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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진실한 원소(袁紹): 인품이 너무 훌륭해서 실패하다

by 중은우시 2019. 3. 28.

글: 최애역사(最愛歷史)


중국의 전통적인 역사관념에서 원소는 지금까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는 인물이다. 그는 좋은 카드를 쥐고 있으면서도 계속 잘못된 결정을 내렸다. 전통적인 견해로 보자면, 이는 그가 강퍅자용(剛愎自用), 유용무모(有勇無謀)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바로 그가 관도지전에서 지휘를 엉망진창으로 하여 결국 패배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그러나, 사서를 살펴서 진상을 복원해보면 원소는 정말 <삼국연의>에서 쓴 것처럼 멍청하고 쓸모없는 인간이었을까?


여기에서  진실한 원소가 바로 진정한 영웅이라는 것과 그의 비극적인 인생 그리고, 생전과 사후의 일들을 얘기하고자 한다.


한나라말기의 여러 영웅들과 군벌등 중에서, 원소는 출신이 가장 고귀하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조상은 연속 4대에 걸쳐 "삼공(三公)(태위, 사도, 사공)"의 직위에 있었다. 비록 가족의 권력이 천하를 뒤흔들 정도였지만, 원소의 가족 5대는 계속하여 공의(公義), 염정(廉正), 박애(博愛), 그리고 아랫사람들을 예의로 대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전체 동한왕조에서 명성이 아주 좋았다.


원소의 가족에 대하여, <삼국지>의 작자인 진수와 주석자인 배송지는 당시의 동시대인들의 평가를 인용했는데, 원소의 가족은 "위천하소귀(爲天下所歸)"의 명문가족이다. 그러므로, 한나라말기, 설사 권신 양기(梁冀)와 같은 간신도, 원소의 조상과 가족을 아주 존중했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는 원소가 성공하는데 아주 큰 정치적 자본이 된다.


원소는 비록 최고의 명문집안 출신이지만, 원소의 가족내에서의 지위는 높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그저 첩이 낳은 '서출'인 자식이었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사료를 보면, 원소의 부친인 원륭(袁隆, 역시 '삼공'에 오른 권신임)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중 원술(袁術)은 정실부인이 낳은 적자이고, 원소는 아마도 노비 소생의 아들일 것이다. 나중에 군벌혼전때, 한번은 원술이 아주 화가나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도대체 천하의 명사들이 어떻게 된 일이냐. 나에게 와서 의탁하지 않고, 굳이 원소같은 우리 집안의 '노가자(奴家子)'를 지지한단 말인가.


이를 보면 알 수 있다. 원소는 비록 출신이 고귀하긴 하지만, 적출을 중시하던 고대에 집안내에서의 지위는 높지가 못했다. 원소는 자신의 개인적인 능력과 식견, 명망을 가지고 점점 역사무대로 오른 것이다.


귀족출신의 '노가자' 원소:  덕으로 사람들을 모으다(以德服人)


원소가 출생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의 부친 원륭이 사망한다. 그러나 원소는 영웅의 풍모를 타고 났고, 영준하며 시원시원했다. 그의 숙부인 원괴(袁傀, 역시 삼공에 오름. 동한의 태부였다)는 그를 아주 좋아했다. 원소도 숙부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20살때 '복양장'이 된다. 관리로 있을 때도 '청명'을 떨친다. 청렴하며 공정한 것으로 당시에 이름을 떨친다.


원소는 효심이 있었다. 모친이 사망한 후, 원소는 모친을 위하여 3년상을 치른다. 3년후, 원소는 다시 그가 태어나자마자 돌아가신 부친을 위하여 다시 3년상을 치른다. 원소는 전후로 모두 6년간 부모상을 지낸 것이다. 귀족가문에서 태어난 공족자제에게 이런 효심이 있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원소는 아랫사람들을 예의로 대했다. 그리하여 많은 선비들이 그를 따른다. 나중에 원소를 격패시키는 조조도 젊었을 때 원소와의 관계가 아주 좋았다. 조조는 환관집안 출신이다. 그의 양할아버지는 조등은 동한의 대환관이다. 부친 조숭은 관직이 태위(지금의 국방부장관)에 이른다. 이치대로라면, 환관세력과 조정세력은 세불양립이다. 그러나 조조는 원소의 사람됨을 존경하여, 원소를 형장(兄長)과 명사로 대한다. 나중에 원소가 동한의 고위장수가 된 후, 조조는 그의 수하에서 하급장교를 지낸 바 있다. 나중에 원소와 함께 동탁을 토벌하는데 참가한다.


