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윤문한(尹文漢)
구화산(九華山) "지장삼존(地藏三尊, 지장, 민공, 도명)"의 형성의 근원을 찾으려면 부득이 '지장삼존'의 주인공인 당나라때 구화산의 승려 석지장(釋地藏)을 얘기해야 한다. 석지장은 진실한 역사인물이며, 1천여년의 역사과정에서 사람에서 보살로 신격화되는 과정을 거쳤다. 칭호가 변화되었을 뿐아니라, 여러가지 전설과 이야기도 만들어 냈다.
석지장의 칭호와 신분에 대하여, 역사문헌에는 여러가지 기록이 있다. 그의 칭호는 승지장(僧地藏), 석지장(釋地藏)에서 김지장(金地藏), 김교각(金喬覺)으로 바뀌어 갔으며, 심지어 지장보살(地藏菩薩)과 동일시하게 된다. 그의 신분도 신라국 왕자 김씨근속(近屬, 가까운 친척), 신라국왕자, 신라국왕의 지속(支屬)등 여러가지 주장이 있다.
가장 먼저 석지장의 내력을 기록한 문헌은 <전당문(全唐文)>에 수록된 <구화산화성사기(九華山化城寺記)>이다. 이 글의 작자인 비관경(費冠卿)은 구화산 살자락인 청양현(靑陽縣) 사람이고, 8세기 상반기에 생활했으며, 일찌기 진사가 된다. 모친상으로 나중에 9년간 은거하며 관직은 우습유(右拾遺)에 이른다. 작자는 글의 말미에 "시원화계사세(時元和癸巳歲)"(813년) "맹추십오일(孟秋十五日)"이라고 적었고, 스스로 "나는 산아래에 한거하며, 어려서부터 듣고 본 것을 조심스럽게 기록한다"라고 하였다. 글을 쓴 시기는 석지장이 원적한 때로부터 20년이 지나지 않은 때였다. 그러므로, 신뢰도가 아주 높다. 이 글에서 비관경은 석지장을 '승지장'이라고 썼고, '신라국 왕자 김씨근속'이라고 했다. 북송때의 찬녕(贊寧, 919-1001)은<고승전> 권20 <당지주구화산화성사지장전>에서 기본적으로 비관명의 글을 축약해서 적어둔다. 앞머리에 이렇게 적었다: "석지장, 성은 김씨이고, 실라국왕의 지속이다." 비관경의 견해를 받아들였을 뿐아니라, 석지장의 속가성씨를 '김씨(金氏)'라고 적었다.
남송때의 주필대(周必大)는 건도3년(1167년) 구월 <구화산록(九華山錄)>에는 이미 "김지장"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리고 "신라왕자"라고 부른다. "사시(巳時)에 화성사에 도착했다. 절이 아주 아름다웠다. 당나라때 신라왕자 김지장이 수행한 곳이다. 식사를 마치고, 김지장탑을 배알했다." 원나라때 구화산 시인인 진암(陳岩)이 쓴 <구화시집>은 구화산의 건물과 경치를 읊은 시가 200여수 있는데, 많은 시에 스스로 주석을 달았다. 주석에는 여러 곳에 "김지장"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를 보면, 송,원시기에 '김지장'이라는 견해는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락15년(1417년)에 만들어진 <신승전(神僧傳)> 권8 <지장>은 비록 석지장을 신승에 수록했지만, 칭호와 신분에서는 여전히 찬녕의 주장을 그대로 쓴다: "석지장, 속성은 김씨, 신라국왕의 지속이다."
