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초기)

육건장(陸建章): 북양군벌의 망인(妄人)

중은우시 2019. 1. 22. 23:00

글: 습문객잔(拾文客棧)





북양군벌의 장군들 중에서, 육건장은 대단한 인물이 못된다. 멍청하게 죽은 것을 제외하면 그는 그저 악독한 것으로 유명할 뿐이다. 당시에 "육도백(陸屠伯)"이라고 불리웠다. 북양난세의 혼란은 망인이 자랄 토양이 된다. 북양군벌의 '두목'들이 가장 쓰기 좋은 '칼잡이'가 되는 것이다. 육건장의 각종 악행은 지나치면 지나치지 부족하지는 않았다. 이 "집법처 처장"은 문제를 잘 해결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을 잘 해결하는 사람이었다. 이 점은 윗사람들에게 유용했다. 그래서 감녕지역(贛寧之役)후 북양군벌이 중천에 뜬 해와 같았을 때, 섬서로 나가서 한개 성을 장악한 위고권중(位高權重)의 독군(督軍)이 된다. 그러나 육건장은 '백랑(白狼)'과 '부평병변(富平兵變)'에서 보여준 모습은 어느 정도 절제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많은 선혈을 손에 묻히는 것이었다. 그리고나서 그는 명성이 형편없는 "변수(辮帥)" 장훈(張勛)의 밑으로 들어간다. 이때의 육건장은 아직도 위세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장훈의 머리로는 이 망인의 야심과 포부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육건장은 또 다른 큰 배로 옮겨탄다: "겉으로 보기에는 돈후하지만 속으로는 욕심이 많은" 풍국장(馮國璋)이다. 북양군벌의 적계(嫡係) 일맥의 양웅(兩雄)중 하나인 이때의 풍국장은 그의 "지천(芝泉, 段祺瑞)" 동생과 남방의 전쟁이냐 화의냐의 문제를 놓고 이미 극도의 긴장상태였다. 민국6년, 유건장은 대리총통 풍국장에게 투신하는 것을 선택한다. '병위장군(炳威將軍)'의 직함을 얻은 후, 직계군벌(直係軍閥) 주화파(主和派)의 장군이 된다. 다음 해 3월, 그가 "토예군(討倪軍)"의 총사령관에 임명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육건장이 암중으로 남방무장세력과 결탁하여 북양군벌에 대적할 것인지 아닌지는 시종 단기서를 우두머리로 하는 환계군벌(皖係軍閥)의 머리에서 가시지 않는 그림자였다. 만일 정말 그렇다면, 육건장은 '북양군벌' 내부의 주화파가 아니라, 권외의 배반자인 것이다.


기실, 단기서의 휘하에는 '소선자(小扇子)'라고 불리는 서수쟁(徐樹錚)이라는 오재(傲才)가 있었다. 육건장은 북양의 노장으로 나 아니면 누가 맡으랴는 태도로 변신하여 풍국장의 '책사'가 된다. 그래서 두 사람은 한 바탕 싸움을 벌여야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육건장이 낸 계책으로 인한 결과는 사람들로 하여금 웃지도 울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총살당하기 3일전, 풍국장에게 전보를 보내여 가까운 시일내에 북경으로 가서 만나겠다고 했다. 당시에 소문이 돌았는데, 그가 천진에 오자 각 독군이 집회를 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천진회의는 환계군벌의 내각에 불리한 것이었다. 그래서 유세할 기회라고 여기고, 위험을 무릅쓰고 서수쟁을 찾아가서 의도를 파악하려 한다. 그러나, 서수쟁은 여러번 부하들로부터 불평을 들은 바 있었다. 자칭 육건장이라는 장군이 자주 '궤이하고 비밀스럽게 결탁하어 선동적인 말을 한다'는 것이다. 그 말이 근거없는 것이 아니라고 여기고, 서수쟁은 결심을 내린다. 계책을 써서 총살하기로. 총살당하기 이틀전, 육건장은 봉군(奉軍)의 주천진사령부의 각 인원들을 만나고 다니면서, 군심을 동요하게 하고 있었다.


결국, 정보를 얻은 후, 서수쟁은 호랑이도 무서워하지 않는 후배라고는 하지만 그는 심시도세(審時度勢)할 줄 알았다. 여전히 이 선배가 절대로 '고의로 결탁하여 선동하는' 행위를 할 것이라고는 생가지 않았다. 그래서 '육장군이 그래도 그 정도로 망녕되지는 않지 않느냐"고 말한다. 육건장은 아마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자신이 평생 매를 길렀는데, 끝에는 매에게 눈을 찔릴 줄이야. 그는 망인이지만 자기보다 더욱 기세등등한 서수쟁을 만났다. 육건장을 죽이기 전에, 서수쟁은 다른 사람들과 상의하지도 않았다. 단기서에게도 보고하지 않는다. 그렇게 한 이유는 자신감도 있었고, 누군가 그와의 옛정을 생각하여 그를 용서해달라고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비록 절차를 따른 것도 아니고, 사전에 단기서에게 보고한 것도 아니지만, 단기서는 사후에 각종 죄명을 붙여 육건장은 죽어야 했다는 공문을 내보낸다. 이를 통해 서수쟁의 행위를 덮어주었다. 구천에서 육건장이 알았다면, 그는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망인이 생존할 수 있는 토양은 그저 강자가 뒤를 받쳐주어야 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