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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도시

중국역사상 "북경(北京)"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던 도시들은....?

by 중은우시 2018. 6. 27.

글: 한곤(寒鯤)


"북경(北京)"이라는 명사는 처음에 북경시 소재지역과 긴밀하게 연결된 '전용지명'은 아니었다. 오히려 역대왕조들이 필요에 따라 서로 다른 지역에 설치했던 '유동지명(流動地名)'이었다. 그리고 왕왕 '북도(北都)'와 동의어로 쓰였다. 이는 중국역사상 여러 왕조에서 '다도제(多都制, 복수수도제)'를 시행했다는 표지중 하나이다. 오늘날의 북경시를 북경으로 부르게 된 것은 이 역사현상이 최종적으로 북경의 명명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역사상 일찌기 어느 도시들이 '북경' 혹은 '북도'라는 명칭을 사용했을까?


위진(魏晉)시기 이전의 역사시기에, '북경'과 '북도'라는 칭호는 역사에 나타나지 않았다. 비록 신망(新莾)과 동한(東漢)때 각각 동서도(東西都), 동서경(東西京)을 설치했고, 심지어 동한때는 남양(南陽)을 남도(南都)라고도 불렀지만, 남도 남양에 대응하는 북도 혹은 북경은 설치하지 않았다. 이는 당시의 천하에 아직은 북방을 좌진(坐鎭)하는 배도(陪都)를 두어 북방을 통제할 필요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낙양 하나만으로도 중원과 하북을 통제하는데 충분했다.


조위(曹魏)가 건국된 후 오도제(五都制)를 시행한다. 제도(帝都) 낙양(洛陽)을 중도(中都)로 하고, 업(鄴), 초(譙), 허(許), 장안(長安)을 배도로 삼았다. 그리고 각각의 방위에 따라 소위 '경호(京號), 도호(都號)'를 확정한다. 업성(지금의 하북성 임장)은 처음으로 '북경' 혹은 '북도'라는 명칭을 얻은 도시가 된다. 업성이 조위의 북경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조조가 위공(魏公)을 칭한 이후 업성을 국도로 삼아 위공국(魏公國, 위왕국)을 세웠기 때문이다. 업성은 건안후기에 계속하여 조조의 통치중심이었다. 이곳은 조위의 판도내에서 낙양에 바로 다음가는 궁성건축물이 있었고, 이곳은 조위가 병주, 기주, 유주북부의 유목민족을 방어하는데 강대한 전진기지 겸 지휘중추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하여 업성은 조위의 북경이 되어 46년간 유지된다(220-246)


서진(西晉)이 건국한 후, 미처 다도제를 시행해보기도 전에 팔왕지란(八王之亂)으로 멸망의 길에 들어선다. 혼란을 틈타 전조(前趙), 후조(後趙)가 일어나고, 동서대치를 거쳐, 후조가 북방을 통일한다. 북방을 통일한 후조는 양국(襄國, 하북성 형태)을 수도로 삼고, 전후로 낙양에 남도를 설치하고, 장안에 서경을 둔다. 한편으로 자신이 위진의 정통을 계승하였다는 정당성을 드러내고, 다른 한편으로 장안, 낙양의 정치적 지위를 강화하여 관중, 하락의 두 지역을 안정시키려고 한 것이다. 후조의 개국군주인 석륵(石勒)이 죽은 후, 석호(石虎)는 정치투쟁을 거쳐 후조의 군주에 오른다. 그리고 업성으로 천도한다. 원래 석륵시기에 대규모로 건축물을 지었던 양국은 업성이북의 배도로 된다. 그래서 양국은 두번째로 북경 혹은 북도로 불린 도시가 된다. 비록 겨우 14년간 유지되었지만.(335-349)


후조가 석호부자의 폭정으로 붕괴된 후, 북방은 전란을 거쳐 전진(前秦)이 통합한다. 전진도 배도를 설치하기 전에 다시 실패한다. 전진이후, 다시 두 개의 할거정권이 '북경'을 설치한다. 그들은 각각 하투평원과 오르도스고원에 웅거하고 있던 호하(胡夏) 정권과 안북(雁北)지역에 할거하고 있던 북위(北魏) 정권이다.