"김교각"이라는 칭호는 명나라때 이미 나타났다. 구체적으로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가 없다. 명나라 만력7년(1579년) 청양현령 소만민(蘇萬民)이 편찬한 <구화산지(九華山誌)>권2 <인물,선석(仙釋)>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김지장, 이름은 교각, 신라국왕의 아들이다." 그 후, 숭정, 건륭때 편찬한 <구화산지>도 모두 소만민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김지장을 일반고승과 나란히 둔다. 광서연간에 이르러, 주윤재(周贇在)가 쓴 <구화산지> 권6에서 김지장에 대한 기재는 비록 내용적으로 앞의 산지를 약간 수정한 정도이지만, "김지장, 본명은 교각, 신라왕자, 김씨근속이다." 편수체제상으로는 크게 변화한다. 주윤재는 <구화산지> 권6 <인물>을 명현(名賢), 은일(隱逸), 문원(文苑), 신선(神仙), 불교(佛敎)등의 유형으로 나누는데, 그중 불교는 다시 보살(菩薩), 범승(梵僧), 시승(詩僧), 거사(居士)등 4부분으로 나누었다. 보살에는 오직 1명이 올라 있는데, 바로 김지장이다. 민국시대에 인광대사(印光大師)가 다시 편찬한 <구화산지>는 유생이 산지를 편찬하던 체제를 벗어나 불교를 숭상하는 것으로 바꾼다. <성적문(聖迹門)>을 권1로 하고 지장보살에 대하여 기술한다. 지장보살은 "특별히 중생의 뜻에 따라, 김지장을 응화지신(應化之身)으로 하여, 구화산을 거처로 삼았다." 이렇게 하여 김지장을 지장보살의 응화지신으로 단독으로 기재되여, 권4의 <고승문(高僧門)>에 나오는 승려들과 구분하게 된다.
이상의 사료기록으로 보면, 석지장은 속성이 김씨이므로 후세인들은 "김지장"으로 부르게 된다. 이는 송나라때 이미 유행했다. 그후 점차 민중이 가장 좋아하는 칭호가 되어 현재에 이른다. 개략 명나라때, 다시 '김교각'이라는 칭호가 나타나는데, 수백년이후에 이 이름은 도대체 어떻게 나오게 된 것일까? 실로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사실상, 명,청 시기에 석지장에 관한 전설 이야기가 돌연 많아지게 되는데, '김교각'이라는 칭호는 분명 이때 신격화하는 과정에서의 산물중 하나일 것이다. 개략 송,명 시기에 김지장과 지장보살은 신도들 사이에서 혼동이 일어났고, <구화산지>의 기록으로 보면, 이런 혼동은 최소한 광서연간에는 완전히 인정되게 된다.
석지장은 왜 원적한지 수백년후에 신격화되어 지장보살이 되었을까? 분명히 특별한 사적이 있을 것이다.
비관경의 <구화산화성사기>는 석지장의 내력을 처음 기록했는데, 처음부터 석지장의 사적은 사실과 신이(神異)가 병존했다. 그리하여 신비의 겉옷을 입게 된다.
번호 |
사적 |
<구화산화성사기>원문 |
1 |
출생왕가 (出生王家) |
그때, 석지장이 있었는데, 신라국 왕의 아들 김씨의 가까운 친척이었다. 골격이 특이하며 키가 칠척이었고, 힘이 셌다. 자주 이렇게 말했다: "육적환중(六籍寰中), 삼청술내(三淸術內), 유제일의(唯第一義), 여방촌합(與方寸合)"(유학과 도학에 관심없고, 불학이 나에게 맞는다는 의미임) |
2 |
탁석구화 (卓錫九華) |
머리를 깍고, 바다를 건너, 배를 버리고 건넜다. 이 산과 구름을 보고는 천리 먼길을 달려왔다. 산을 넘고 골짜기를 지나서 골짜기 가운데 자리를 얻었는데, 햇볕이 잘 들고 편평하고 넓었다. 그 땅을 검고, 샘물은 달았다. 바위에 기거하며 고결함을 나타냈다. |
3 |
산신용천 (山神涌泉) |
