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초기)

김묵옥(金默玉): 청나라 마지막 거거(格格)의 기구한 일생

by 중은우시 2018. 12. 24.

글: 임휘(林輝)





가와시마 요시코(川島芳子)라고 말하면, 중국근현대사의 중국인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 청나라 귀족 숙친왕(肅親王) 선기(善耆)의 딸로 반청황조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일본간첩이 되어 한때 이름을 떨쳤다. 그러다가 경국 민국정부에 의해 1948년 한간죄(漢奸罪, 한간은 매국노)로 사형을 언도받고, 총살형을 집행당한다. 가와시마 요시코의 중국이름은 김벽휘(金璧輝)이다. 이 글의 주인공인 김묵옥(金默玉)은 청나라이름으로는 애신각라 현기(愛新覺羅 顯琦)인데, 평생동안 '가와시카 요시코의 여동생'이라는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했고, 일생이 기구했다. 심지어 중국정부에서 15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1918년 요녕에서 출생한 김묵옥의 모친은 숙친왕의 넷째측비(側妃)였다. 집안에서는 17째이다. 그녀가 출생했을 때는 청나라가 이미 망한 후였고, 민국정부가 들어서 있었다. 청나라황실도 자금성에서 쫓겨나 있었다. 숙친왕은 퇴위조서에 서명하지 않은 유일한 친왕이며, 당시 그는 섭정왕 재풍을 암살하려한 왕정위(汪精衛)의 재능을 아껴서 죽이지 않은 인물이기도 하다.


청나라가 멸망한 후, 숙친왕 일가 200여명은 동북 여순으로 도망친다. 선기는 일본인을 이용하여 청나라통치를 회복하려는 꿈을 꾸었다. 그리하여 '만몽독립(滿蒙獨立)'을 꾀한다. 김묵옥이 4살이 되었을 때, 56세의 선기는 돌연 급사한다. 그가 죽기 전에, 김묵옥의 모친도 이미 죽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부모에 대한 인상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동북에 있으면서, 숙친왕부는 여전히 귀족의 습관과 법도를 지켰다. 예를 들어 명절을 맞이하면 조상에 제사를 지내고, 예절을 준수하게 했다. 식사를 하거나 걷는데도 규칙이 많았다. 이에 대하여, 김묵옥은 대륙에서 출판된 구술역사<왕사부적막(往事不寂寞)>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비록 그때 이미 황제는 없었지만, 집안에서는 청왕조의 예의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그때 집안에는 쇼파가 없었고, 앉는 것도 법도에 맞추어야 했다. 엉덩이 절반을 등자(凳子, 등받이없는 의자)에 걸쳐서 앉아야 하고, 얘기할 때는 천천히 머리를 돌려야 했으며 그때 귀걸이는 전혀 흔들려서는 안된다는 기준이 있었다. 평상시 거거는 집밖으로 나갈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저 언니가 결혼할 때, 친척의 생일때, 나갈 수 있었다. 언니들의 말을 들으면, 거거들이 집을 나설 때도 얼굴을 가리고 가마에 타고나서야 비로소 내렸다. 그래서 얼굴을 볼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백성들의 상상 속에는 왕부의 거거는 모두 '미인'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김묵옥은 스스로 "어려서부터 복잡한 예절은 귀찮아 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언니들에게 '혁명아'라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귀찮아 하기는 했지만, 전통귀족식교육의 가정분위기에 살다보니, 김묵옥도 점점 일반인과는 다른 기질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숙친왕이 죽은지 3년후, 북경으로 운구해서 매장하고, 가족들은 혹은 북경으로 돌아오고, 혹은 대련으로 가며 대가족이 흩어지게 된다. 김묵옥은 여순(旅順)에서 13살까지 살다가, 몇몇 오빠들이 부의(溥儀)의 만주국에서 관직을 받는 바람에 그녀도 '만주국'의 도성인 장춘으로 가서 잠깐동안 학교를 다닌다. 나중에 몇몇 오빠들이 일본으로 가면서 김묵옥도 일본으로 따라간다.


