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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정치

왕후닝이 시진핑을 오도하고 있다.

by 중은우시 2019. 6. 4.

글: 하소강(夏小强)


서열이 중국공산당 정치국상임위원 제5위인 왕후닝은 서생으로 관직에 나갔다. 그는 일찌기 푸단대학 국제정치전공 법학석사, 교수, 박사지도교수를 지냈고, 일찌기 미국에 방문학자로 간 적이 있다.


왕후닝은 1980년대에 이미 학술계에서 유명한 청년학자였다. 당시 <반월담(半月談)>등 시사잡지의 표지인물이었으며, 당시 중국공산당 상해시위 선전부의 책임자로부터 주목을 받고, 일찌기 중국공산당 13대이래 중국공산당의 중요한 이론문헌의 초안작업에 참여했다. 1993년, 왕후닝은 푸단대학 변론팀 고문의 신분으로 '국제대학변론대회'에서 1등을 해서 이름을 떨친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1989년 왕후닝은 미국에 방문학자로 갔는데, '6.4'이후 프랑스에 3개월간 피신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학생운동을 지지하는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1989년 4월, 상해는 북경학생들의 항의에 영향받아 푸단대학 캠퍼스에서도 금식, 강연, 시위가 나타난다. 항의에 참가한 젊은 교직원이 교수들로부터 청원서에 서명을 받으러 다녔다. 그들은 왕후닝에게 서명해달라고 했으나, 그는 거절한다. 반대로, 왕후닝은 항의에 반대하는 문건에 서명했다.


<종람중국>의 주편인 천쿠이더(陳奎德)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는 그의 정치태도를 더욱 명확히 했다. 그는 학생운동을 지지하지 않았다."


1989년, 당시 상해시위서기이던 장쩌민은 상해 학자를 소집하여 회의를 연다. 그리고 <세계경제도보>에 대한 정풍을 설명한다. 대다수의 참여자들은 세계경제도보를 탄압하는데 반대하였지만, 왕후닝은 공개적으로 지지한다. 그의 태도는 장쩌민과 쩡칭홍으로부터 높이 평가받는다.


1995년 4월, 우방궈, 쩡칭홍의 추천하에, 왕후닝은 당시 중국공산당 총서기이던 장쩌민에게 발탁되어 북경으로 간다. '특별조리'의 신분으로 중국공산당 중앙정책연구실 정치조 조장이 된다. 1998년 4월, 중앙정책연구실 부주임이 되고, 마지각으로 2002년 11월 중앙정책연구실 주임으로 승진하며, 제16기 중국공산당 중앙위원에 당선된다.


2017년 10월 25일, 62세의 왕후닝은 중국공산당 19기 1중전회에서 서열5위의 중앙정치국 상임위원과 서열1위의 중앙서기처 서기가 된다. 나중에 다시 중앙정신문명건설지도위원회 주임을 겸임하며, 전국의 이데올로기업무를 책임지고, 계속하여 중앙전면심화개혁영도소조판공실 주임을 맡는다.


주요기획자로서 왕후닝은 직접 장쩌민의 "삼개대표"중요사상, 후진타오의 "과학적발전과" 및 시진핑의 "신시대중국특색사회주의사상"등 정치이론과 사상을 기초한다. 역대 중국공산당 3대의 총서기들에 의하여 중국고위층의 중요한 이론적 두뇌로 인정받는다.


모두 알고 있다시피, 중국고위층은 권력을 쟁탈하기 위하여, 너죽고 나살기식의 정치투쟁을 진행하는 것이 통상적이고, 중국공산당의 역사는 동시에 하나의 권력투쟁사이다. 후진타오와 장쩌민, 다시 시진핑과 장쩌민, 그들 사이의 정치투쟁은 아주 격렬했다. 암살정변도 끊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왕후닝은 그다지 많은 정치적 배경을 지니지 않은 평민학자로서 서로 적수인 중공3대당수의 두뇌가 되고 신임을 얻어 중용되엇는데,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견해에 따르면, 바로 왕후닝이 평민출신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다지 큰 정치적 배경이 없고, 사람됨이 조용하고, 고위층에 의하여 발탁된 후에도 자신의 정치세력을 키우지 않았다. 그 결과 최고권력자에게 위협이 되지 않아서 위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이 말은 비록 사실이기는 하지만, 왕후닝이 정계에서 오뚜기가 된 주요한 원인은 아니다.


