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열사군(悅史君)
모두 알다시피 단명한 수(隋)나라가 멸망한 후, 이어서 근 300년간 통치하게 되는 것은 당나라이다. 당나라는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역사유산을 넘겨 주었고, 지금까지도 중국인들의 자랑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당왕조의 개국초기에는 휘황한 미래를 계획할 여유가 없었고, 그저 생존해나가는 문제를 신경써야만 했다.
이 이치는 아주 간단하다. 수양제(隋煬帝) 통치시기에 천하는 이미 어지러워졌고, 한 지방에 할거하는 세력이 아주 많았다. 게다가 수나라의 잔여세력도 있었다. 그저 관중과 태원부근을 점령하고 있던 당왕조는 실력이 그다지 강한 편이 아니었다.
다만, 바로 이런 열악한 조건 하에서, 당왕조는 적극적으로 출동하는 쪽을 선택했고, 연이어 15로의 제후들을 격파한다. 필자는 시간순서대로 정리해보겠다.
첫째, 진제(秦帝) 설거(薛擧) 설인고(薛仁杲) 부자
설거는 원래 수나라의 금성교위(金城校尉)였다. 수나라 대업13년(617년), 그는 무리를 이끌고 거병하여, 먼저 서진패왕(西秦覇王)이라 칭하였다가 이어서 황제를 칭한다. 병력 십수만을 이끌고 농서(隴西)를 점거한다.
당고조 이연은 진왕 이세민을 파견하여 설거를 상대하게 한다. 쌍방은 서로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했다. 다만 설거가 당왕조 무덕원년(618년) 돌연 사망한다. 그리하여 황태자 설인고가 즉위한다. 그러나 3개월여 후에 이세민에게 철저히 패배하고, 투항한 후에 피살된다.
설거 설인고 부자는 성격이 흉맹하고 장안에서 거리가 비교적 가까워서, 당고조 이연도 비교적 일찌기 그들을 상대한 것이다. 이는 당나라를 안정시키는데 아주 중요한 한걸음이었다.
둘째, 위공(魏公) 이밀(李密)
이밀은 원래 수나라의 포산군공(浦山郡公)이었다. 먼저 양현감(楊玄感)의 반란에 참여하고, 체포되나 계책을 써서 빠져나온다. 그리고는 와강군(瓦崗軍)에 들어간다. 적양(翟讓)과 처음에 가까웠다가 나중에 멀어지고, 위공이라 칭하며 와강군을 장악한다. 그러나 왕세충(王世充)에게 패배하고, 당고조 이연에게 투항한다. 당나라 무덕원년 납월((619년)), 당나라에 대한 반란을 기도하다가 피살된다.
셋째, 양제(凉帝) 이궤(李軌)
이궤는 원래 수나라의 응양부사마(鷹揚府司馬)였고 수나라 대업13년(617년) 설거가 수나라에 반기를 든 후, 그도 혼란을 틈타서 그병한다. 먼저 하서대량왕(河西大凉王)을 칭하고 1년후에 하서를 할거하며 황제를 칭한다. 비록 당고조의 봉왕을 거절했지만, 내란으로 체포되어, 무덕2년(619년) 장안에서 피살된다.
넷째, 천흥제(天興帝) 유무주(劉武周)
유무주는 원래 수나라의 응양부교위(鷹揚府校尉)였고, 수나라 대업13년(617년) 거병하여 먼저 마읍태수(馬邑太守)를 칭하며 돌궐의 의부(依附)한다. 1년후 "정양칸(定楊可汗)" 에 봉해지고, 이어서 황제를 칭한다.
당나라 무덕2년(619년) 유무주는 이세민에게 격패당한 후 돌궐로 도망치고, 1년후에 피살된다.
다섯째, 하왕(夏王) 두건덕(竇建德)
두건덕은 원래 수나라의 이백인장(二百人長)이었고, 수나라 대업7년(611년) 고구려정벌에 반대하며, 하북을 점거하고 하왕을 칭한다. 이세민과 왕세충이 대결할 때, 그는 왕세충을 지지하다가 결국 포로로 잡힌다. 당나라 무덕4년(621년) 장안으로 압송되어 참수된다.
여섯째, 초제(楚帝) 주찬(朱粲)
주찬은 원래 수나라의 성보현좌리(城父縣佐吏)였다. 수나라 대업11년(615년)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킨다. 처음에 가루라왕(迦樓羅王)을 칭하였다가 4년후에 황제를 칭한다. 성격이 아주 흉악하여, 먼저 당고조 이연에 투항한 후, 다시 왕세충에 투항한다.
당나라 무덕4년(621년)에 이세민이 왕세충을 격패시킨 후 주찬을 포로로 잡아 죽인다.
일곱째, 황태주(皇泰主) 양동(楊侗)과 정제(鄭帝) 왕세충(王世充)
양동은 수양제의 손자이다. 수나라 대업14년(618년) 수양제가 피살된 후, 양동은 왕세충등에 의하여 황제로 옹립된다. 다만 1년후에 왕세충에게 피살된다. 당나라 무덕4년(621년) 이세민은 왕세충을 격파한다. 왕세충은 비록 당고조의 사면을 받았지만, 금방 원수에 의해 피살된다.
여덟째, 양제(梁帝) 소선(蕭銑)
소선은 서량선제(西梁宣帝) 소찰(蕭詧)의 증손이고, 수양제의 소황후의 조카이다. 수나라 대업13년(617년) 거병하여 먼저 양공을 칭하고, 이어서 양왕을 칭한다. 1년후에는 칭제한다.