동한말기의 영웅들 중에서 원소가 처음에 가장 세력이 컸다. 그는 기주, 유주, 병주, 청주의 4곳을 차지한다. 지금의 하북성 일대지역을 장악한 것이다. '병력을 백만 가지고 있으며, 군량미는 10년을 먹을 수 있을 정도"였다. 실력이 대단했다. 그와 반대로 집안의 적자인 원술은 인재를 거두지도 못하고, 상갓집 개처럼 이곳저곳을 떠돌고 있었다. 동한 말기의 인재와 군웅들의 눈은 정확했다. "사람은 현명한 군주를 찾아서 일을 도모하고, 새는 좋은 나무를 찾아서 둥지를 튼다." 품성이 고상하고, 용맹한 원소에게는 많은 인재와 추종자들이 따랐다.


환관집단을 없애버리다: 중요한 때의 지도자였다.


동한말기, 환관세력이 창궐했고, 외척, 조신(朝臣)과의 투쟁이 갈수록 치열해진다. 동한말에 이르어, 대장군 하진(何進)이 권력을 장악하고, 환관을 없애고자 했지만, 당시 환관은 그 소식을 들은 후 하진에게 약세를 보이며 '대장군의 처분만 가다리겠습니다'라고 한다. 그러면서 암중으로 밀모를 꾸며서 먼저 손을 써서 하진을 죽이고자 한다.


이 위기의 순간에, 원소는 안목이 뛰어났다. 원소는 즉시 하진에게 건의한다. 이전에 조정신하들이 환관을 없애려 했으나 실패했고, 오히려 그들에게 집단적으로 도륙당했다. 만일 유리한 시기를 잡아서 환관집단을 없애버리지 않으면, 조정에 다시 대란이 일어날 것이다. 원소는 여러번 건의한다. 그러나 하진이 계속 듣지 않았다. 결국 환관 중상시 단규등에게 속아서 낙양의 궁중에서 살해당한다.


이렇게 동한에서는 천하대란이 시작된다. 이 위기일발의 순간에 원소는 신속히 병력을 이끌고 황궁에 진입하여, 환관 2천여명을 참살하고, 오랫동안 동한조정에 해를 끼치던 환관세력은 이제 씨가 말라버린다. 그리하여 전체 동한의 문관집단은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원소의 이번 반란평정은 의미가 크다고. 설사 지도자급인물이 이미 피살되었지만, 침착하고 용기있던 원소는 여전히 뜻을 계속하여 결국 조정대국을 안정시켰다. 만일 나중에 동탁의 난이 없었더라면, 한나라말기의 조정은 아마도 또 다른 모습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어서, 군벌 동탁이 빈틈을 노려 쳐들어온다. 낙양에 진입한 후 동한말기의 난세가 벌어진다.


동탁이 낙양에 진입한 후, 원소는 기주로 도망친다. 전체 원씨가족도 동탁에 의해 멸족된다. 이에 대하여 당시 전체 동한의 조야 상하는 원씨가족을 아주 동정했다. 당시의 사람들이 보기에, 원소의 가족 5대는 충성스럽고 의리있으며, 특히 원소는 환관집단을 주살하고, 군벌에 대항하다가 오히려 멸족을 당한 것이다. 이 얼마나 참혹한 일인가.


위기에도 두려움이 없는 용감한 전다: 생사를 도외시하다.


그러므로, 나중에 각로의 군벌들이 집합하여 동탁을 토벌할 때, 원소를 '맹주'로 추대한 것이다. 이는 아무에게나 맡긴 것이 아니다. 만일 천하가 따르는 덕망, 집안배경과 실력을 모두 갖추지 않았다면 맹주의 자리는 차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연합군이 분멸된 후, 각로군벌은 각자도생하며 근거지를 확보하고 확장하기 시작한다. 당시 북방에서 다투던 양대 영웅중 원소와 조조는 가장 전형적인 대표인물이다.


