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진시황)

진시황의 사망전에 일어난 3대괴사(怪事)는 천의(天意)인가, 인위(人爲)인가?

중은우시 2018. 11. 19. 11:19

글: 송초(松樵)


진시황은 39살때 천하통일의 대업을 완성했다. 분서갱유를 통하여 진시황은 사상문화상 전제집권통치에 불리한 요소를 제거하고, 고도로 권력이 집중된 대진제국의 구조를 만든다. 일생동안 권력집중을 추구했던 진시황은 마침내 더 이상 걱정거리가 없게 된 것이다.


이런 것이 끝난 후 진시황은 어떻게 하면 장생불로하여 만세지존이 될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그러나, 일련의 괴이한 사건이 발생하여 진시황은 좌불안석이 되고 심신이 불안해졌다.


피흉추길(避凶趨吉)을 위하여, 진시황은 49세가 되었을 때, 그의 인생에서 다섯번째 순유에 나선다. 순유의 원래 목적은 장생불사였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자신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간 것이 되고, 하나의 천고의 수수께끼를 남긴다. 진시황이 사구에서 급사하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진시황의 이번 순유는 도대체 어떤 배경하에 일어난 것일까? 진시황은 왜 기이하게 순유 도중에 죽은 것일까? 진시황이 죽기 전에 3가지 괴사가 발생한 바 있다. 이들 괴사는 <사기. 진시황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첫번째 사건은 "형혹수심(熒惑守心)"의 천상(天象)이다.


중국역사상의 역대제왕은 천상을 모두 아주 중시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천상이 천의를 나타낸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여러 천상 중에서 특히 두 가지는 관심을 끌었는데, 하나는 오성연주(五星連珠)이고, 다른 하나는 형혹수심이다.


무엇이 오성연주인가? 바로 금성, 목성, 수성, 화성, 토성의 5개 행성이 1직선으로 늘어선 것이다. 이것은 가장 길(吉)한 천상으로 여겨졌다. 사서에 기록된 것은 유방이 등극하는 해에 오성연주의 천상이 나타났다고 되어 있다. 현대의 천문학자들이 컴퓨터로 계산한 바에 따르면, 오성연주는 유방이 즉위한 다음 해에 나타났다.


컴퓨터로 추산한 바에 따르면, 중국역사상 두번의 오성연주는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한번은 여후가 칭제했을 때이고, 한번은 무측천이 칭제했을 때이다. 사학자들은 오성연주를 여주(女主)가 천명에 순응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아서, 오성연주가 나타났지만 기록해놓지 않았던 것이다.


가장 불길(不吉)한 천상은 무엇인가? 형혹수심이다. 무엇이 형혹수심인가? 중국고대에는 '화성'을 '형혹'이라고 불렀다. 이십팔수(二十八宿)중에서 '심수(心宿)'는 '심(心)'이라고 줄여 부른다. '심수'는 현대 천문학에서의 '전갈자리(天蝎座)'이다. 주로 3개의 별로 구성되어 있다. 화성이 전갈자리의 3개 별 근처로 운행하여 그 곳에서 한동안 머무는 것이 바로 중국의 고인들이 말하는 '형혹수심'의 천상인 것이다. 이 천상은 이렇게 해석한다. 전갈자리의 가장 빛나는 별은 황제를 대표한다. 그 곁의 두 개의 별은 하나가 태자이고 하나가 다른 황자이다.


이런 천상을 왜 불길하다고 여겼을까? 중국고대의 천문학은 점성학이라고 부르는데, 점성학의 가장 주요한 임무는 바로 황권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다. 황제는 점성관을 두었고, 이 관리는 황제를 위하여 일한다. '형혹수심'이 나타났다는 것은 고대인들에게 가벼우면 천자가 자리를 잏고, 엄중하면 천자가 사망한다는 것으로 인식했다.