일찌기 독이 있는 자라를 만났는데, 바르게 앉아서 무념무상이 되었다. 이때 아름다운 부인이 나타나서 절을 하며 약을 바쳤다: "아이가 몰라봤습니다. 샘물이 나오게 하여 잘못을 보상하겠습니다." 앉은 돌을 쳐다보니, 돌의 사이에서 물이 솟아나왔다. 당시 사람들은 구자신(九子神)이라고 했다. |
4 |
사사부경 (寫四部經) |
일찌기 사부의 경전을 쓰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산을 내려가 남릉에 이르니, 유탕(兪蕩)등이 써서 바쳤다. |
5 |
제갈건사 (諸葛建寺) |
지덕초기, 제갈절(諸葛節)등이 산을 올랐는데, 산이 깊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 구름과 해가 선명했고, 오직 승려 한명이 있었다. 눈을 감고 석실에 있었는데, 그의 곁에는 다리가 부러진 정(鼎)이 있는데, 솥안에는 흰흙과 좁쌀을 끓여서 먹고있었다. 노인들이 엎드려 울면서 "스님께서는 어찌 이렇게 고행을 하십니까.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돈을 내서, 단공의 옛땅을 사서, 감히 죽음을 무릎쓰고 청하니, 대사께서 따랐다. 산에서 가까운데 사는 사람들이 소눔을 듣고 사방에서 몰려들어, 나무를 베고 건물을 지어서, 선거(禪居)를 만들었다. |
6 |
승유보좌 (勝瑜輔佐) |
상수(上首) 승려 승유등이 같이 대(臺)와 전(殿)을 지었다. |
7 |
장암주액 (張巖奏額) |
건중초기, 장암이라는 사람이 스님의 고풍양절을 흠모하여, 시주를 많이 했다. 옛 편액이 없어져서 조정에 청하여 편액을 받아서 절에 걸었다. |
8 |
감화토상 (感化土商) |
서강의 고객이 구름밖의 산을 보고 비단 약간필과 돈 약간민을 시주하고, 향을 불살라 예를 표하며 멀리서 기도했다. 스님의 덕이 넓은 까닭이다. 하물며 친히 이끌고 깊이 느끼게 해준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다. 주변의 호족들도 반드시 땅과 돈을 바쳤다. 부호들과 호족들이 돈을 가볍게 여겨서일까. 아니다 스님의 덕에 감화되었기 때문이다. |
9 |
중승운집 (衆僧雲集) |
본국에서 이를 듣고 서로 바다를 건너왔으니, 제자가 아주 많았다. 스님은 먹을 양식이 없을까 우려하여, 돌을 드러내 흙을 얻는다. 그 색이 청백색인데, 섞지 않아도 밀가루와 같았다. 여름에는 흙을 먹고 겨울에는 반화(半火)를 입었다. 적지도 많지도 않았다. 밭과 장작은 모두 자급자족한다. 그의 무리들은 법으로 정신을 살찌우지, 먹는 것으로 몸을 살찌우지 않았다. 남방에서는 고고중(枯槁衆)이라고 불렀고, 존경해 마지 않았다. |
10 |
현입열반 (現入涅槃) |
당시 나이 구십구세. 정원10년 여름, 돌연 제자들을 불러서 작별인사를 해서 제자들이 어찌할 바를 모른다. 오직 산명석운(山鳴石隕)을 들었다. |
11 |
육신불부 (肉身不腐) |
결가부좌를 하고 3주가 지나 탑에 들어갔다. 얼굴은 살아있을 때와 같았다. 골절을 움직이면 마치 금진(金鎭)을 흔드는 것같았다: 경전에 말하기를, '보살구진(菩薩鉤鎭), 백해명의(百骸鳴矣)'라 했다. 탑이 있는 곳에 빛이 불처럼 나왔다. |