당나라 무덕4년(621년) 당군이 압박해오자 투항한다. 그러나 굴하지 않아서 당고조 이연에게 참살당한다.
아홉째, 양왕(梁王) 심법흥(沈法興) 및 오제(吳帝) 이자통(李子通)
심법흥은 수나라의 오흥군수(吳興郡守)였고, 수나라 대업14년(618년) 수양제가 피살된 후, 심법흥은 우문화급(宇文化及)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거병하고 1년후에 양왕을 칭한다.
이자통은 원래 수나라의 백의(白衣)였다. 수나라 대업말기에 반기를 들기 시작하여, 수나라 대업11년(615년)에 초왕(楚王)을 칭하고 4년후에 칭제한다.
당나라 무덕3년(620년) 이자통은 심법흥을 격패시키고, 1년후 심법흥은 도망가던 중에 자살한다.
당나라 무덕4년(621년) 이자통은 두복위(杜伏威)에게 격패당하고, 장안으로 압송된 후 당고조에 투항한다. 그러나 1년후에 반란을 일으키려 하다가 피살된다.
열째, 초제(楚帝) 임사홍(林士弘)
임사홍은 원래 수나라의 백의였으나, 수나라 대업12년(616년)부터 반기를 들고, 먼저 남월왕(南越王)을 칭하고 얼마 후에 칭제한다.
당나라 무덕5년(622년) 임사홍은 당군이 밀려오자 투항한다. 그러나 금방 후회하고 도망가던 중에 병사한다.
열한째, 한동왕(漢東王) 유흑달(劉黑闥)
유흑달은 원래 수나라의 백의였으나 수나라 대업연간부터 반기를 들고, 전후로 학효덕(郝孝德), 이밀(李密), 왕세충(王世充)등의 수하가 되고, 당나라 무덕원년(619년)에는 두건덕에 투항하여 한동공에 봉해진다.
당나라 무덕4년(621년), 두건덕이 피살된 후, 유흑달은 두건덕의 부장들에게 옹립되어 당나라에 항거한다. 먼저 대장군을 칭하고, 1년후에 한동왕을 칭한다. 이세민에게 격패당한 후에는 돌궐에 투항한다.
당나라 무덕6년(623년) 유흑달은 돌궐의 병력을 빌어 다시 거병하나, 황태자인 이건성(李建成)에게 피살된다.
열두째, 노왕(魯王) 서원랑(徐圓朗)
서원랑은 원래 수나라의 백의이나, 수나라 대업말기부터 반기를 들기 시작한다. 먼저 이밀에 투신했다가, 다시 왕세충에 투항하고, 이어서 당나라에서 노국공(魯國公)에 봉해진다. 그리고는 다시 두건덕에 의부하고, 두건덕의 사후에 다시 당나라에 귀순하여 노군공(魯郡公)에 봉해진다.
유흑달이 거병한 후, 서원랑은 그에 호응하여, 얼마 후 스스로 노왕을 칭한다. 당나라 무덕6년(623년) 유흑달이 패배하여 죽은 후, 그는 도망가던 중에 피살된다.
열셋째, 초왕(楚王) 두복위(杜伏威) 및 송제(宋帝) 보공석(輔公祏)
두복위는 원래 수나라의 도적이고, 먼저 장군을 칭하고, 나중에 총관을 칭한다. 수나라 대업14년(618년) 수양제가 시해당한 후, 황태주로부터 초왕의 작위를 받아들이고, 당나라 무덕2년(619년)에는 당나라로부터 초왕, 오왕의 작위를 받는다. 3년후에는 스스로 장안에 간다.
보공석은 두복위의 어릴 때부터의 친구이다. 처음에 두 사람은 한 마음으로 힘을 합쳤지만, 나중에 두복위의 시기로 병권을 잃자, 두복위가 입조한 후에 그는 강회군(江淮軍)의 병권을 장악하고, 당나라 무덕6년(623년) 칭제한다.
당나라 무덕7년(624년) 이월, 두복위는 돌연 병사하고, 1달 후 보공석은 당군에 피살된다.
열넷째, 연왕(燕王) 고개도(高開道)
고개도는 원래 수나라의 소금판매상이다. 수나라 대업9년(613년) 격겸(格謙)을 따라 거병하여 장군을 칭한다. 당나라 무덕원년(618년) 연왕을 칭한다.
당나라 무덕3년(621년) 고개도는 당나라에 투항하여 북평왕(北平王)에 봉해진다. 2년후에는 자칭 연왕이 된다. 그리고 다시 2년이 지나 부하의 핍박을 받아 자살한다.
열다섯째, 양제(梁帝) 양사도(梁師都)
양사도는 원래 수나라 응양부랑장(鷹揚府郎將)이었고, 수나라 대업13년(617년) 거병한 후 먼저 대승상(大丞相)을 칭하고 이어서 황제를 칭한다. 돌궐과 결탁하여 수, 당에 항거하고, 당나라 정관2년(628년) 당군의 핍박하에 부장에게 살해된다.
아마도 누군가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외에도 허제(許帝) 우문화급이 있다고. 그러나 우문화급은 두건덕에게 소멸되었고, 당군과는 접촉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포함시키지 않은 것이다. 다만이 15명의 지방제후만 보더라도, 당나라가 얼마나 힘들게 피를 흘려가면서 나중의 휘황을 열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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