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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당)

당나라때 강성했던 토번(吐蕃)은 왜 신속히 쇠락했을까?

by 중은우시 2019. 5. 21.

글: 남방적하(南方的河)


지도를 펼쳐보면, 아시아의 청장고원(靑藏高原)은 확실히 두드러진다. 거기에는 신성한 설산이 있고, 독특한 기후가 있고, 순박한 유목민이 있다.거기에는 일찌기 강대한 정권이 출현했었다. 그 정권은 당나라, 아랍제국과 삼국정립의 형세를 이룬다. 그것은 바로 토번이다. 다만, 토번 이외에 우리는 청장고원에 세워진 다른 정권을 거의 알지 못한다. 그것은 무엇때문일까> 우리는 왜 토번만 출현하고, 그 후에는 강대한 정권이 전혀 출현하지 않았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원나라때 청장고원이 처음 중원왕조의 판도에 들어가게 되고, 그 이후에는 더더욱 강대한 정권이 세워질 기회가 없어져 버렸다.




비록 청장고원에 세워진 정권이 많지 않았지만, 7세기에 청장고원을 통일한 토번이 나타났고, 당시 토번은 당나라와 자주 싸울 정도로 강대했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당나라는 아주 강했다. 그런데도 토번은 당나라와 고하를 겨룰 정도였다. 물론 토번이 당나라와 싸우면서 패배한 경우가 더 많긴 했다. 여러가지 원인으로 당나라도 토번을 없애지는 못하고 여전히 그들은 청장고원에서 이백여년간 존속한다. 전체 토번왕조에서 최전성기는 안사의 난 이후이다. 그때 토번은 농우와 전체 안서도호부를 점령한다. 티벳어 역사기록에 따르면, 토번은 한때 히말라야남부의 겐지즈강유역까지 진출한다.


792년에서 805년까지 전성기를 거친 후, 신속히 쇠락한다. 821년에 이르러, 토번은 더 이상 확장하지 못하고, 세력도 신속히 와해된다. 내우외환으로 세력이 심각하게 위축된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토번의 세력이 신속하게 위축되었을까?


1. 계속된 전쟁. 당나라와 토번의 전쟁에서 토번은 당나라와 맞설 수가 없었다. 연이어 많은 인원손실을 겪은 후, 토번의 인구는 당나라와 비교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병력을 보충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당시 서북이던 중앙아시아건 당나라와 토번은 모두 전투를 벌인다. 9세기에 이르러, 토번이 쇠락하고, 더 이상 당나라와 맞서기 어려워진다. 당나라도 내분으로 양국은 결맹을 맺어 위협을 감소시킨다. 이때의 토번 내부는 반란이 더욱 심각해져서 내분을 평정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진압하면 할수록, 반란은 더욱 강해졌고, 결국 토번은 농민반란으로 멸망한다.


2. 지리위치적 한계. 토번은 청장고원에 위치하고 있었다. 청장고원은 춥고 고산지대이다. 청장고원이 넓기는 하지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은 얼마 되지 않았다. 개발할 수 없는 토지를 빼면,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아주 적었다. 고원에 고대에는 목축업과 청보리를 십는 것만 가능했다. 청보리는 청장고원에서 유일하게 재배할 수 있는 농작물중 하나이다. 토번에 아주 큰 의미가 있다. 그리고 청장고원의 독특한 지리적 위치로 여러 조각의 지방으로 나뉘어진다. 그리고 서로간의 교통이 불편했다. 이처럼 농업과 교통의 제한을 받는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꼭대기에 도착하면 내리막길을 걸어야 하고, 해발은 높고 농작물은 적었다. 더 많은 인구를 수용할 수가 없었다. 9세기중엽, 청장고원의 토번은 이미 최전성기를 지나버렸다.


3. 기온의 상승기. 어떤 자료를 보면, 토번이 강대한 통일국가를 형성할 수 있었던 요인은 기온이다. 618년, 당나라와 토번은 같은 해에 건립되고, 그후에 통일한다. 이때의 기온은 상승상태였다. 기온상승은 청장고원에 여러가지 이점을 가져다 주었다: 수량이 충분하다. 755년에 이르러, 청장고원의 기온은 최고치에 도달한다. 이 시기에 토번의 청보리는 널리 재배되었다. 전투는 소모전이다. 쌓아둔 것이 없으면 어떻게 싸우겠는가. 그후 기온이 하강하기 시작하고, 일단 하강을 시작하자, 청보리의 재배도 분명 영향을 받게 된다. 경제기초가 흔들리니 내란이 발발한다. 그리하여 기온하강과 동시에 대외전쟁도 수행하다보니 쇠락이 가속화된 것이다.


그외에도 토번이 쇠락한 원인은 많다. 예를 들면, 불교의 전래이다. 이로 인하여 토번은 두 파로 나뉜다. 본토종교와의 갈등이 나타나서, 서로 싸우게 된다. 후기의 토번지도자들은 송찬간포같은 능력이 없었다. 이는 당나라가 안사의 난 이후에 쇠락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내란과 일부혼군이 나라를 망치는 것등. 모두 왕조의 쇠락을 가져온다. 나중에 청장고원의 기온이 다시는 예전처럼 높아지지 않고, 재차 통일하는 것은 어려워진다. 그저 몽골제국이 침입해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어떤 사람은 토번의 한화(漢化)과정에서 양파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본토파와 한화파. 결국 이들간에 갈등이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어찌되었건 당나라는 토번 흥망성쇠의 목격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