서한말기에 사서에 기록된 사례를 하나 보기로 하자. 수화2년(기원전7년)의 중춘(仲春), 누군가 한성제의 승상에게 '형혹수심'의 천상이 나타났다고 보고한다. 승상은 상소문을 보고 아주 곤란해 하며 어찌할 바를 모른다. 점성관은 한성제에게 보고하여, 천상에 변이 있으니 국운에 액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만일 화를 대신에게 떠넘기지 않으면, 국가가 위난에 빠질 것이라고 말한다. 한성제는 정말 그 말을 믿었고, 보고를 받은 후에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른다. 더 이상 많은 생각을 하지 않고 바로 화를 승상에게 떠넘긴다.


황제는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기 위하여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승상은 화를 떠넘길 수 있는 첫번째 후부이다. 그리하여 한성제는 즉시 승상을 조정에 들도록 명한다. 그리고 그에게 재상으로 여러 해를 있으면서, 음양을 잘 다스리지 못해서 천상에 변이가 일어났다고 질책한다. 승상은 집으로 돌아가면서 하루 종일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이번 화를 피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도 요행을 바라는 마음은 있었다. 그러나, 한성제는 일찌감치 그를 희생양으로 삼기로 결정해 버렸다.


다음 날 아침, 한성제는 사라을 보내어 승상에게 조서를 내린다. 원래 승상이 청명, 용감하여, 국가를 잘 다스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10년간이나 승상으로 있으면서, 국가에 재난을 가져왔다. 너와 같은 승상이 어찌 나를 보좌하여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네가 국가에 여러해동안 공헌한 것을 생각하여 너의 관직을 차마 파할 수는 없다. 너도 국가를 자기 집처럴 걱정해주기 바란다. 그리고 한성제는 그에게 좋은 술과 황소를 하사한다. 한왕조의 관례에 따르면 황제가 대신에게 소와 술을 내리는 것은 바로 사사(賜死)를 의미한다. 승상은 황상의 뜻을 잘 알았고,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독약을 마시고 자살한다.


승상이 자살한 후, 한성제는 비로소 마음을 놓는다. 급히 소식을 전하여 승상이 급사했다고 밝히고, 후한 하사품을 내린다. 한성제는 친히 승상의 집으로 여러번 가서 조문을 했고, 그는 이후에는 국운이 형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자신의 천명도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1년도 지나지 않아, 남에게 화를 떠넘겼던 한성제도 급사를 하고 만다.


화를 승상에게 떠념길 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 황제들은 '형혹수심'을 더욱 두려워하게 된다. 이것은 당연히 진시황 이후의 일이다. 진시황은 몰랐다. 다만, 천상의 변화는 황제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것은 온 나라가 관심을 가지는 사건이다. 진시황36년(기원전211년), 연이어 3건의 진시황을 우울하게 만드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첫번째 싸건이 바로 '형혹수심'이다. <사기.진시황본기>의 기록은 "삼십육년형혹수심"이다. 진시황이 이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분이 좋지 않았겠는가?


두번째는 "운석(隕石)사건"이다.


진시황36년, 유성 하나가 동군(東郡)에 떨어진다. 동군은 진시황의 즉위초기 여불위가 승상으로 있을 때 공격하여 얻어낸 곳이다. 당시 동군은 제(齊), 진(秦)두 나라의 경계지역이었으나, 지금은 대진제국의 동쪽 큰 군이 되어 있었다. 운석이 땅이 떨어진 것은 겁날 것이 없다. 겁나는 것은 운석의 위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는 것이다. "시황제사이지분(始皇帝死而地分)" 이 일곱 글자는 엄청난 것이다. 그것은 하늘의 뜻을 대표하는 것이고, 진시황이 죽을 것이며, 동시에 대진제국이 망하여 나뉠 것이라고 예고한 것이다.


이런 사정이 발생했는데, 지방관이 태만히 할 수는 없다. 이 소식은 날개달린 것처럼 신속히 진시황의 귀에 들어간다. 진시황은 놀라서 어쩔 줄 모르고 즉시 어사를 파견하여 운석이 떨어진 곳으로 보낸다. 그곳의 사람들을 하나하나 조사하여 운석에 글자를 새긴 사람을 찾아내려 하지만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만다.


분노한 진시황은 명을 내려, 이 운석의 곁에 있던 모든 사람을 처형하고, 즉시 이 글자게 새겨진 운석을 불태워없앤다. 사람도 죽이고, 돌도 불태웠다. 그러나 진시황의 마음 속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세번째 일은 침벽(沉璧)사건이다.