일본에서, 김묵옥등 황족들은 일본의 귀족학교에 입학하여 영문을 배운다. 그녀의 학교친구중에는 완용(婉容)의 남동생인 윤기(潤麒), 부의의 여동생, 순친왕(醇親王)의 삼거거(三格格)등이 있었다. 1940년, 부의가 일본을 방문하면서 히로히토(裕仁)천황의 접견을 받는다. 김묵옥등은 그때 처음으로 부의를 보았다. 그렇다고 감동스럽거나 하지는 않았다.


김묵옥의 회고에 따르면, 그때 그들은 매달 대련의 한 회사에서 부쳐주는 100원의 용돈을 받았다. 이는 오늘날로 치자면 1만위안정도 된다. 그래서 생활은 넉넉했다. 부친이 일찍 돌아가셨고, 집안의 남자들도 약해서 그들 가족의 일은 일본인인 가와시마 나니와(川島浪速)가 대신 처리했다. 그는 바로 가와시마 요시코의 양부였다. 결국 집안의 재산은 모두 그가 장악하게 된다.


1941년,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기지를 공습한 후, 김묵옥은 2년의 대학생활을 어쩔 수 없이 중단하고, 일본에서 북경의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그녀가 북경에 처음 상주하게 된 것이다. 그녀의 기억 속에 가장 재미없던 시기이기도 하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 왕푸징(王府井)을 하루에도 몇번씩 오갔다. 그녀는 사방을 돌아다니며 취지하는 기자나 노래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은 어른들의 반대에 막혀서 무산된다. 그후 그녀는 가족들을 속이고 일을 하나 찾는다: '한 일본인이 연 회사에서 고문을 맡았다. 급여는 아주 많았고, 상근할 필요도 없었다."


1949년, 국민당이 쇠락하면서, 김묵옥의 오빠들은 연이어 북평(北平, 북경)을 떠난다. 그녀에게는 겨우 100위안의 돈과 오빠들의 6명의 아이, 그리고 늙은 보모와 그녀의 딸만 남겨주었다.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없는 김묵옥은 어쩔 수 없이 가족생계를 책임지게 된다. 그녀는 집안의 피아노, 카페트, 쇼파, 가죽옷, 유성기등을 차례로 팔았다. 심지어 군인의 옷도 만들어 주었다. 궁박한 와중에 새 정권이 들어선다.


1949년 신중국이 설립된 후 김묵옥은 북경을 떠나지 않기로 결정한다. 그녀가 보기에 '공산당이 싫어하건 말건, 국민당이 원치 않건 말건, 어쨌든 나는 중국인이다". 아쉽게도 그녀는 공산당을 잘못 보았다.


50년대초, 김묵옥은 홍콩의 큰오빠가 보내준 돈으로 '익강(益康)식당'을 차린다. 한때 북경의 유명한 음식점이 된다. 1980년대중반, 곤곡(昆曲)의 명가인 주전암(周銓庵)은 익강식당의 사천요리를 회고하면서, 지금의 사천요리는 익강식당만큼 향이 좋지 못하다고 한 적이 있다. 그는 이렇게도 말했다. 익강식당의 인테리어는 전아(典雅)하면서도 호화스럽지 않았으며, 따스하면서도 속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것은 주인인 김묵옥 자신이 가진 소질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했다. 주전암은 이렇게 탄식했다: "만일 김묵옥이 떠나지 않았더라면, 만일 정치운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익강식당은 분명히 북경의 사천요리점중 최고의 식당이 되었을 것이고, 분명히 도쿄의 긴자에도 분점을 냈을 것이다."