비관경의 석지장에 대한 기록은 대체로 위에서 쓴 11가지 사적으로 나뉘어진다. 승지장이 신라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구화산에서 고행하면서 수도한 경력을 적고 있다. 그의 수행과 고결한 정신은 현지의 관리와 지주, 백성들을 감동시키고, 외지 상인과 신라국의 사람들까지 감동시킨다. 심지어 산신까지 감동시켜서 샘이 나오게 해준다. 산신이 샘이 나오게 한다든지, 육신이 썩지 않았다든지 하는 것은 승지장이 찬녕의 <고승전>에서 신이편에 기록되게 한다. 비관경의 글이 나온 이후, 승지장에 대한 기록은 전후로 찬녕의 <고승전>, 명나라때의 <신승전>, 명나라때에서 민국에 이르기까지의 각종 <구화산지>에 나온다. 엄숙한 승려의 건기나 지서오서 역대편찬자들은 승지장에 대한 칭호나 신분을 약간 다르게 기재한 것을 제외하면, 그의 사적은 대체로 비관경의 글을 따랐고, 비관경의 글보다 간략했고, 기록한 사적도 적었다. 조금 다른 것이라면, '신선이 샘을 솟게 해준 것"이다. 만력버전, 숭정버전, 강희버전, 건륭버전의 <구화산지>는 모두 "처음에 절을 만들었을 때 물을 길으려 멀리 가서 힘들었는데, 용녀가 샘물이 나오는 곳을 알려주었다." 이렇게 하여 독자라를 만나고, 신선이 그 잘못을 보상해주었다는 것을 빼고, 직접 '용녀가 샘물이 나오는 곳알려주었다"고 고쳐 버린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당나라때부터 청나라때까지의 승려전과 지서의 승지장의 평생내력에 관한 여러가지 기록은 모두 비관경의 글을 기본으로 하였고, 비관경이 쓴 범위를 넘어서지 않았다. 비록 역대 승려전과 지서의 승지장에 대한 기록이 크게 바뀌지 않았지만, 민중의 승지장에 대한 인식은 큰 변화가 일어난다. 이는 전설과 이야기가 많이 나온 덕분일 것이다.
명,청시기에 승지장에 대한 이야기가 널리 퍼진다. 이들 이야기는 대체로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하나의 유형은 김지장이 직접 관련된 것으로, 명지원(茗地源), 황립도(黃粒稻), 오채송(五釵松), 가사차지(袈裟借地), 체청(諦聽)등의 이야기이다; 또 다른 유형은 김지장을 목련보살(目連菩薩), 지장보살(地藏菩薩)의 이야기에 섞어 넣어서 지장보살과 혼동하는 것이다.
가장 먼저 비관경의 <구화산화성사기>에 없는 승지장의 전설이야기가 나오는 문헌은 진암의 <구화시집>이다. 진암은 송말원초의 사람이다. <구화시집>이 재각(再刻)될 떄, 방시발(方時發)이 서문을 썼다. 낙관시기는 지대 무신년(1308년)이다. <화성사>라는 시의 뒤에 진암이 달아놓은 원주석은 이렇다: "당나라 건중 중기, 김지장이 이 곳으로 왔다. 신도들이 편평한 밭 수천무가 있었고, 황립도를 심었다. 밭에는 차를 심었는데, 다른 곳과 달랐다. 그래서 '명지원'이라고 불렀다. 정자의 뒹는 오채송이 있는데, 속이 꽉차고 향기로웠다. 모두 신라에서 옮겨 심은 것이다." 그리고 황립도, 명지원(일명 金地茶)과 오채송에 대하여 각각 시를 짓고 주석을 단다. <황립도>의 원주석은 이렇다: "구화산에서 나온다. 옛날에 전해지기를 김지장이 신라에서 종자를 가지고 와서 이곳에 심었다고 한다. 그 망(芒)은 영(潁)하고, 그 알은 통통하고, 그 색은 은은하고, 그 맛은 향기롭고 부드러워 다른 벼와 달랐다." <금지차>의 원주석은 이렇다: "구화산에서 나온다. 전해지기로 김지장이 서역에서 가지고 온 것이다." <오채송>의 원주석은 이렇다: "구화산에서 나온다. 매 가지마다 오화오고(五花五股)이고, 그 열매는 먹을 수 있다....김지장이 서역에서 가져왔고, 씨를 가져와서 탑사의 앞에만 있다. 특히 다른 점은 한그루가 마르면 곁에 한그루가 나온다" 그리고 <안좌암(晏坐巖)>의 원주석은 이렇다: "명지원의 남쪽에 김지장이 항상 동료들을 데리고 안좌암에 와서 있다가 돌아갔다." 그리고 <화당간(花塘澗)>의 원주석은 이렇다: "용지의 서쪽에 그 물은 방생지에서 나온다. 화성사에서 뿌리는 향화는 냇물을 따라 흘러 내려간다. 