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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초기)

임대옥(林黛玉): 19번 결혼한 상해탄(上海灘)의 전설적인 기녀

by 중은우시 2018. 12. 1.

글: 시빈가(視頻哥)


먼저 얘기할 것은 이 글의 임대옥은 <홍루몽> 소설에 나오는 허구의 그 미인이 아니라, 청말민초에 살았던 진실한 여자이다. 상해탄의 명기(名妓) 임대옥이다.


당연히 임대옥은 그녀의 예명이고, 그녀의 진짜 이름은 이미 세월이 흐르면서 알 수가 없게 되었다(일설에는 그의 본명은 육금보(陸金寶)라고 한다, 그러나 확인할 수는 없다). 그녀에게는 무한한 상상을 하게 만드는 직업이 있었다. 바로 기녀(妓女)이다. 그리고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의 상해에서 이름을 날리던 명기이다. 그 시대에는 이런 일을 하는 것이 그다지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모든 기녀들은 당당하게 자신을 성전했고, 그래야 손님들을 많이 끌어들일 수 있었다. 임대옥은 마케팅을 잘하는 여자였다. 1897년의 상해의 <유희보>에는 그녀를 상해에서 자색이 가장 뛰어난 4명의 기녀중 한 명으로 뽑았다. 그리하여 그녀의 사업은 19세기말에 전성기를 이룬다.


상해탄에 이런 미인이 있으니 당연히 적지 않은 명사들을 끌어모았다. 임대옥은 기녀로서 확실히 남다른 성적을 거두었다.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임대옥이 출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남회현령 왕형방(王蘅舫)이 그녀의 미색에 홀려서, 거액을 들여 그녀를 위해 아름다운 집을 지어준다. '금서장교(金西藏嬌)'로 상해가 떠들썩했다.


둘째, 당시의 명류인 정숙문(鄭叔問), 심연전(沈硯傳), 장자필(張子苾), 역실보(易實甫)등은 모두 임대옥이 기원으로 불러들여서 좋은 술과 요리를 주면서 잘 대접했다. 이들 문인들은 자신이 이익을 보았다고 여겼겠지만, 임대옥에게 자유를 제한당하고 그녀와 한달여 즐기고난 다음에 다시 풀려났다.


셋째, 나이 40이 된 임대옥은 하마터면 청나라 고관이자 출양오대신(出洋五大臣)중 하나인 단방(端方)의 첩이 될 뻔했다. 1905년, 단방이 출국하며 상해를 지나는데, 임대옥의 방명을 듣고, 그녀를 자신의 행원(行轅)으로 불렀다. 단방대인은 임대옥을 보자마자 바로 본색을 드러냈다. 임대옥을 첩으로 삼고 싶어한다. 그러나 단방의 좌우에서 워낙 말리는 바람에 결국 포기하고 만다. 전해지는 바로는 임대옥이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원래 유혹해서 그를 끼고 욕정을 풀려고 했었다."


넷째, 민국7년(1918년), 이미 반백이 된 임대옥이 다시 기원으로 돌아온다. 마지막으로 패를 내걸었을 때, 상해 <신문보>의 총경리 왕한계(汪漢溪)는 그녀를 띄워준다. 그녀를 위해 1면광고를 내고, 큰 글씨로 "소상관주노임대옥중행출산현가응징(瀟湘館主老林黛玉重行出山弦歌應徵)"의 16글자이다. 사람들의 눈길을 확 끌었다. 상해기원은 원래 신문에 광고를 내지 않는데, 왕선생이 이렇게 띄워주자 임대옥의 사업은 확실히 덕을 보게 된다.


보라.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후회없이 그녀를 위했는가.


기녀가 노리는 것은 손님 주머니속의 돈이다. 한눈에 반한 것처럼 갖은 아양과 애교를 떨며 잘 받들어 남자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은 다음에 돈을 마구 쓰게 만드는 것이다. 일단 돈이 떨어지면, 그녀들은 차갑게 대하면서 기원에서 쫓아낸다. 어떤 기녀는 여러번 부자를 골라서 시집가는 방식으로 돈을 뜯어냈다. 속칭 '욕(浴)'이라고 한다. 실질적으로는 돈을 편취하기 위해서 거짓으로 기녀를 그만두고 시집가는 것이다.