호하는 혁련발발(赫連勃勃)이 건립한 정건이다. 통만성(統萬城, 섬서성 횡산현 백성자촌)을 수도로 삼고, 유유(劉裕)의 북벌군주력이 남방으로 철군하고 수도를 지키고 있던 부대와 내홍을 겪는 기회를 틈타, 관중지역을 빼앗고 황제를 칭한다(418년), 그후 혁련발발은 관중지역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기 위하여 장안을 '남대(南臺)'로 삼고 통만성을 '북경'으로 삼는다. 양도제(兩都制)를 시행한 것이다. 통만성은 호하의 북경으로 9년간 존속했다(418-427), 그후에 북위에 의하여 함락된다.


북위는 척발규(拓拔珪)가 건립한 정권이다. 처음에 척발규는 대국(代國)의 국도인 성락(盛樂, 내몽고 허린거얼)을 국도로 삼는다(387-398), 척발규가 참합피(參合陂)전투에서 후연(後燕)의 모용수(慕容垂)를 격파하고, 북위는 일거에, 중산, 진양을 위주로 하는 후연의 주요 영토를 차지한다. 이리하여 도성을 평성(平城, 산서성 대동)으로 옮긴다. 그후에는 북위의 평성시대가 열린다(398-494). 성락은 북위황제의 행궁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북위의 '북도'로 존재한다. 대체로 근 한세기동안 지속되었다(398-494).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북위의 성락은 조위의 업성, 후조의 양국, 호하의 통만성의 뒤를 이은 네번째 '북경'이라고. 효문제가 낙양으로 천도한 후, 한화를 반대하는 보수파 선비귀족에게 타격을 가하기 위하여, 일부러 평성의 정치적 지위를 억누른다. 그래서 전왕조의 관례에 따라 평성을 '북경'으로 승격시켜주지 않았다.


북위이후의 서위, 북주, 동위, 북제, 수의 5개 정권은 모두 '북경'을 설치할 시간이 없었다. 삼촉(蜀漢, 成漢, 譙蜀)과 육조(오,동진,송,제,양,진)의 정권은 영토가 한켠에 치우쳐 있어, '다도제'를 실행할만한 여건이 되지 않았고, 더더구나 '북경'을 설치할 수는 없었다.


다시 통일을 달성한 당나라때, '북경' 혹은 '북도'의 명칭은 안정적으로 이당황실의 용흥지지이자 무측천의 고향인 태원부(太原府)에 설치된다.


690년, 무측천의 뜻에 따라 태원부가 북도가 된다.

705년, 무측천이 권력을 잃으면서 태원부의 북도 칭호가 정지된다.

742년, 당현종이 태원부를 북경으로 삼는다.

762년, 당대종이 북경태원부를 북도태원부로 개명한다.


이를 보면, 태원부 진양성(晋陽城, 산서성 태원시 진원구)는 무주의 북도, 이당의 북경이며 중국역사상 다섯번째 '북경'이다. 오대십국시대에 이르러, 이존욱(李存勖)이 후당(後唐)정권을 건립한 후, 자신이 당왕조를 계승하였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전히 태원부 진양성을 후당의 북도로 삼는다.


당나라이후, 요(遼), 북송(北宋), 금(金)의 3개 정권은 전후로 조위와 당보다 훨씬 안정적인 '사경제'와 '오경제'를 실시한다. 그중 요나라에서 설치한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 서경대동부(西京大同府),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 남경유주부(南京幽州府), 중경대정부(中京大定府)를 두었고, '북경'은 설치하지 않았다. 북송은 동경개봉부(東京開封府), 남경응천부(南京應天府), 북경대명부(北京大名府), 서경하남부(西京河南府)를 둔다. 그중 북경대명부는 오늘날의 하북성 대명현이다. 이는 북송이 연운십육주(燕雲十六州)를 수복하지 못함에 따라 부득이 북경을 황하방어선이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설치할 수밖에 없었다.


