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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Afong Moy: 미국으로 이민간 최초의 청나라 여성

by 중은우시 2019. 4. 16.

글: 고회민(高會民)


오늘날 세계는 아주 좁아졌고, 사람들의 국제교류도 아주 편리해졌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마 상상도 되지 않을 것이다. 1830년대에 한 대청국의 젊은 여성이 미리견합중국(美利堅合衆國)으로 이민갔었다는 것을. Afong Moy. 전미부녀역사박물관(The National Women's History Museum)의 역사자료에 따르면, 역사학자들은 대부분 그녀를 최초로 미국이민온 중국여자라고 인정한다. 아마도 그녀는 최초로 미국으로 건너온 중국이민일 수도 있고, 최초로 미국에 건너온 동방인일 수도 있다.


1832년, 미국상인인 Carne형제(Nathanial Carne과 Fredrick Carne)는 중국 광주에 처음 도착한다. 이곳에 오기 전에 그들은 프랑스에서 각종 물품을 수입하여 미국으로 가져가 상당한 돈을 벌었다. 그러나 그들은 각종 경로를 통하여 동방에 아직 개발되지 않은 시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이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중국으로 온다. 거기에서 그들은 여러 종류의 값싸고 질좋은 중국상품들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미국으로 가져가서 팔려는 것이다.


Carne형제는 뛰어난 마케팅전문가였다. 항상 더욱 잘 사람들에게 그들의 상품을 판매할 방법을 강구했다. 그들의 마케팅전략의 하나로, 그들은 처음으로 살아있는 중국여인을 미국으로 수입하고자 생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중국상품과 함께 미국인들에게 전시하려는 것이다.


1834년 10월 17일, 상선 워싱턴호는 오베이선장의 지휘하에 뉴욕항구로 들어간다. 상선에는 중국에서 온 '신비한 보물'들이 가득했다. 거기에는 19살의 줄리아 푸치(Julia Foochee Ching-chang king)도 있었다. 줄리아의 부친은 미국상인 Carne형제와 광주에서 계약을 체결했고, 줄리아는 Carne형제의 상선에 타게 되었다. 줄리아 푸치의 중문이름은 더 이상 고증할 방법이 없다.


줄리아 푸치는 기실 Carne형제가 그녀의 부친으로부터 사들인 것이다. Carne형제의 마케팅전략에 따라 실제는 전시품으로 전시되어, 중국상품판매에 도움이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녀가 전시되기 전에, 뉴욕상보에는 중국여인이 뉴욕여인이 왼손으로 옷을 봉제하는 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보는 장면을 묘사하는 글이 실렸다. 글에 따르면, 중국여인은 한번도 왼손잡이인 여인을 본 적이 없었으며, 그래서 '기괴한 웃음소리를 터트렸다'고 했다.


1834년 11월 6일, Carne형제는 처음으로 뉴욕의 신문에 광고를 실어 전람관에서 이국적 분위기가 충만한 중국여인을 전시한다고 알린다. 그리고 그녀는 청나라 황실의 구성원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해서. 광고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한 아름다운 중국여인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Julia Foochee Ching-chang king이다. 대청국 왕야의 딸이고, 금년 19세이다. 키는 4피트10인치이고 자신의 민족의상을 입고 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쇠신발(Iron shoes)을 신었기 때문에 그녀의 발은 4인치밖에 되지 않는다." 뉴욕사람들이 쉽게 기억하게 하기 위하여, Carne형제는 그녀의 이름을 더욱 발음하기 쉬운 Afong Moy라고 바꾼다.


당시 입장료는 50센트였다. 이 가격은 사람들이 서커스공연을 보러 가는 가격과 같았다. 누구든지 오전 10시에서 오후 2시 사이에, 그리고 오후 5시에서 오후 9시 사이에 와서 Afong Moy를 참관할 수 있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이 낯선 여자의 전족한 발을 구경할 수 있었다. Moy는 단아하게 장식된 전람관내에서 통역인 Atung을 통하여 중문으로 참관하는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했다. 예를 들어, 어떻게 젓가락으로 식사를 하는지 등등. 그리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통역인 Atung의 안배하에 그녀는 전족으로 호기심어린 참관자들 앞에서 걸어보인다. Moy는 중국의 청나라때 태여났고, 다시는 전족이 유행했다. 민국초기에 이르러 비로소 점점 사라지게 된다.


Carne형제는 그녀를 중국에서 가져온 중국상품과 함께 전람회의 중앙에서 전시했다. 여기에는 화병, 도자기, 예술품과 장교한 조각이 되어 있는 탁자, 의자등이 있었다. 그들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자연환경에서 Moy를 전시하고 싶다고. 그러나 의문의 여지없이, 이는 아주 정교하게 기획된 것이다. 전시를 통하여 그들은 중국상품을 마케팅하고 지명도를 높였다.


비록 일반민중은 Afong Moy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졌지만, 그들은 그녀를 문화적인 호기심의 대상으로 여겼다. 일부 기자는 Carne형제가 Moy를 이용하여 마케팅하는 것을 비인도적이라고 여긴다. 그리하여 Carne형제가 Moy를 잔인하게 통제하고 조종하는 것을 비난한다. <뉴욕경보>는 심지어 사설을 통하여 Carne형제가 '잔인하게 신체적 장애가 있는(전족을 한) 여성'을 대한다'고 비난했다. 사설에서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중국아가씨 Afong Moy를 보러 가지 않았다. 우리는 이렇게 악명높은 전시를 반대한다. 사람을 동물처럼 대하고, 한번에 50센트를 받는."


Afong Moy는 나중에 미국에서 어떻게 되었을까? Moy가 뉴욕에서 처음 전시된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녀의 이후 생활이 어떠했는지에 대하여 정설은 없다. 그녀는 도대체 누구였을까? 그녀의 과겨역사는 어떠했을까?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이것은 모두 수수께끼이다. Carne형제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그녀가 '중국공주'라는 신분은 위조된 것이라고.




보도에 따르면, 1834년에서 1847년까지, 미국인들이 신기하게 여기는 다른 전시품들과 함께 미국 전역에서 순회전시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앤드류 잭슨 대통령도 만났다고 한다. 1836년 7월의 어느 신문에는 Afong Moy가 "Peale"이라는 박물관에서 중국으로 돌아가기 전의 마지막 고별전시를 한다고 실리기도 했다. 보도에 따르면, 그녀는 거의 모든 미국도시를 순회하며 전시되었다. 그러나 다른 일부 역사자료에 따르면, 그녀는 나중에 주로 뉴욕에서 거주했으며, 1847년에는 보스턴으로 이주했고, 1850년에도 그녀에 관한 보도를 여전히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