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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북경의 어제

자금성(紫禁城) 융종문(隆宗門)의 화살촉(箭頭)

by 중은우시 2019. 1. 5.

글: 이대취(李大嘴)


북경고궁에는 사람들이 많이 오간다.


만일 주마간산격으로 여행온 사람이라면 아마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융종문의 편액에는 화살촉이 하나 박혀 있다.


먼저, 우리는 융종문의 위치부터 살펴보자.





융종문은 고궁 건청문(乾淸門) 앞 광장의 서쪽에 동쪽의 경운문(景運門)과 대응하는 위치에 있다. 융종문의 북쪽은 양심전(養心殿), 즉 황제가 업무를 보고 휴식을 취하던 장소이다. 서쪽은 자녕궁(慈寧宮), 즉 많은 소설에서 언급되었듯이 황태후가 거주하는 곳이다.


융종문을 들어가면, 바로 내정(內廷)이다. 청나라때 내정은 황제가 특별히 불러서 만나지 않으면, 황친국척이라 하더라도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었던 곳이다. 일반인이 만일 융종문에 함부로 다가가면 바로 처벌받았을 것이다.


이런 대내금지의 문에 있는 편액에 왜 화살촉이 박혀 있을까?





어떤 사람은 이자성(李自成)이 군대를 이끌고 북경으로 진입할 때, 융종문을 지나면서 이자성이 화살을 하나 쏘아 편액의 정중앙에 맞혔다고 한다. 나중에 청군이 들어온 후 편액의 화살촉을 남겨두었는데, 그 의미는 애신각라 자손들에게 너희가 만일 제대로 일하지 않으면, 다음 번에 망하는 왕조는 바로 우리이라라는 것을 일깨워주려 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근거가 없다.


원인은 아주 간단하다. 이 편액에는 분명히 만주어와 한어 두 가지 문자가 쓰여 있다. 설마 명나라 말기의 숭정제의 머리가 이상해져서 미리 만주어로 문의 편액을 써두었단 말인가? 나중에 청군이 자금성에 들어와서도 길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해서...?


정사에서 찾아보는 것이 좋겠다.


<청사고.인종본기>에 따르면, "그날 간인(奸人) 진상(陳爽) 수십명이 자금성을 난입해서 내관을 핍박했고, 황차자(皇次子)가 총으로 그중 한 며을 죽였다. 한 도적은 월화문(月華門)의 벽을 올라서, 깃발을 들고 지휘했는데, 황차자가 다시 총으로 그를 맞추어 떨어뜨린다. 패륵(貝勒) 면지(綿志)가 다ㅣ 그 중 한 명을 죽인다. 왕대신(王大臣)이 건예(健銳), 화기영(火器營)의 병사를 이끌고 들어와, 모조리 붙잡아 참했다."


<청사고.선종본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십팔년 구월, 가을 사냥으로 목란(木蘭)에 갔는데, 황상이 먼저 경사로 돌아왔다. 교비(敎匪) 임청(林淸)의 일당이 궁궐을 침입하여 변란을 일으킨다.그 달, 무인, 적이 내우문으로 들어와 양심전의 남쪽에 이른다. 북으로 뚫고 들어가려 할 때, 황상이 총으로 두 도적을 쏘아죽인다. 남은 적은 궤멸하여 흩어졌고, 난이 평정되기 시작했다."


이제 분명해졌다.


가경18년, 즉 1813년, 융종문의 앞에서는 전투가 발생한 바 있다.


당시, 가경제는 가을사냥을 떠났고, 왕공대신들이 좌우에서 그를 따랐으며 어림군 금위군은 모두 승덕으로 가서 사냥하고 있었다. 자금성의 방어는 아무래도 느슨해져 있었다.


바로 이 때, 중원대지에는 '천리교(天理敎)'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천리교'는 기실 백련교의 한 갈래이다. 전체 청나라역사에서 백련교의 반란은 여기저기서 계속 일어난다.


"천리교" 북경분타의 두령인 임청은 자금성이 비어 있다는 것을 민감하게 알아차린다. 그리하여 공을 세을 때는 바로 지금이라고 여긴다. 계획을 세운 후에 '천리교' 북경분타에서 200여명의 인원을 모아 자금성으로 쇄도해 들어간다.


그러나, 박격포도 없고, 미사일도 없다. 자금서이 비어있다고 하지만, 200명의 인원으로 점령할 수 있는곳은 아니었다.


'천리교'의 침투능력은 아주 뛰어났다. 태감이 이들의 길안내를 도왔다. 그리하여, 진상이라는 소두목이 이끄는 소부대가 기적적으로 융종문까지 쳐들어간다. 융종문으로 진입하면 진정한 황궁의 대내(大內)가 된다.


그런데, 이들이 융중문의 앞에 이르렀을 때, 대문은 닫혀 있었고, 어떻게 열어야할지를 몰라서 당황하고 있었다.어떻게 할 것인가? 담을 넘자!


이때 황차자 애신각라 민녕(旻寧) 즉 미래의 도광제(道光帝)가 처리할 일이 있어서 목란위장에서 자금성으로 먼저 돌아와 있었다.


민녕은 당황하지 않고 조총을 들고, 전후로 2명의 담을 넘으려는 반란군을 죽여서 국면을 안정시킨다.


금방 많은 군인들이 몰려오고, 반란은 순시간에 진압된다.


융종문의 편액에 있는 화살촉은 바로 반란군이 진입할 때 남긴 것이다.


가경제는 자금성으로 돌아온 후, 두려움으로 "죄기조(罪己詔)"까지 내린다. 이번 사건은 비록 특별히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았지만, 성격은 아주 악랄하다. '한, 당, 송, 명에서도 없었던 일이다."


현장을 수습하면서 가경제는 특별히 주목했다. 화살촉을 편액에 남겨두도록 한 것이다. 시시때때로 애신각라 자손들이 거안사위(居安思危)하고 여리박빙(如履薄氷)하도록 일깨우고자 한 것이다.


민녕이 이번 변란때 침착하게 대응함으로써, 화석지친왕(和碩智親王)에 봉해진다. 그가 사용한 조총은 대단한 이름을 얻는다. "위열(威烈)"


그후 민녕은 더욱 황제의 중용을 받게 되고, 마침내 7년후에는 순조롭게 후계자가 된다.


다음에 고궁에 갈 때는 반드시 그 화살촉을 찾아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