중국공산당의 이데올로기와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원천은 원래 왜곡된 사상이다. 중국공산당이 실행하는 것은 무슨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다. 그저 깡패정치이고, 사교통치이다. 장쩌민이 64사태로 권력정점에 오른 후, 중국공산당의 이데올로기와 이론은 완전히 파산되었다.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중국공산당은 마르크스레닌이론을 잘 알고 있는 전문가가 필요했다. 그들을 통해서 이론을 만들어내야만 했다. 왕후닝은 '정치화장사'의 최고후보자였던 것이다.


왕후닝이 중공3대지도자들이 만든 3개의 이론은 남원북철(南轅北轍)로 상호 모순된다. 중국공산당 이외의 이론가들이 보기에 비웃을 만한 일이다. 다만, 이들 이론은 중국지도자들의 득의의 작품이 된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역시 중국공산당체제가 극도로 기형적이고, 중국지도자들이 자신감이 부족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당내권력투쟁의 필요가 있다. 왕후닝이 이들 쓰레기이론을 만들어 내서, 떠받들게 해주었기 때문에, 왕후닝은 권력귀족에 오른 것이다.


더욱 심층적인 원인은 왕후닝이 이들 이론을 이용하여, 거기에 교언영색을 합쳐서, 주공을 미혹하고 망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의 간교한 점은 허위의 이론으로 권력자를 오도하여, 그가 잘못된 판단과 잘못된 의사결정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시진핑은 미중무역전에서 형세를 오판하고, 협상을 교착상태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 배후에는 왕후닝이 있다. 최근 미국에 대하여 선전전을 일으킨 왕후닝은 새로운 직위를 하나 맡았다. 그것은 바로 "불망초심(不忘初心), 뇌기사명(牢記使命)"주제교육공작소조 조장이다.


협상이 파국에 이른 후, 중국공산당 정치국회의는 6월부터 전체 당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소위 '불망초심, 뇌기사명'주제교육을 전개하기로 결정한다. 회의에서는 또한 "계속하여 당의 집정하는 계급기초와 군중기초를 공고히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게급'과 '군중'이라는 말은 마치 문혁시대로 되돌아간 듯하다.


왕후닝이 주관하는 중앙선전부는 글을 내서 CCTV 영화채널과 전국의 모든 성급위성TV는 5월 16일부터 매일 저녁 황금시간대에 항미영화를 내보내도록 지시했다. 이를 통해 '항미사기'를 진작시키겠다는 것이다.


요 몇년동안, 왕후닝의 조종하에, 중국공산당의 매체들은 시진핑의 일련의 '고급흑', '저급홍' 그리고 시진핑의 미중무역전, 국내정치, 외교등 여러 방면에서 잘못된 대응을 했다. 그리하여 진퇴가 곤란하고, 내외적으로 곤경에 빠지며, 시진핑이 국제사회에서 웃음거리가 되도록 만들었다. 최종적으로는 비극이 되게 만들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간신은 모두 군주가 실정망국하도록 만드는 주요한 요소이다. 전국시대에 관자는 이렇게 말했다: "간신은 그 주인을 망하게 만든다. 조금씩 축적되기 때문에, 주인이 미혹되며 깨닫지 못한다."


지금, 시진핑의 주변에는 간신으로 둘러싸였다. 왕후닝은 시진핑 정치의사결정의 주요인물로서, 현재 시진핑을 오도하여 점점 더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몰고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