이해 가을, 다시 한 건의 불가사의한 일이 발생한다. 밤길을 걷던 사자(使者)가 동쪽에서 화음을 지나가는데, 돌은 옥벽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이 길을 막는다. 그는 사자에게 말한다. 너는 나를 대신하여 이 옥벽(玉璧)을 호지군(浩池君)에게 전달하라. 그리고는 사자에게 이렇게 추가한다. "금년조룡사(今年祖龍死)" 사자는 무슨 말인지 몰라 급히 무슨 뜻인지를 물어본다. 그러나, 그 기괴한 사람은 옥벽만을 남기도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은 채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멍했지만 느낌이 좋지 않은 사자는 옥벽을 가지고 함양으로 돌아와서 즉시 진시황에게 보고한다. 진시황은 그 말을 들은 후, 첫번째 보인 반응은 그 말 속의 '조룡'이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한 마디를 내뱉는다. '산귀(山鬼)는 기껏해야 일년의 일을 알 뿐이다." 퇴조후에 진시황은 다른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한다. '조룡이라는 것은 조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일이 계속 그의 머리 속을 맴돌며 괴롭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후에 그는 사람을 보내어 사자가 가져온 옥벽을 어부로 보내어 검사해보게 한다. 감정결과는 바로 이 옥벽은 진시황이 진시황28년(기원전219년) 순유하며 장강을 건널 때, 수신에게 제사지내며 강 속에 던졌던 것이라는 것이다. 10년전에 수신에게 제사지낸 옥벽이 어찌 신분도 불명확한 사람에 의하여 되돌아온단 말인가?


화불단행(禍不單行)이다. 1년동안 연속하여 3건이나 괴이한 일이 일어나자 진시황은 마음이 우울해진다. 그는 이 사건들에 관하여 점을 쳐본 결과 얻어낸 결론은 바로 출순(出巡)과 백성의 이주로 피흉추길(避凶趨吉)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진시황은 명을 내려, 3만호를 북하, 유중지구로 이주하게 하고, 이주하는 모든 호에게 작위를 준다. 이 3가지 사건은 <사기.진시황본기>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기원전210년, 진시황의 제5차순유의 방대한 차대(車隊)가 북쪽(지금의 내몽고 빠오터우)에서 직도(直道)를 따라 급속히 남쪽의 함양으로 전진한다. 이 차대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었다: 하나는 차대에 수십량의 외형이 완전히 같은 호화수레가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이 수십량의 호화수레에서는 코를 찌르는 악취가 났다는 것이다.


원래, 이 수레중 몇 개의 수레에는 악취를 풍기는 전복을 가득 실었다. 그외의 한 호화수레에는 이미 썩어서 냄새가 나는 시신이 있었다. 시신의 악취와 전복의 악취가 서로 섞여서 전체 차대에 악취가 진동했다. 수행인원중 몇 명은 이 시신이 누구인지 알았다. 여러 대신과 수행인원들은 이 차대의 비밀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진시황이 냄새나는 전복을 먹고 싶어하는 줄 알았다.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일은 이 이미 썩어서 냄새가 나는 시신이 바로 중국역사상 대명이 자자한 진시황이라는 것이다. 진시황은 생전에 아마도 전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인생 폐막식이 몇 대의 악취를 풍기는 전복과 함께 하게 될 줄은. 이것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원래 하늘에 '형혹수심'의 천상이 나타나고,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지고, 운석에 진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참어가 적혀 있고, 십년전에 수신에게 제사지내며 강에 던진 옥벽이 기이하게 되돌아오는 일련의 사건으로 진시황은 아주 우울해 있었다. 점을 쳐보니 반드시 순유를 해야한다고 햇다. 그래야 흉을 길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진시황은 진시황37년(기원전210년) 제5차순유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전해에 3건의 괴사가 있었으므로, 이번 순유는 이미 진시황이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한 남다른 큰 사건이 되어 있었다. 이번 순유는 무엇인가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피흉추길하기 위함이다.


