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태평천국)

공포영화보다 잔인했던 태평천국의 내분

by 중은우시 2019. 4. 17.

글: 반경(潘京)


금전의거(金田義擧) 때부터 남경을 점령하기까지 태평군은 아주 짧은 시간밖에 들이지 않았다. 그 후에 임봉상(林鳳祥)의 북벌이 지원을 받았더라면, 아마 더 큰 전과를 거두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설사 청나라조정을 몰아냈다고 해도 뭐가 달라졌을 것인가? 입국사상은 아주 황당무계하여 완전히 피비린내나는 폭력으로 통치를 유지했던 홍수전(洪秀全)에게 권력은 그저 사욕을 채우는 도구였다. 최종적으로 성공하였다 하더라도, 그저 국가를 더욱 침중한 재난에 빠트릴 뿐이었고, 백성들은 더욱 처참한 생활을 이어갔을 것이다.


이전에 역사책에서는 항상 태평천국을 압박받은 농민의 반란으로 얘기했다. 어떤 글에서는 홍수전을 구세영웅으로까지 칭했다. 그러나, 사실상, 금전의거는 그저 홍수전이 광서 계평에서 더 이상 선교할 수 없게 되고, 관병의 토벌을 당할 처지에 놓이자 어쩔 수 없이 벌인 일이다. 관핍민반(官逼民反)의 유형이 아니었다. 그들이 선교한 배상제교(拜上帝敎)의 핵심은 사람들이 그를 하느님의 아들이자 예수의 동생이며, 세상의 운명을 주재한다고 믿게 하는 것이외에 남은 것은 바로 사람들이 그를 따라 정권을 탈취하여 그의 왕조를 건립하는 것이다. 선교의 편의를 위하여, 그는 성경의 내용을 대량으로 고쳐서, 사람들을 우롱하고 선동했다. 이런 방식은 사교와 다를 바가 없다. 그 본인은 극도의 사치와 향락을 누렸고, 그를 위해 봉사하는 많은 생활기구를 만들었을 뿐아니라, 하루종일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것에서 자신의 손을 쓸 일이 없었다. 모든 천왕부(天王府)의 여성들은 심지어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볼 수도 없었다. 그리고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매를 맞거나 욕을 먹거나 죽임을 당했다. 이런 방식은 농민군의 우두머리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백성을 도탄에서 구해주는 영웅과는 나란히 논할 수가 없다.


호적은 이렇게 말했다. 역사는 사람들이 마음대로 꾸밀 수 있는 어린 여자아이라고. 그 말이 맞다. 그러나 역사는 완전히 사람들이 마음대로 꾸밀 수 있는 어린 여자아이만은 아니다. 역사자료가 부족할 때는 역사가 진상에서 멀어지게 된다. 그러나 일단 증거가 나타나면, 진상은 사람들의 눈앞에 펼쳐지게 된다. 예를 들어 미화되었던 태평천국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작가 사경천(史景遷)은 그가 쓴 <태평천국.에서, 이런 피비린내의 정도가 공포영화에 못지 않은 '내분' 사료를 공개했다. 그의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1856년 9월 1일 한밤중에, 북왕(北王) 위창휘(韋昌輝)의 약 3천명 노병이 남경으로 온다. 그는 이미 강서전투의 지휘권을 부하에게 넘겨주었다. 진일강(秦日綱)은 천경(天京, 남경)에서 비교적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이때 이미 성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가 데려온 정예병사는 여름부터 진강(鎭江)과 남경성외(南京城外)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부대원들 중 신경써서 고른 자들이다. 진일강은 홍수전의 매부(妹夫)인 뇌한영(賴漢英)과 호이황(胡以晃)을 통해 상황을 파악했고, 다시 홍수전과 몰래 얘기를 나눈 후, 석달개(石達開)가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양수청(楊秀淸)에 성내에 자신에게 충성하는 6천명의 부대를 집결시키기 전에 손을 쓰기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부대는 그동안 갖은 모욕을 받아온 북왕 위창휘의 지휘하에 동왕부(東王府)를 기습한다. 양수청은 비상사태를 대비하여 만들어 놓았던 "공장(空墻)"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참살된다. 진일강, 위창휘가 이전에 홍수전과 약속한 것은 양수청 1명만을 죽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부대원들은 그런 것은 신경쓰지도 않고, 보는대로 죽였다. 남녀, 관직고하, 노소와 직업을 가리지 않았다. 양수청의 수급은 잘려져서 길거라 한가운데의 장대 위에 걸려 있었다