지장은 일찌감치 물레방아를 두었고, 그래서 속명이 수대갱(水碓坑)이다" 그리고 <전차봉(煎茶峰)>의 원주석은 이렇다: "옛날에 김지장이 동료들을 데리고 봉우리 앞으로 와서, 샘물을 길어 차를 끓였다." 진암의 <구화시집>에 나오는 김지장에 대한 기록은 비관경의 글에 나오는 '육신불부', '산신용천'의 신기한 이야기를 담고있는 외에, 황립도, 금지차, 오채송, 안좌암, 수대갱등은 모두 신기할 것이 없는 것들이고, 확실히 그런 일이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이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다. 송,원시대까지는 사람들이 김지장에 대하여 새로운 신격화를 진행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가사차지와 체청의 전설이야기는 아주 강한 신이성(神異性)을 지니고 있다. 이 두 개의 전설이야기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청나라 도광3년 비구 의윤(儀潤)의 <백장총림청규증의기> 권3에는 완전하고 성숙된 이야기가 실려 있다:
부처가 입적한 후 천오백년이 지난 후 지장보살은 신라국와 군주집안에 내려온다. 성은 김이고 호는 교각이다. 영휘4년, 나이24세에 삭발하고, 삽살개 선청을 데리고 바다를 항해하여 왔다. 강남 지주부(池州府) 동쪽 청양현 구화산에 이르러, 구자산(九子山)의 머리에 75년간 단좌해서 개원16년 칠월 삼십일 밤에 성도(成道)한다. 나이 99세이다. 당시 각로 민공이 있는데, 평소에 좋은 생각을 하며, 매번 재를 지낼 때바다 100명이 승려를 부르는데, 반드시 한 자리를 비워 놓았고, 동굴에 있는 승려로 그 자리를 채웠다. 승려는 가사를 둘 땅을 청했고, 민공이 허락한다. 그러자 가사는 9개의 봉우리를 덮는다. 모조리 희사한다. 그의 아들이 출가하고자 하니 바로 도명화상이다. 공도 나중에 속세를 떠나, 거꾸로 아들을 스승으로 모신다. 그래서 지금도 시상(侍像)을 보면, 왼쪽이 도명이고, 오른쪽이 민공이다. 그것은 이런 연유때문이다.
가사차지의 이야기는 비관경의 글에는 없는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김교각의 명호, 백견선청(白犬善聽), 민공(閔公)과 도명(道明) 부자등이 있다. 이들 내용은 한꺼번에 형성된 것은 아니고, 점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김지장과 지장보살을 홑동하고 점차 지장보살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김지장은 목련, 광목, 지장보살과의 이야기가 점점 통일되기 시작한다. 이는 주로 보권(寶卷)등 민간문학이야기에 나온다
광서 신축년(1901년)에 간행된 <지장보권> 내의 판화에는 직접 지장, 도명과 민공의 조합을 그린다. 글에서는 직접 김지장을 지장보살이라고 부를 뿐아니라, 따로 장을 두어 김지장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내용은 <지장보살본원경>의 지장보살의 본생이야기로 바라문녀, 소국왕, 광목녀부터 김교각의 이야기까지 섬라국의 왕자(비관경의 '신라왕자'라는 말도 다른데,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겠다)가 칠월 삼십일 태어나서, 부처가 지목한대로 구화산으로 간다. 그 후에 예후(猊吼)를 항복시켜 좌기(座騎)로 삼는다. 그리고 민공에게 가사로 땅을 빌리고, 신통력을 발휘하며 최종적으로 득도하여 유명(幽冥)을 집장(執掌)한다.
