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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도시

중국역사상 "남경"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도시는...?

by 중은우시 2018. 7. 15.

글: 한곤(寒鯤)


이전에 '북경'을 소개한 것과 마찬가질, '남경'이라는 명사도 처음에는 어느 소재지구와 관련된 전용지명은 아니었다. 역대왕조의 필요에 따라 서로 다른 지구에 설치된 행정색채가 충문한 '행정지명'이었다. 왕왕 '남도(南都)'와 동의어로 쓰였다. 모두 '남방의 경성, 혹은 남방의 도성'이라는 의미이다. 오늘날의 남경시가 '남경'을 불리게 된 것은 '다도세(多都制)'라는 역사현상이 최종적으로 영향을 미쳐서 명명한 도시라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지금의 북경도 한때 '남경'이라는 이름을 가졌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상 도대체 어떤 '남경'성이 있었을까?


'북경'의 경우와 유사하게, 동한 이전에는 '남경' 혹은 '남도'라는 행정명칭은 역사의 긴 물줄기 속에 나타나지 않는다. 비록 서주대 종주(宗周)와 성주(成周)를 설치한 바 있고, 신망(新莽)은 동도(東都), 서도(西都)를 설치하긴 했지만, 동한 이전에는 동경, 서경과 병열되는 남경, 북경은 설치되지 않았었다. 이는 주,진,서한시기에 중국은 주로 장안-낙양을 중심으로 해서, 전체 북방의 관서, 관동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경, 동병으로 각각 관서, 관동을 다스리면 되었다.


동한은 왕망의 신조(新朝) 정책을 이어받아, 계속하여 장안을 서경, 낙양(洛陽, 당시에는 雒陽이라고 고쳐 불렀다)을 동경으로 했다. 그외에 유수 일가의 종족이 서한중후기에 남양(南陽)에 거주하였으므로, 동한때는 남양을 '남도(南都)'로 부른다. 또한 '남경'이라고도 불렀다. 그러므로, 동한시기의 남양은 중국역사상 최초의 '남경'성이다. 조위가 건국한 이후에 최초의 '북경'성이 나타난 것보다 훨씬 빠르다.


조위 건국후에는 '오도제'를 시행하여 낙양을 중도로 하여, 업, 초, 허창, 장안을 배도로 했다. 허창(許昌)은 낙양의 남방에 있으므로, 남경이 된다. 허창은 원래 연주(兖州) 영천군(潁川郡) 관할하의 '허현(許縣)'이었다. 조조가 한헌제를 이곳에 안치시켰으므로 이름을 허도(許都)로 고친다. 조비가 동한을 대체한 후 비로소 허창이라고 부른다. 허창은 조조가 한헌제를 통제하던 곳이므로, 명목상으로 동한제국의 최후 도성이었을 뿐아니라, 실력에서도 일정한 규모의 주둔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비는 조위왕조를 건립한 후, 허창을 조위의 남경으로 삼아서, 패도(覇都) 업성(鄴城), 제향(帝鄕) 초군(譙郡), 서경 장안, 수도 낙양과 나란히 오경이 된다.


서진이 멸망한 후, 혼란을 틈타 일어난 전조(前趙), 후조(後趙)는 한동안의 동서대치를 거쳐 후조가 북방을 통일한다. 북방을 통일한 후조는 양국(襄國, 현재의 하북 邢臺)를 수도로 하고, 전후로 장안에 서경을 설치하고 낙양에 남도를 설치한다. 한편으로 자신이 위진의 정통을 이었다는 정통성을 알리면서, 다른 한편으로 장안, 낙양의 정치적 지위를 강화하여, 관중, 하락의 두 지역을 통치하게 편리하도록 했다.


후조정권이 멸망한 후, 북방지구는 전진(前秦)이 통일한다. 그 후에 두 개의 할거정권이 "남경(남도)"를 설치하는데, 각각 하투(河套)평원과 오르도스고원에 웅거하던 호하(胡夏)정권과 안북(雁北)지구에 웅거하던 대(代) 정권이다.


호하정권은 혁련발발(赫連勃勃)이 건립한 정권이다. 처음에 톤만성(統萬城, 섬서성 횡산현 백성자촌)을 수도로 하였고, 나중에 혁련발발이 유유(劉裕) 북벌군의 주력이 남방으로 철수하면서 내분이 일어난 기호를 이용하여 관중지구를 탈취한다(418년), 그후 혁련발발은 관중지구에 대한 통치를 유지하기 위하여 장안을 '남경'(혹은 南臺)으로 삼는다. 그리고 통만성은 북경이라 부른다.


대국은 척발의로(拓拔猗盧)는 상간하(桑干河)평원과 칙륵천(勅勒川)에 설립한 정권이다. 대국정권은 313년부터 성락성(盛樂城, 내몽고 허린거얼현)을 북도로 하고, 평성(平城, 지금의 산서성 대동시)을 남도로 했다. 이렇게 하여 반세기동안 '양도제'를 실행한다.


그 후에 수개 정권은 모두 어느 지방에 국한되어 '다도제'를 실행할 여건이 못되었다. '남경'이라는 이름은 한동안 사라지게 된다.


다시 출현한 것은 통일왕조 당나라이다. 당숙종(唐肅宗)은 안사의 난이 당왕조의 수도가 너무 치우쳐 있어서 발생한 것이라고 여기고, 짧은 기간동안 장강유역에 두 개의 '남경'을 둔다(당시의 명칭은 남도). 그리고 장안, 낙양이 다시 하북번진의 손에 들어간 후, 남경은 임시수도가 된다. 757년 십이월, 당숙종은 촉군(蜀郡)을 남도성도부(南都成都府. 즉 남경)로 하였다가, 760년 성도의 '남경'칭호를 폐지한다. 760년 구월, 당숙종은 다시 형주(荊州)를 남도강릉부(南都江陵府)로 삼는다. 그리고 몇달 후에 다시 이 새로운 '남경'도 취소한다.