좌승상 이사는 진시황의 심복으로 그를 따라 순유에 나선다. 우승상 풍거질(馮去疾)은 도성을 떠날 수 없어서 명을 받아 경성을 지킨다. 진시황의 어린 아들 호해는 평소에 부황의 총애를 받았고, 부친에게 부탁하여 순유를 따라나선다. 그는 기회를 아주 잘 잡은 것이다.


진시황의 제5차순유는 진시황37년 십월에 출발하여, 다음해 칠월까지 9개월간 지속된다. 이 구개월동안, 진시황은 남으로 절강의 전당을 가고, 회계로 가서 대우에게 제사를 지내고, 돌에 새겨서 공덕을 칭송한다. 당연히 대진제국과 자신의 위업을 칭송한 것이다. 그 후에 북상하여 낭야(지금의 산동성 린이)로 간다.


다만 평원진(지금의 산동 평원현 서남)에 도착했을 때, 진시황은 병이 걸린다. 중국고대의 "병(病)"은 현대의 '병'과 개념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가벼운 병은 고대문헌에서 그저 '질(疾)'이라고 부른다. 중병만을 '병'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평원진에 이르러 병이 들었다'는 말은 평원진까지 왔을 때 중병이 들었다는 말이다. "황상의 병이 날로 심해졌다(上病益甚)"는 것은 진시황이 이미 위중해졌다는 말이다. 이때 진시황도 스스로 좋지 않은 예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새서(璽書)를 공자 부소에게 내렸다". 공자부소에게 글을 써서 옥새를 찍은 조서를 내린 것이다. 공자 부소로 하여금 함양으로 돌아와 장례를 주관하라는 것이다.


<사기.이사열전>에는 더욱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병이 심해지자, 조고에게 명하여 공자 부소에게 글을 써서 이르기를: '병력은 몽염에게 맡기고 함양으로 와서 장례를 주재라하. 글을 봉하고, 사자에게 주기 전에 진시황이 붕어했다. 조서와 옥새는 모두 조고에게 잇었다. 아들 호해, 승상 이사, 조고 및 총신 5,6명이 시황제가 붕어한 것을 알았고, 나머지 여러 신하들은 모르고 있었다."


진시황의 병이 위중할 때 특별히 조고로 하여금 장남 부소에게 보내는 조서를 쓰게 했고, 그에게 병권은 몽염에게 넘기고, 함양으로 와서 장례를 주재하도록 시켰다. 다만, 조서를 아직 사자에게 넘겨주기 전에 진시황이 이미 죽어버린 것이다. 이 조서와 옥새는 모두 조고가 보관하고 있었고, 이 일은 호해, 이사, 조고와 몇 몇의 가까운 총신들만이 알고 있었다.


다만, 옥새를 찍은 황제의 조서를 사자에게 주어서 전하게 하지 않고, 중서부령, 행부새사(行符璽事)인 조고의 손에 있었다


전체 순유의 차대는 진시황의 병이 위중하다고 하여 멈추지 않고, 계속하여 서행한다. 사구(지금의 하북성 광종현)의 평대에 도착하여 진시황이 사망한다. 이리하여 앞에서 말한 일막이 벌어진 거시다. 사마천은 <사기.진시황본기>에서 두 문장으로 간략히 서술한다: "칠월병인(七月丙寅), 시황붕어사구평대(始皇崩於沙丘平臺)" 


이 해(기원전210년)에 ,진시황은 실제로 49살이었다. 다만 고인들은 허세(虛歲)로 계산하므로, 우리는 보통 진시황이 오십살에 병사했다고 말한다.


황제의 병사는 건립된지 겨우 12년된 방대한 제국에 있어서 엄청난 일이었다.


진시황이 어떻게 죽었는가? 49살된 남자라면 아주 건장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 돌연 사망한단 말인가? 진시황의 신체상황은 괜찮은 편이었다. 형가가 암살하려 할 때도 그는 대전을 뛰어다니며 피했다. 마치 훈편받은 단거리 육상선수처럼. 그런데 어찌 돌연 사망한단 말인가.


진시황의 사망을 기록한 유일한 문헌인 <사기>에는 그의 병세를 자세히 기록해 두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진시황이 무슨 병을 얻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가 도대체 무슨 병으로 죽었는지도 지금까지 수수께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