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관첩(關捷)
애신각라. 윤지(1677.3.23.-1732.7.10)는 강희제의 셋째아들이다.
만주황실의 말타기 활쏘기에서 윤지는 24명의 황자들 중에서도 제 일류였다. 강희31년(1692년) 그는 겨우 15살의 나이였는데, 강희제를 따라 사냥을 나섰을 때,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한 부친과 대결을 벌여서 막상막하를 이룬 적이 있다. 특히 돋보이는 것은 그가 학자형, 예술가형의 인재라는 것이다. 그는 두 개의 문화사업을 주재했다. 하나는 <율력연원(律曆淵源)>의 편찬이고 다른 하나는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을 편찬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서예와 시가도 청나라때 영향이 있었고, 이로 인하여 강희제의 사랑을 받는다. 강희37년(1698년)에 그는 성군왕(誠郡王)에 봉해진다.
이런 유형의 왕야라면 정치적 변혁기에도 평안하게 일생을 마쳐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았다. 현재 남아있는 자료들을 보면, 그는 성격이 담백하고, 황위쟁탈전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옹정제는 그를 구금시켜 죽였을까?
윤지의 마음은 기실 완전히 고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학술연구와 예술창작을 하는 동시에, 자신과 궁중정치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 못했다. 그는 정치적으로 총명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심지어 우둔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강희38년 구월, 강희제의 총애를 받던 민비(敏妃), 즉 십삼아거(十三阿哥) 윤상(允祥)의 생모가 사망한 백일내에 예법을 잘 아는 윤지가 법도를 어겨 머리카락을 잘랐다. 군왕에 봉해진지 1년밖에 안된 그는 부친에 의해 군왕직을 삭탈당하고, 패륵(貝勒)으로 강등된다. 비록 10년후에 다시 친왕(親王)으로 승격되었지만, 경력에서 불효라는 오점을 남기게 된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 십삼아거 윤상은 사아거 윤진(胤禛) 즉, 나중의 옹정제와 가장 가까운 사이였다는 것이다.
강희47년(1708년), 강희제가 황태자 윤잉(胤礽)을 제1차 폐출했을 때, 강희제는 윤지가 황태자 윤잉과 평소에 관계가 친밀했다는 것으로 인하여, 그를 불러서 물어보기도 했다. 비록 윤지를 용서하기는 했지만, 그는 분명하게 태자당의 일원으로 인정된 것이다. 실제로 그의 비극은 이때 이미 심어졌다. 1년후 윤잉이 다시 태자위에 복귀하는데, 윤지는 이로 인해 친왕으로 승격된다. 그는 태자당임이 더욱 확실해 진 것이다. 그는 여기에서 멈춰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후에도 여전히 윤잉과 친밀하게 지냈다. 학자로서, 예술가로서 그는 윤잉에게 모든 것을 걸어서는 안되었다. 탈속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면 속세의 죄를 뒤집어 쓸 수밖에 없다.
옹정제가 즉위하자, 먼저 윤지를 경릉(景陵)르로 보내어 부황 강희의 능을 지키게 한다. 이것은 분명하게 탄압하는 것이다. 성친왕(誠親王) 윤지는 이때라도 눈치를 채고 조용히 지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계속 불평불만을 쏟아냈다. 누군가 그가 터트리는 불평과 불만의 소리를 정리하여 옹정제에게 보고한다. 옹정제는 계속 그에게 신호를 보냈다. 옹정2년(1724년) 윤지의 셋째아들 홍성(弘晟)이 죄를 지어 세자(世子)의 지위를 삭탈당하고 한산종실(閑散宗室)이 된다. 왕위승계인조차 없게 된 것이니, 왕위가 얼마나 오래 갈 수 있겠는가? 윤지는 이때도 깨닫고 경각심을 갖지 못한 것같다. 바꾸어 말하면 그는 옹정제가 보내는 신호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4년후, 그는 부정부패를 저지른다. 옹정6년(1728년) 육월, 그는 쑤커지(蘇克濟)라는 산서순무(山西巡撫)에게 뇌물을 요구한다. 사건이 발각된 후, 윤지는 조정에서 그를 힐문하는 대신에게 욕을 해댄다. 옹정제는 그에게 '인신지례(人臣之禮)가 없다'고 질책하다. 그의 죄를 논한 후에 조정에서는 그의 작위를 삭탈한다. 그리고 자신의 저택에 연금된다. 그는 군왕(郡王)으로 강등된다. 2년후, 즉 옹정8년(1730년) 이월, 옹정제는 다시 그에게 기회를 준다. 친왕의 작위를 회복시켜 준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윤지는 이 기회를 또 버린다. 3개월후, 옹정제가 가장 아끼던 심삼아거 이친왕(怡親王) 윤상의 장례때, 윤지는 늦게 도착했을 뿐아니라, 얼굴에 슬픈 기색도 없었다. 옹정제는 그에게 철저히 실망하여 장탄식을 한다: "성친왕과 같은 재능이라면 아주 잘 쓸 수 있는데, 그의 마음 때문에 부득이 버려두고 쓸 수가 없다. 짐의 사십년 형제는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는데 그를 쓰기가 어려운 것이 이와 같구나." 말을 마치고 그는 윤지의 작위를 박탈하고, 경산(景山)의 영안정(永安亭)안에 연금한다. 2년 3개월후, 즉 옹정10냔(1732년) 윤지는 연금당한 상태로 사망한다. 청나라조정은 군왕의 예로 안장한다.
전체 과정을 보면, 윤지는 한 마음으로 독서하던 순수한 선비는 아니었다. 그의 마음은 비교적 복잡했던 것같고, 그다지 지혜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이와 비교하면 이십일아거(二十一阿哥) 윤희(允禧)야말로 진정한 탈속한 예술가였다.
애신각라. 윤희(1711.2.27-1758.6.26). 자는 겸재(謙齋), 이고 호는 자경(紫瓊)이다. 별호는 자경도인(紫瓊道人), 춘부거사(春浮居士)등이다. 시와 부에 능했고, 서화에 뛰어났다. 저서로 <화간당시초(花間堂詩抄)> 8권, <자경암시초(紫瓊巖詩抄)> 3권등 여러 시문저작이 있다. 왕실자제들 중에서는 그와 비견할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옹정8년(1730년) 오월, 패자(貝子)에서 패륵(貝勒)으로 승진한다. 십일년 팔월에는 상황기 만주도통이 된다. 건륭제가 즉위한 후에는 신군왕(愼郡王)으로 오른다. 건륭3년(1738년) 칠월에는 의정왕(議政王)이 된다. 창작을 계속했고, 관직도 높았다.
삼아거와 이십일아거를 비교하면 차이가 너무나 크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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