉을 감시할 때 비우호적이었다. 이는 모두 강희제로 하여금 윤제의 심리상태에 대한 의심을 품게 만든다. 강희제는 윤제는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자이고, 태자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여기게 된다.
이어서, 윤제는 윤잉이 폐위된 후 갈수록 활동이 활발해진다. 그러나 강희제는 더욱 그에게 반감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강희제는 명확하게 여러 신하들에게 공표한다. 설사 윤잉이 폐위되었지먼, 그는 윤제를 태자로 세우지 않겠다고. 그리고 윤잉을 감금하는 동시에, 강희제는 백관들에게 명을 내린다: "짐이 이전에 직군왕 윤제로 하역므 짐의 신변을 호위하게 하였지만, 윤제를 황태자로 삼을 뜻은 없었다. 윤제는 성격이 조급하고, 우둔하니 어찌 황태자가 될 수 있겠는가?"
이 말이 나오자, 그것은 강희제가 윤제의 황위계승권을 영원히 박탈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윤제는 마침내 자신이 이전에 윤잉에게 했던 행동들이 아무런 소용없는 짓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제야 그는 부친 강희제가 자신에게 불만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황장자와 황이자의 싸움은 양패구상으로 끝이 난다. 다만 윤제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다시 머리를 굴린다. 그는 황팔자 윤사를 황태자로 만들기로 결심한다.
황팔자 윤사의 생모인 양비(良妃)는 신자고(辛者庫)의 죄적(罪籍) 출신이다. 그래서 황팔자는 어려서부터 윤제의 생모인 혜비에 의해 길러졌다. 황팔자는 혜비의 양자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혜비와의 관계로 윤제는 황팔자 윤사와 사이가 비교적 좋았다.
그러므로, 윤제는 황팔자 윤사를 태자로 만들어 미래 황위에 오르게 하는 것이,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리하여 윤제는 황팔자를 돕는 활동을 활발하게 개시한다.
강희제는 태자를 폐위한 후 약간 후회를 한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강희제가 가장 아끼는 아들은 역시 윤잉이었다. 그래서 강희제는 다시 윤잉을 황태자로 세우고 싶어 한다. 다만 어쨌든 윤잉을 황태자에서 폐위시킨 것이 자신이다. 그러나 자신이 스스로 예전에 했던 것을 뒤집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강희제는 한가지 방법을 생각해 낸다. 그는 여러 신하들에게 황태자를 누구로 하면 좋을지 후보를 적어내게 한다. 강희제는 원래 윤잉이 태자로 여러 해 있었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윤잉을 다시 황태자로 세우자고 할 줄 알았다. 그러나 결과는 강희제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황팔자는 사람됨이 온후하고 세심했다. 그는 여러 방면에서 자신의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고, 사람들의 마음을 많이 휘어잡는다. 그래서 당시 여러 황자들 중에서 인망이 가장 높았다. 그리하여 중신 퉁국유(佟國維)와 마제(馬齊)를 위시한 여러 신하들은 연명으로 황팔자를 황태자로 세우자고 추천한다.
이렇게 되니 오히려 황팔자 윤사를 해치는 꼴이 되었다. 강희제는 황팔자가 결당영사하고 태자의 자리를 도모하려는 혐의가 있다고 본 것이다.
이쪽에서 퉁국유와 마제가 황팔자를 황태자로 추천하고, 저쪽에서는 윤제가 황팔자를 위하여 금상첨화하고자 한다.
윤제는 강희제에게 진언한다: "윤잉의 행위는 비열하여, 인심을 잃었습니다. 술사 장명덕(張明德)은 윤사의 관상을 보고 크게 귀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일 윤잉을 주살하실 것이면 부황이 손을 쓰실 필요가 없습니다."(청사고.열전7,제왕6)
윤제의 이 말을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쨰는 강희제에게 윤잉은 평소 품행이 괴이하여 인심을 잃었으니 현재 모두 황팔자를 태자로 추천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 말에 숨은 뜻은 황팔자가 인심을 얻었으며, 관상가 장명덕도 황팔자의 관상을 보고 크게 귀한 상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뜻은 황팔자 윤사가 황제가 될 명운을 타고 났다는 말이다.
둘째는 강희제가 폐태자 윤잉을 죽이고, 황팔자를 황태자로 세울 생각이면, 미래의 황위다툼의 후환을 막기 위하여, 만일 윤잉을 죽여야 한다면, 나 윤제가 부친을 대신하여 처리하겠다는 말이다.