원소는 기주를 근거지로 하여, 유주, 병주, 청주를 연이어 함락시켰다. 그리고 공손찬과 싸울 때 원소는 겨우 100여명의 보병을 가지고, 돌연 공손찬의 2000여명의 정예기병부대에게 기습을 당한다. 그때 원소는 겹겹이 포위망에 쌓여 있었고, 화살이 비오듯이 쏟아지는 위급한 상황하에서 수하가 그를 끌고 담장 아래의 공터로 몸을 숨기게 하려 하자, 원소는 투구를 벗어서 땅바닥에 던지며 일갈한다: "대장부가 적을 맞이하면 싸우다 죽어야지, 어찌 숨어서 목숨을 구하려고 한단 말인가" 그리고 수하와 함게 용감하게 싸웠고, 마침 원군이 적시에 도착하여 원소는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원소에게는 영웅본색이 있다. 그리고 냉정함도 잃지 않았다. 공손찬을 무너뜨린 후, 한번은 원소가 빈객 및 장수들과 모임을 가졌다. 그때 소식이 돌연 전해진다. 후방의 성이 점령당했고, 반군의 수가 수만명에 달한다고.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대경실색하고, 모두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며 속속 눈물을 흘렸다. 당시 원소의 가족도 반군에게 납치당했다. 그러나 원소는 그 말을 들은 후에도 냉정을 유지하며, 부하들을 다독이고, 군심을 바로잡았다. 그리고는 결국 군대를 지휘하여 반란군을 진압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반군내에도 원소의 사람됨을 존경하는 사람이 있어 그의 가족을 건드리지 않은 것이다.


전략과 담량이 남다르면서 냉정하고 차분하다. 게다가 신분도 높고, 아랫사람들에게 예의로 대한다. 그러니 얼마 지나지 않아 원소는 기주, 유주, 병주, 청주를 통일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당시 전체 북방에서 가장 강대한 실력자가 된다. 이와 동시에 조조와의 갈등이 점점 첨예화된다.


원소 vs 조조: 한 사람은 인품이 청렴정직하고, 한 사람은 비열하고 덕이 없다.


원소와 비교하자면, 전략이나 전술 소양에서 확실히 한단계 뛰어났다. 조조가 한헌제를 데려가기 전에, 원소의 모사들도 속속 책략을 올려, 원소로 하여금 한헌제를 모셔와 '협천하영제후'하도록 권한다. 그러나 원소는 황제를 모시는게 쉽지 않다고 우려하여 좋은 기회를 놓친다. 그리고 원소가 하북등지를 함락시킨 후, 몇몇 아들을 사방에 분봉하여 파견한다. 이는 나중에 원소의 사후 아들들끼리 권력다툼을 벌이는 빌미가 된다. 시한폭탄을 설치한 꼴이었다.


그러나 인품을 보면, 원소의 인품은 조조보다 훨씬 뛰어났다. 당시의 사람들이 보기에, 조정에 이름을 떨친 공족자제로서 원소의 가족은 오대에 이르도록 인의와 품덕이 뛰어났다. 하북을 다스리는 동안, 원소는 관대하고 인자한 통치로 이름을 날린다. 그리하여 관도지전에서 조조에게 패한 후에도 원소의 본거지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조조가 원소의 지역을 공격하고 북방을 통일한 것은 관도지전후 2년이 지난 때였다. 원소가 병사하고나서야 비로소 조조는 북방통일의 꿈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사람들이 보기에, 조조는 환관가정출신이고, 그의 가짜 할아버지인 조등은 환관으로 불의한 일을 많이 저질렀고, 백성들을 괴롭혔다. 가정배경에서 사람들이 싫어하는 유형이었다. 한나라말기의 평론을 보면, 조조는 의문의 여지없이. "췌엄유주(贅閹遺醜), 본무영덕(本無令德)" 환관의 추악한 후손으로 원래 덕망이랄 것도 없었다. 그리고 조조는 어렸을 때, 개싸움 닭싸움을 좋아하고, 놀고 장난치고 즐기는 것에 빠졌었다. 전형적인 플래이보이형의 인상이다. 사람들에게 그다지 좋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그리고 동탁토벌이 실패한 후, 각로군벌이 서로 싸우는 과정에서, 조조는 반복무상으로 조정신하들을 함부로 죽이고, 자신에 반대하는 신하들을 주살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더욱 심한 경우는 조조가 한나라에 충성하는 왕, 신하, 장수들을 죽였을 뿐아니라, 군대를 조직하여 도처에서 왕후귀족의 능묘를 파헤쳐셔 금은보화를 도굴한다. 심지어 전문적인 도굴관원인 "모금교위(摸金都尉)"를 두어 전국에서 도굴을 자항핸다. 그가 지나간 곳에는 해골뼈다귀도 남지 않았다. 동한말기 동시대인들이 보기에 조조는 아주 인품이 떨어지는 무뢰배였다. 인품으로 보거나 행동으로 보거나 당시의 사람들에게 경멸받는 인물이었다.