바로 이 기간동안, 김묵옥은 자신의 반려를 만난다. 인터넷의 <거거에서 주방아줌마로: 가와시마 요시코 여동생의 기구한 인생을 풀어본다>라는 글에 따르면, 김묵옥과 화평화점(和平畵店)의 허린려(許麟廬) 선생은 사적인 교분이 아주 깊었다. 그는 익강식당을 도와주었을 뿐아니라, 김묵옥과 화가 마만리(馬萬里)간의 중매를 서주기도 했다. 두 사람은 한달여를 사귄 후, 마만리가 김묵옥에게 청혼하고, 김묵옥도 받아들인다. 마만리는 김묵옥보다 10여세가 많다. 전처가 남긴 딸도 이미 어리지 않았다. 그러나 김묵옥은 초혼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성격이 비슷하고, 취미가 통했고, 서로 사랑했다. 그래서 아주 행복하게 지낸다.


그러나 좋은 시절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금방 중국공산당은 '공사합영(公私合營)'을 명목으로 기업가의 사유재산을 박탈하는 운동을 시작한다. 익강식당도 예외는 아니었다. 김묵옥의 심정은 아주 우울해진다. 마음씨 좋은 사람이 소개시켜 주어서 그녀는 북경편역국(北京編譯局)에 입사시험을 친다. 뛰어난 일어, 영어실력으로 그녀는 1956년 북경편역국에 들어가서 일어팀에서 일을 한다.


그녀가 막 편안하게 생활하기 시작했다고 느낄 때쯤 '반우'운동이 벌어진다. 1958년 2월초의 어느 저녁, 10여명의 경찰이 돌연 집안으로 쳐들어온다. 그리고 그녀를 체포한다. 3개월후, 그녀는 노동개조대로 압송된다. 원인은 그녀의 친구가 중국공산당에 밀고했기 때문이었다. 김묵옥이 자주 일본에서 부쳐오는 돈과 옷을 받았다는 것이다. 원래 김묵옥은 신분이 아주 민감했다. 그녀의 언니가 '한간'인 것을 제외하고도, 그녀의 오빠인 김헌립(金憲立)은 신중국이 건립된 후 일본으로 도망쳐서, 중국공산당의 불만을 샀다. 그런데 누가 밀고하니 바로 그녀를 체포한 것이다.


6년후 중국공산당이 '사청(四淸)'을 시작할 때, 노동개조영에서 일하고 있던 김묵옥은 대장에게 사무실로 불려간다. 대장은 이렇게 선포한다: "김묵옥, 조사를 거쳐, 현재 너를 유기징역 15년에 처한다." 이날부터 그녀는 '반혁명죄'로 유명한 진성감옥(秦城監獄)에서 수형자로 지내게 된다.


문혁때, 감옥에서 김묵옥은 이혼신청서를 받는다. 김묵옥은 마만리가 연루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혼에 동의한다.


1973년, 김묵옥은 형기가 만료되어 출옥한다. 그리고 천진의 차전(茶澱)농장에 배치되어, 농사를 짓고 오리를 기른다. 나중에 농장의 한 전문가인 시유위(施有爲)와 가정을 이룬다. 1976년, 남편을 따라 상해로 친척방문을 하러 갔다가 병으로 쓰러진다. X선으로 살펴보니 그녀의 9번째 척추가 손괴되었다. 병력은 '척추골질증생, 골수염, 허리근육손상"이었다. 그 후 농장은 병으로 퇴직시키고, 매월급여는 19위안2각으로 줄어든다. 그래서 생활이 아주 힘들게 된다.


김묵옥은 1979년 등소평에게 서신을 보내어, 일을 달라고 한다. 얼마 후, 그녀는 조사위원으로부터 조사를 받은 후, '평반통지서(平反通知書)'를 받는다. '평반(명예회복)'후 그녀는 북경문사관(北京文史館)에 배치되어 관원이 된다.


1996년, 78세의 김묵옥은 낭방(廊坊)개발구에 '애심일어학교'를 만든다. 나중의 '동방대학성'이 바로 이 학교의 기초 위에서 설립된 것이다. 2014년, 95세의 김묵옥이 북경에서 사망한다. 그녀와 동시대의 사람들은 모두 그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