이 일은 역사상 "장명덕상면(張明德相面)"사건이라 부른다. 이는 윤제가 저지른 가장 최악의 잘못이며, 가장 멍청한 짓이다. 이 말은 윤제가 이전에 윤잉에 대해 나쁘게 말한 것은 모두 윤잉을 끌어내리기 위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강희제는 윤제의 동기를 의심한다. 그리고 윤제가 악독하게도 동생을 죽이겠다고 하였다. 이는 강희제가 용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강희제는 이 말을 들은 후 대노한다. 윤제를 짐승이라고 욕하고, 사람을 보내 윤제를 감시하게 한다. 황삼자 윤지는 태자 윤잉의 충성스러운 일당이다. 황삼자 윤지는 윤제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듣고, 윤제가 지금까지 계속하여 윤잉을 모함했다고 의심한다. 그리하여 배후에서 사람을 보내 윤제를 조사한다. 그 결과 황삼자 윤지는 윤제가 몽고라마와 결탁하여 윤잉을 저주했다는 것을 밝혀낸다. 그리고 장명덕을 자객으로 삼아 윤잉을 암살하려고 했다는 것도 밝혀낸다. 그리하여 황삼자는 이 일을 부친 강희에게 보고한다. 이를 알고난후 강희제는 진노하여, 몽고라마와 장명뎍을 체포한다.
장명덕을 고문한 후, 강희제는 알 수 있었다. 윤제는 일찌기 장명덕을 자객으로 보내 윤잉을 죽이려 했었다는 것을. 그렇게 되자 강희는 분노하여, 윤제에 대하여 "군신의 대의도 모르고, 형제의 정도 모르니, 천리와 국법에서 모두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한다.
겉으로는 혜비가 윤제를 보호하지 않으려 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보호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윤제의 불효죄를 고발까지 한다. 다만 실제로 이는 혜비의 후궁지혜이다. 혜비는 강희제의 3명의 황후가 전후로 사망한 후, 후궁을 여러 해동안 관리했다. 그녀는 정치적인 두뇌와 기지가 있는 여인이다.
혜비는 강희제의 분노하에 용서해달라고 청하면 청할수록 오히려 윤제를 사지로 몰아넣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고의로 보호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윤제에게 낙정하석한다. 강희제에게 생모조차 사랑하지 않는 가련한 아이라는 인상을 준다. 강희제는 역사상 유명한 자식을 아끼는 자부이다. 그는 윤잉에 대하여 지나치게 애정을 쏟은 외에, 모든 아들에게 다 잘해주었다. 그래서 강희제는 혜비의 글을 보자 분노를 누그러뜨린다. 차마 아들을 죽이지 못한다. 그리하여 강희제는 윤제를 직군왕부내에 평생 감금하도록 명한다.
이 일은 황팔자에게 액운이 된다. 강희제는 그에 대해 의심하고 반감을 갖는다. 강희제는 황팔자와 윤제가 결탁하여 나쁜 일을 꾸몄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윤제를 감금하는 동시에, 황팔자도 강희제에 의해 감금된다.
어떻게 보면 이 '장명덕상면사건'은 윤제가 돌맹이를 들어 자기 발등을 찍은 셈이다. 그의 이런 행동은 멍청한 일당의 행위로 인하여 원래 아주 좋았던 형세가 급격히 나빠진 것과 같다. 그는 자신뿐아니라 황팔자 윤사까지 망쳐버린 것이다.
비록 황팔자는 단기간의 감금후 강희제에 의해 해제되지만, 윤제의 이번 멍청한 행동은 황팔자의 강희제의 마음 속에 건립되어 있던 팔현왕(八賢王)의 이미지는 완전히 깨져버리게 된다. 이전에 강희제는 확실히 황팔자의 탁월한 재능과 인망을 얻은 인품을 좋아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이후 강희제는 황팔자에 대하여 반감과 혐오감이 커지게 된다. 그리하여 황팔자는 그후 강희제에게 계속 견제당한다.
윤잉이 두번째 폐위될 때, 황팔자와 강희제간에 "폐응사건(斃鷹事件)"이 다시 발생한다. 강희53년(1714년), 십일월 이십육일, 강희제는 열하로 가서 순시하는 도중에 밀운 일대를 지난다. 황팔자는 원래 그의 곁을 따라가야 했지만, 당시 맟미 생모 양비의 3주년 기일이어서, 그는 모친의 제사를 지내러 간다. 떠나기 전에 안부인사를 하기 위하여, 태감을 강희제에게 보내 연유를 설명하고, 탕천(湯泉)에서 부황을 기다려 함께 북경으로 돌아오겠다고 말한다.
이건 원래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일이 안되려고 그랬는지 태감을 통해 강희제에게 매(老鷹)를 올렸는데, 열어보니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강희제는 극히 분노한다. 이는 황팔자가 자신을 저주하는 것이라 여긴 것이다. 그래서 여러 황자를 불러모아서 다시 황팔자를 질책한다. 그리고 말한다: "지금부터 짐과 윤사의 부자간의 인연은 끊겠다."