금이 요를 멸한 후, 요나라의 오경제를 계승한다. 각각 상경회녕부(上京會寧府), 북경임황부(北京臨潢府), 남경요양부(南京遼陽府), 중경대정부(中京大定府), 서경대동부(西京大同府)를 두어 대체로 요나라의 오경과 일치했다. 금나라초기에 상경임황부(내몽고 파림좌기 동남쪽의 파라성)를 금나라의 북경으로 고치는데 이는 거란의 용흥지를 억누르기 위함이었다. 금나라의 해릉왕 완안량(完顔亮)은 1153년 연경(燕京)으로 천도한다. 이때부터 금왕조의 통치중심은 장성이남으로 내려오게 된다. 금나라의 오경도 상응하게 바뀐다. 금나라 중후기의 오경은 각각 다음과 같다: 중도대흥부(中都大興府),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 북경대정부(北京大定府, 내몽고 영성현), 남경개봉부(南京開封府),  서경대동부(西京大同府). 대정부는 중경에서 북경으로 바뀐다. 이는 금왕조의 통치중심이 남쪽으로 내려갔다는 것을 나타낸다.


원나라때는 비록 대도(大都), 상도(上都), 중도(中都)를 두었지만, '북경' 혹은 '북도'라는 명칭은 나타나지 않는다. 만일 억지로 방위에 따라 상도 개평부(開平府)를 원나라의 북경으로 부르는 것은 어쨌든 원나라의 인정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원나라가 멸망한 이후, 주원장은 "북방을 평정했다"는 의미로 원나라의 대도를 '북평부(北平府)'라고 부른다. 그래서, '북평'이라는 지명은 북경지역에서 '북경'이라는 명칭보다도 먼저 쓰였다. 주체(朱棣)의 정난지역이 성공한 후, 1403년(영락원년) 재빠르게 '북평부'를 '북경순천부(北京順天府)'로 승격시킨다. 그리고 10여년간의 건설을 거쳐 주체는 비로소 1421년 북경으로 정식 천도한다. 그리고 북경순천부를 경사순천부(京師順天府)로 개명한다. 경사순천부가 관할하는 지역을 '북직예(北直隸)'라고 부른다. 이때부터 '북경'이라는 두 글자는 북경지역에 자리잡게 되고, 명청 두 왕조때 그리고 민국,북양시기 미치 신중국시기에 북경성으로 남는다.


그러나, 북평부가 북경으로 승격된지 22년후인 1425년 사,오월에 명인종 주고치(朱高熾)는 북경을 좋아하지 않고, 남경을 더 좋아해서, 북경을 행재(行在)로 격하시키고, 북평(北平)이라는 지명을 회복시킨다. 그러나, 명인종은 재위기간이 짧아서 금방 급사한다. 만일 명인종이 건강하게 장수했더라면 북평이 대명왕조의 북경이 될 수 있었을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심지어 북경의 명칭이 '연산의 남쪽, 역사의 북쪽'의 지명으로 자리잡게 되었을지도 더더욱 말하기 어렵다. 명인종 이후, 명영종과 명사종이 두번에 걸쳐 남천을 논의하기는 했지만, 실패한 후, '북경'이라는 명칭은 장기적이고 안정적으로 지금의 북경시범위내에서 머물게 된다.


중국역사상, '북경'의 명칭이 전후로 여러 지방에 붙여졌다. 종합적으로 정리하자면 다음가 같다.


조위의 업성: 하북성 임장현

후조의 양국: 하북성 형대시

호하의 통만성: 섬서성 횡산현 백성자촌

북위의 성락: 내몽고자치구 허린거얼현

당,무주,후당의 태원: 산서성 태원시 진원구

북송의 대명: 하북성 대명현

금의 임황: 내몽고자치구 파림좌기 동남의 파라성

금의 대정: 내몽고자치구 영성현 서북

명, 청의 북경: 북경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