하양(河陽)의 <지장보권>과 청나라 동치14년(1888년)에 간행된 <삼세광목보권>의 이야기는 대체로 비슷하다. 지장보살이 삼세에 수행하여 비로소 성도했으며, 제1세는 나장장자(羅長長者)이고, 제2세는 태자(太子)이고, 제3세는 광목녀(光目女)이다. 광목녀는 모친을 구하기 위해, 유명교주(幽冥敎主)가 되기로 맹세하고, 지옥으로 들어간다. "광목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준다. 이름을 체청(諦聽)이라고 하며 그에게 붙어 다닌다. 광목의 두 발 아래에 엎드려 있으며 보살의 몸을 떠나지 않는다." 나중에 다시 구화산으로 간다.
그리고 광목선녀가 수행의 성과를 얻었다. 구화산에 지장보전을 짓고자 하는데, 땅이 없었다. 또한 나무 재료도 없었고, 돈도 없어서 건물을 지을 수가 없었다. 그저 외부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마침 선남 문원외(文員外)를 만났다. 그가 말하기를, "얼마나 많은 재료가 필요합니까. 나 혼자 도와줄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 9개의 산은 이름이 구봉정(九峰頂)인데, 모두 우리 집안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토지와 수목이 필요합니까. 얼마든지 필요한만큼 가져가십시오." 광목이 말하기를, "많이 필요하지는 않다. 그저 장삼만큼의 땅이면 된다. 다면 나중에 후회하지는 말라." 원외가 말하기를, "마음 속으로 원해서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후회하겠습니까?" 광목은 장삼을 벗었다. 누가 알았으랴 9개의 산봉우리가 모두 덮였다. 문원외를 이를 보고 깜짝 놀란다. 그러면서, 말한다: "대단합니다. 대단합니다. 이 스님은 보통사람이 아닙니다." 긜고 수목을 베어서 재료로 삼고, 금과 은을 내놓고, 길일을 골라서, 착공하여 공사를 시작한다. 사방의 선량한 사람들이 역시 보전을 짓는 것을 도와준다.
정강(靖江)의 <지장보전>의 김지장은 신라왕실 출신이 아니다. 중국의 하(夏)왕조 김각로(金閣老)의 집안이다. 김각로는 1품의 고관인데, 국왕을 대신하여 여래(如來)에게 기서 발원을 한다. 여래는 그에게 3가지 보물을 주는데, 바로 가사, 석장(錫杖)과 보주(寶珠)이다. 돌아온 후, 국왕은 3가지 보물을 그에게 상으로 하사한다. 김각로는 고향으로 돌아가 말년을 보내며 좋은 일을 많이 한다. 슬하에 자식이 없어서, 부처가 녹압도인(綠鴨道人)을 김씨집안에 보내주니 이름이 김장보(金藏寶)이다. 그리고 그를 지도하여 출가수행하게 한다. 그가 도를 닦아 성불할 때, 부친 김공선(金功善)은 군대에서 적에게 붙잡힌다. 부처는 김장보에게 속히 부친을 구하러 가도록 시킨다. 김장보는 초대도(肖大刀)등 10명의 적을 물리치고, 부친을 구해낸다. 그리고 승전을 한 후 조정으로 돌아온다. 국왕은 그에게 구화산으로 가서 발원하도록 보낸다. 문무백관을 데리고 향을 사르고 발원을 한다. 김장보는 초대도의 십형제와 집안의 18명 총관을 데리고 구화산으로 간다. 나중에 부처는 김장보(나중에 지장, 지장능인으로 칭한다)을 유명교주로 삼는다. 초대도십형제는 십전자왕(十殿慈王)이 된다. 십팔명 총관은 십팔층지옥의 옥관(獄官)이 된다. 그들은 음산에 십팔지옥을 건설한다.