조조와 비교하면, 원소에게도 결점은 있다. 전략적인 안목이 부족하고, 전략적인 소양이 부족했다. 모사들의 의견을 듣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결점을 빼고나면, 당시 전체 동한에서 원소의 인품은 모두가 인정했다. <삼국지>와 배송지의 주석을 읽어보면, 동한과 위진남북조시기의 상하에서 원소의 인품에 대하여는 문제삼는 얘기가 거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저 그가 강퍅자용, 유용무모하다는 것이 많을 뿐이다 .반대로, 조조에 대하여는 동한말기의 사람이건 아니면 후대이건 사람됨과 행동에 대하여 보편적으로 나쁘게 평가했다.


관도지전: 진실한 허유는 후안무치한 소인배이다.


그러나, 역사는 이렇게 잔혹하다. 음험한 사람이 마지막에 웃었다.


200년, 당시 전체 북방의 국면을 결정하는 관도지전이 발발한다.


허유는 먼저 원소에게 조조의 후방인 허도(허창)을 기습하자고 건의한다. 사서 기록에 따르면, 당시 원소는 이 건의를 거절한다; 그리하여 허유는 화가 났고, 조조에게 가버린다. 그리고 조조에게 원소가 군량을 놓아둔 본거지 오소(烏巢)를 기습할 것을 건의한다. 조조는 그리하여 원소에게 역습을 하여 대파할 수 있었다.


다만, 역사의 진상은 이러하다. 허유 본인은 아주 욕심많고 방종한 인물이다. 그가 조조에게 간 것은, 당시 원소가 고발을 받았는데, 허유의 가족이 하북에서 교만방자하여, 도처에서 평민들의 재물을 약탈하여 백성들이 공분을 사고 있었다는 내용이다. 당시 원소와 조조간의 전투가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원소는 이를 문제삼지 않았다. 그러나 허유는 자신이 하북에서 벌인 악행이 드러날 지경에 처하자, 즉시 배신하고 적군으로 가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리고 원소의 기밀사항을 모조리 조조에게 알려준다. 그리하여 조조는 반격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원소가 잘못된 사람을 믿은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전투를 앞두고 몇몇의 치명적인 투기꾼들이 배신을 했다. 조조의 정예병이 오소를 습격한다는 말을 듣고, 원소는 즉시 명을 내려 위위구조(圍魏救趙)를 꾀한다. 병력을 많이 동원하여 조조의 본거지를 공격한다. 이는 당시로서는 아주 좋은 계책이었다. 그러나 원소가 보낸 대장 고람(高覽), 장합(張郃)등은 전투 직전에 배신하여 조조에게 간다. 그리하여 원소의 군대는 궤멸하고, 조조는 원소에게서 투항해온 7만여명을 모조리 갱살한다. 


관도지전후, 원소는 여전히 하북을 지키고, 조조는 한 걸음도 들어가지 못한다. 2년후 원소가 병사한 후에 비로소 조조는 원소의 땅으로 대거 진격하여 최종적으로 북방을 통일한다.


원소사후 2년이 지나서, 성격이 광망한 '탐욕스러운' 허유는 결국 이용가치가 다하자 조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당시 전투직전에 배신하고 조조에 투항한 고람은 조운에게 죽임을 당한다.


맹장이라고 불리는 장합은 최종적으로 제갈량의 계책에 의해 사살된다.


이제 관도지전때 원소를 배신한 3명의 중요한 흑수(黑手)들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원소의 사후: 수하는 죽기 전까지도 여전히 그에게 존경을 표하다.


관도지전후, 원소의 중요한 모사 저수(沮授)는 조조에게 붙잡힌다. 그러나 저주는 투항을 거절한다. 신재조영심재원(身在曹營心在袁)이다. 그리고 비밀리에 원소에게로 돌아가고자 시도하나, 결국 조조에게 피살당한다.


원소의 사후, 그의 모사인 심배(審配)는 그를 위해 성을 지키며, 시종 조조에 투항하기를 거절한다. 성이 함락된 후, 심배는 조조를 크게 욕하며, 죽기 전에 심배는 큰 소시로 형을 집행하는 자들에게 말한다: "나를 북쪽을 향하게 돌려서 형을 집행해 달라. 나의 주공(원소)이 북쪽에 있다. 나의 머리는 북쪽을 향헤 떨어져야 한다."


필자는 믿는다. 사후에도 여전히 신하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은 분명히 비범한 인격적 매력이 있는 것이다. 역사는 항상 승자의 것이다. 원소라는 인품이 우수하고, 아랫사람을 예의로 대하며, 용맹했던 귀족자제이며 한말영웅은 최종적으로 비열하고 후안무치한 효웅 조조의 손에 패배한다. 그리고 후세의 소설가들은 무정하게 그를 강퍅자용, 유용무모한 망부(莽夫)이자 군벌로 치부한다.


누가 알고 있으랴. 영웅은 비록 실패하더라도,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