그래서 당나라의 '남경'은 합쳐서 겨우 3년간 존속했다. 각각 성도가 이년반, 강릉(호북성 형주시)이 몇개월이다. 그외에 오대십국 중에서 당니리러 자처하던 정권도 남도(남경)를 설치했다. 그것은 바로 남당(南唐)이 설치한 남도남창부(南都南昌府)이고(958년-975년), 남당의 수도인 강녕부(江寧府)의 배도로 존재한다.


당나라이후, 요, 북송, 금의 3개 정권이 전후로 조위나 당나라보다 훨씬 안정적인 '사경제' 혹은 '오경제'를 실행한다.


요나라는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 서경대동부(西京大同府),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 남경유주부(南京幽州府), 중경대정부(中京大定府)를 설치한다. 그 중 요나라의 남경유주부는 지금의 북경시에 위치하고 있다. 요나라는 유주를 남경으로 하였는데, 유주가 요나라가 접수한 유운십육주의 동부 중요도시이기 때문이다. 또한 요나라 전체 판도에서는 중남부의 수부(首府)이다. 더구나 요나라가 북송과 공방을 벌이는 동로의 요충지였다. 그래서 반드시 '경'으로 행정편제하여 지켜야 했다. 이것이 바로 '남경'의 행정직급을 유주에 둔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의 북경시가 한때는 '남경'이었다가, 다시 '북경'이 된 도시가 되게 하였다.


이렇게 보면, 북경은 '북경'이라는 이름을 얻기 전에, '남경'이라는 신분으로 역사상 나타났었다. '남경'이 되기 이전에 지금의 북경시는 역사상 "계성(薊城)", "유주"로 불리웠다. "계"는 연(燕)나라의 수도였기 때문에, "계", "연", "유"는 역사상 주요시기에 지금의 북경지역과 더욱 긴밀한 관련이 있고, 더욱 오랫동안 써왔던 지명이다.


그후, 북송은 동경개봉부, 남경응천부(南京應天府), 북경대명부, 서경하남부를 둔다. 그 중 남경응천부는 오늘날 하남성 상구시(商丘市)이다. 북송이 상구(당시에는 송성현(宋城顯)이라 불렀다)를 남경으로 삼은 것은 이곳이 송태조 조광윤이 일찌기 귀덕군절도사(歸德軍節度使)를 지낼 때의 주둔지이기 때문이다. 대송국호의 발원지이다. 자연히 '경'의 규격으로 설치하여 존중을 표시해야 했다.


금나라가 요나라를 멸한 이후, 요나라의 오경제를 계승한다. 통치시기때 각각 상경회녕부, 북경임황부, 남경요양부, 중경대정부, 서경대동부를 둔다. 대체로 요나라의 오경과 같다. 다만 요나라의 동경이었던 요양부가 금나라초기에는 남경이 된다. 이는 금나라초기 수도인 상경회녕부가 흑룡강성 아성지구에 있어서, 지금의 요녕성 요양시는 바로 상경회녕부의 남쪽이기 때문이다. 금나라는 그리하여 요나라의 동경을 자신의 남경으로 바꾼다.


금나라 해릉왕 완안량은 1153년 연경으로 천도한다. 금나라의 통치중심이 관내로 이동한 것이다. 금나라의 오경도 상응하게 바뀐다. 금나라중후기의 오경은 각각 다음과 같다: 중도대흥부, 동경요양부, 북경대정부, 남경개봉부, 서경대동부. 금나라 중후기의 남경개봉부는 지금의 하남성 개봉시이다. 금나라의 남경은 요양에서 개봉으로 옮겨온 것이다. 이는 금나라의 통치중심이 남으로 이전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남경개봉부는 금나라말기, 몽골칸국에서 중도대흥부(지금의 북경)를 함락시킨 후, 금나라의 수도가 되기도 한다.


원나라는 방위에 따라 배도를 설치하지 않는다. 원나라가 멸망한 후, 주원장은 북송의 남경응천부라 부르는 방식을 써서 집경부(集慶府, 원나라때 남경을 부르던 명칭)를 응천부(應天府)로 개명한다. 주체의 정난지역이 성공한 후, 1421년, 정식으로 북경으로 천도한다. 그제서야 응천부는 남경응천부가 된다. 이때부터 '남경'이라는 두 글자는 정식으로 지금의 남경지역에 고정된다.


전체 청나라때, 남경지구는 청나라에서 공식적으로 강녕부(江寧府)라고 불렀다. 신해혁명의 성공이후, 비로소 강녕에서 남경으로 바뀌고 지금까지 계속 사용되고 있다.


개괄적으로 말해서, 중국역사상 '남경'의 명칭은 전후로 13개 지방에 사용되었다:


동한의 남양: 하남성 남양시

조위의 허창: 하남성 허창시

후조의 낙양: 하남성 낙양시

호하의 장안: 섬서성 서안시

대국의 평성: 산서성 대동시

당조의 성도: 사천성 성도시

당조의 강릉: 호북성 형주시

남당의 남창: 강서성 남창시

북송의 응천: 하남성 상구시

요조의 유주: 북경시

금조의 요양: 요녕성 요양시

금조의 개봉: 하남성 개봉시

명조의 응천: 강소성 남경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