비록 이야기에 큰 차이가 있지만, 김지장과 광목녀, 목련, 지장보살을 혼동하는 생각은 일치한다. 김지장과 지장보살, 목련을 톤동하는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알기 힘들다. 비록 비관경의 글에 "보살구쇄, 백해명의"라고 하여 당시의 사람들이 김지장은 보살로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기는 하지만, 바로 지장보살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가장 먼저 그들을 혼동한 사료로 현재 발견된 것은 <수신기>이다. 명나라중엽이전에 만들어진 <삼교원류성제불조수신대전>권7과 명나라 만력21년(1593년)에 만들어진 <신각출상증보수신기대전> 권3에 모두 '지장왕보살'조목이 실려 있는데, 내용은 일치한다:
집장유명교주. 십지염군(十地閻君)이 이끌고 조하(朝賀)의 예를 하였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왕사성(王舍城) 부라복(傅蘿卜)은 법명이 목건련(目犍連)이다. 일찌기 여래를 스승으로 모시고, 모친을 아귀군총(餓鬼群叢)에서 구해냈다. 우란성회를 열어 죽은 후 지장왕이 되었다. 칠월삼십일이 태어난 날이어서 사람들이 예배를 한다. 혹은 말하기를 오늘날 청양 구화산의 지장이라고 한다. 전해지는 바로는 신라국의 승려이고, 당나라때 바다를 건너와서, 구화산에 거주했다. 나이 구십구세에 제자들을 불러서 고별한다. 다만 산명석운이 들리고, 결가부좌를 함중(函中)에 앉아 있었다. 3년후 열고 탑에 넣는데, 얼굴이 살아있는 듯했다. 뼈를 움직이는데 마치 금열쇠와 같았다. 그래서 김지장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전하는 사람이 잘못 전한 것이다.
두 책은 당시 사람들이 김지장과 지장보살을 혼동하는 것에 대하여 판별을 하고 부정한다. 그러나 목련과 지장의 혼동은 부인하지 않는다. 명나라 천계2년(1662년) 유성(劉城)은 <유구화산기>에는 송나라때 사람들이 이미 양자를 혼동하는 것을 판별한 일을 언급한다. "송나라때 사람들이 이런 말을 했다. 신라왕자 김지장은 불국의 지장왕이 아니다. 구화비판을 보면 그러하다. 그러나 지장이 이곳에 온 것은 당나라 지덕 이전이고, 정원 10년에 열반했다. 부처의 응화지신이 아니라면, 어찌 땅에서 샘이 솟게 만들며, 죽을 때 산명운석하며, 뼈를 펴고 굽히는데 살아있을 때와 같겠는가? 지장을 둘로 나누어서 다르게 보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다." <수신기>와 달리, 유성은 긍정하는 견해를 취한다. 김지장은 바로 지장보살의 응화(應化)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말한 '송나라때 이미 사람들이 양자를 혼동했다'는 것은 사료에서 증빙을 찾을 수가 없다. 명나라때의 조학전의 <유구화산기>에서도 이 일을 언급한다. "글에서 말하는 사람은 승지장이 아니라 불지장이다." 라고 하여 유성의 견해와 반대로 부정한다. 명나라때의 전겸익은 <지장암기>에서 역시 양자를 구분한다. "만일 구화의 지장이 개원초기 신라에서 바다를 건너왔다면 그 이름이 우연히 같은 것일 뿐이다." 이런 논쟁은 청말민초에도 여전히 존재했다. 광서제때의 <구화산지>와 민국때의 <구하산지>에서넌 전통적인 체제를 벗어나 정식으로 김지장을 지장보살로 인정한다. 그리고 고승과 분리시켰다. 그 목적은 바로 김지장이 지장보살이라고 확정하여, 세상사람들의 의문을 해소시키는 것이다.
http://wemedia.ifeng.com/24006112/wemedia.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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