임대옥에 대하여 당시에 이렇게 기록한 사람이 있다: "임대옥은 여러번 시집갔다가 여러번 이혼했다. 시집간 사람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그녀는 스스로 이것을 '욕'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행동거지가 호방하여, 금방 거액의 빚을 진다. 그것을 갚을 도리가 없게 되면, 적당한 사람을 찾아서 그의 돈으로 부채를 갚는다. 그러다가 집안에 눌러앉아 있는 것이 힘들어지면 다시 나와서 기녀가 된다. 여러번 빚을 지고 갚지 못하여, 여러번 그런 수법을 썼다. 이곳에서 말하는 '욕'이라는 것은 물로 때를 씻어내는 것을 말한다."


임대옥은 창기에서 배우로 배우에서 기녀로 그리고 계속 종량(從良)했다가 다시 출산한다. 일생동안 20여회가 넘는다고 한다. 그 중에서 정식으로 시집간 경우도 19번에 이른다고 한다. 아마도 중국역사상 가장 많이 시집간 여자가 아닐까 싶다.


당시 사람들의 입방아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혼인은 임대옥이 8000금을 받고 남심(南潯)의 부유한 구(邱)씨의 첩으로 들어간 일이다(일설에는 상인 구선사(邱仙槎)의 아들로 이름이 구노오(邱老五)라고 한다. <구계창사행외전>에 이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녀는 구씨의 집으로 간다. 얼마 후, 임대옥은 몰래 물건을 상해로 옮기며 이혼할 준비를 한다. 그 동안 임대옥은 구시의 재봉사 및 친척과도 사통한다. 구시는 임대옥에게 아편을 흡입하도록 유혹하였는데, 그녀는 아편보다도 성욕이 강했다." 구씨는 그녀를 가둬두었는데, 나중에 그녀는 간수와 내통하여 상해로 도망친다. 그리고 모든 장신구는 이미 구씨집에서 상해로 옮겨놓은 후였다.


사람들은 "표자무정(婊子無情), 희자무의(戱子無義)"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임대옥도 한 남자에게만은 진심을 다한다. 그 남자는 용소운(龍小雲)인데, 마지막에는 그 남자에게 배신당한다.


민국초기 이미 나이가 적지 않은 임대옥은 용소운이라는 청년배우를 마음에 들어 한다. 그리고 전력을 다하여 그를 도운다. 그에게 옷과 먹을 것을 보내ㅜ고 그를 위하여 스승을 구해서 중국어와 영어를 가르치게 한다. 그때의 배우는 기녀와 마찬가지로 모두 하구류의 직업이다. 현재와 같지 않다. 노래를 몇 개만 잘 불러도 장군이 되는 시기가 아니다. 기녀가 뜨고 싶으면 돈있고 권세있는 사람들이 받쳐주어야 하고, 희자(극의 배우)가 뜨려면 역시 돈있고 권세있는 사람이 받쳐주어야 한다. 다만, 기녀 한 명이 희자 한 명을 띄우는 것은 그 자체로 대단한 일이다. 임대옥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빛난 미래를 위하여, 친히 나서서 강소도독부에 손을 쓴다. 돈도 적지 않게 썼고, 몸도 적지 않게 바친다. 그래서 마침내 그녀의 애인인 용소운이 한직을 하나 얻게 된다. 그러나, 강소도독부의 다른 동료들이 모두 그를 공격한다. 그는 원래 창희(唱戱)인데 "누나"(즉 임대옥)도 기녀이다 이런 사람이 군대에 들어오게 놔두면 우리같은 정규군이들은 체면이 뭐가 되느냐고 따진다. 그 결과 용소운은 출근한지 며칠 지나지 않아 해직되고 만다.


일자리를 잃은 용소운은 이 '누나'는 이제 쓸모가 없어졌다고 여긴다. 그녀를 따라다녀도 별 볼일이 없다고 여겨서 바로 그녀를 떠나버린다. 그리고 다른 젊은 기녀의 품에 안긴다. 위의 나머지 절반이 맞아떨어졌다. "희자무의" 임대옥은 이렇게 남자에게 한번 배신을 당한다.


이렇게 한때 잘나가던 여인도 인생의 결말은 처량하고 비참했다.


1919년의 어느 날, 상해 남경로 대광리 생생미술회사의 한 낡은 정자의 방에서 유명한 노부인이 병석에 웅크리고 처량하게 죽는다. 사후에 아무도 그녀의 시신을 수습해주지 않았다. 그 고독하게 죽은 노부인이 바로 한때 상해탄에 이름을 날리던 임대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