강희제가 부자간의 연을 끊겠다는 말까지 했으니, 황팔자 윤사는 이제 황위와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윤제는 동생을 죽이려 했던 죄인이다. 또한 그는 자신의 손으로 스스로 죄인이 되었다. 그래서 윤제는 '구자탈적'중에서 유일하게 사후에 용서받지 못한 황자가 된다. 그것은 모두 스스로 자초한 화라고 할 수 있다.
기실 윤제의 이런 멍청한 짓을 보면 옹정제는 확실히 윤제에게 감사해야 한다. 윤제의 그런 멍청한 짓이 없었더라면, 옹정제는 어무리 하더라도 강희제의 눈에 들어 황위를 이어받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옹정제는 윤제와 그의 모친 헤비에 대하여 그다지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혜비의 말년은 아주 처량하고 고독했다.
옹정이 즉위한 후, 많은 형제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강희제의 후궁비빈중에서도 여러 명이 받아들이지 못한다. 가장 전형적인 것은 바로 황구자의 생모인 의비(宜妃)이다. 강희제는 생전에 4대비(四大妃)가 있었는데, 각각 황장자 윤제의 생모인 헤비, 황오자 윤기(胤祺)와 황구자 윤당의 생모인 의비, 옹정제와 황십사자 윤제의 생모인 덕비(德妃), 그리고 황삼자 윤지의 생모인 영비(榮妃)이다. 4비중에서 혜비가 가장 서열이 앞섰고, 의비는 가장 강희제의 총애를 받았다.
의비는 친아들 황구자와 한편에 선 황팔자를 계속 지지해왔다. 그래서 옹정제 즉위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기 위해, 그녀는 옹정제의 생모 덕비를 무시한다. 강희제의 제사를 지낼 때, 의비는 고의로 이미 옹정제에 의해 황태후에 봉해진 덕비를 앞서서 걷는다. 이는 옹정제 모자에 대한 극도의 멸시와 불만이다. 이는 의비가 옹정제에게 아주 불만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청궁의 법도에 따르면, 선황이 돌아가신 후, 비빈중 아들이 있으면 대다수는 궁에서 나가 아들이 말년을 봉양한다. 아들이 없으면 친정으로 돌아가거나 혹은 자금성 영수궁(寧壽宮)에 남아 현임황제의 봉양을 받는 것이다.
헤비는 친아들인 윤제가 감금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영수궁에 남아 옹정제에게 말년의 봉양을 받는 것, 또 하나의 선택은 양자인 황팔자의 집으로 가는 것이다. 황팔자 윤사의 생모인 양비는 일찌기 사망하였으므로, 황팔자는 혜비를 봉양할 수 있다. 그리하여 헤비는 황팔자의 염친왕부(廉親王府)로 간다.
법도에 따르면, 이미 궁을 나간 태비는 매번 명절때면 궁으로 들어와서 현임황제와 황태후에게 문안인사를 해야 한다. 그러나 황구자의 생모인 의비는 옹정제의 승계에 아주 불만이어서, 옹정제의 즉위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기 위해 그녀는 혜비 및 황삼자의 생모인 영비 및 일부 지위가 낮은 강희의 서비들과 연합하여 입궁해서 옹정제에게 문안인사를 하지 않는다.
이들 태비들의 행위는 옹정제를 화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옹정제는 고의로 이들 태비를 무시했다. 나중에 황팔자와 황구자가 옹정제에 의해 죽임을 당한 후, 의비는 백발인이 흑발인을 먼저 보내는 고통을 겪게 되니 정신적인 타격이 심했다. 그래도 그녀에게는 또 다른 아들인 황오자 윤기가 있었고, 그녀는 그후 윤기의 집에서 지내게 된다.
그러나 혜비는 비교적 비참했다. 황팔자가 죽은 후, 염친왕부는 몰수된다. 황팔자 윤사의 유일한 아들인 홍왕(弘旺)조차도 옹정제에 의해 이름을 보살보(菩薩保)로 개칭되어 종인부(宗人府)에 감금된다. 친아들 윤제는 계속 감금되어 있었다. 그래서 혜비는 말년에 갈 곳이 없었고, 옹정제는 그녀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한다. 자금성 영수궁으로 오거나, 강희제의 다른 아들 중에서 그녀를 봉양하고자 하는 아들에게 가거나. 황실은 정이 별로 없다. 하물며 생모도 아닌데 어느 황자가 그녀를 봉양하려 하겠는가. 그래서 혜비는 할 수 없이 옹정제에게 고개를 숙이고, 자금성 영수궁으로 되돌아와서 거주하게 된다.
설사 자금성으로 되돌아왔지만, 옹정제는 혜비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혜비의 말년은 처참했다. 옹정10년(1732년) 혜비는 영수궁에서 고독하게 죽는다.
혜비는 비교적 정치적 두뇌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아들은 너무 형편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양자인 황팔자 윤사를 더욱 좋아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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