새벽4시경, 동왕부 부근에서 잠을 자고 있던 한 아일랜드인(사건발생전에 양수청을 만난 적이 있는 용병)과 친구는 포화소리에 놀라서 잠에서 깬다. 두 사람은 즉시 큰 길로 나 있는 대문으로 달려가시만, 길거리에는 진일강, 위창휘의 부하로 가득했고, 그들이 문을 나서지 못하게 막았다. 두 사람은 날이 밝은 다음에야 길거리로 나가서 동왕부로 갈 수 있었는데, 길거리에는 시신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모조리 2인자(동왕 양수청)의 친병, 부하관리, 악사, 서시(書市)와 종(僕役)들이었다" 군대에서 동왕부를 모조리 쓸어갔기 때문에, 몇시간도 되지 않아 동왕부는 텅 비어 버린다. 


홍수전에 있어서(그리고 위창휘와 진일강도 마찬가지이지만), 눈앞에 놓은 문제는 동왕의 잔당 6천여명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것이다. 그중 대부분은 모두 자형산(紫荊山)에서부터 입교했고, 남경의 곳곳에 분포되어 있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충성스러운 배상제교 신도였다. 최소한 5년이상이다. 다만, 그들이 양수청에 충성할 것인지, 아니면 홍수전에 충성할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리스크를 안고 그들의 행동거지를 파악해서 처리할 수도 있고, 아예 한번 시작한 김에 깔끔히 제거해 버릴 수도 있다. 홍수전은 북왕등 장수들과 상의한 후, 리스크를 안지 않기로 결정한다. 그들의 계책은 아주 악독했고, 아주 효과적이었다. 


천왕은 조서를 반포하여 분노한 말투로 동왕부에서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버린 피비린내나는 행위를 규탄하며, 북왕 위창휘, 진일강을 붙잡아 천왕부의 궁문앞에 무릎꿇게 한다. 천왕부의 여관(女官)은 길이 2미터의 노란 비단위에 주사(朱砂)로 쓰여진 조서를 붙이는데, 그 내용은 두 사람에게 오백대의 곤장에 처하는 것이었다. 이런 혹형은 자형산에서 반도(叛徒)를 처벌할 때 쓰던 것이다. 천왕부의 여관은 천왕부의 문앞에서 그 내용을 읽었고, 어떤 사람은 곁에서 듣고 있고, 어떤 동왕의 잔당은 앞으로 나가서 공고된 조서를 읽었다. 동왕의 잔당들은 북왕이 형벌을 받는 것을 구경하러 몰려든다. 장소는 천왕부 내였다. 천왕부를 출입할 때는 무기를 지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모두 무기를 문밖에서 풀고 들어와서는 중정(中庭) 양쪽의 장형 대청안에 기다리고 있었다. 위창위, 진일강 두 사람은 천왕부의 마당에 꿇어앉아 있었다. 곤장을 막 그들 두 사람에게 내려치려고 하자, 동왕의 잔당들은 앞다투어 앞으로 몰려가서 구경하려 했다. 동왕의 잔당들이 거의 다 도착하자, 크고 작은 문이 모두 닫힌다. 그리고 곤장형도 중단된다. 양수청의 잔당들은 함정에 빠진 것이다. 독안에 든 쥐처럼.


다음날 새벽, 동왕의 잔당들이 갇혀 있던 대청의 문과 창이 열린다. 그리고 폭약더미가 갇혀있는 사람들 속으로 던져진다. 출구는 물샐틈없이 막아 놓았다. 그 후에 병사들이 대청으로 난입하여 갇혀있던 자들을 모조리 죽여 버린다. 반항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또 다른 대청에서는 갇혀 있던 자들이 벽에서 벽돌조각을 떼어내어 결사적으로 항거했다. 6시간정도가 지나서야 비로소 완전히 전멸시킬 수 있었다. 도살자들은 화총이외에 2파운드 무게의 포도탄도 쓴다. 동왕의 잔당들은 거의 힘을 다해서 죽는다. 마지막으로 서열5위(북왕 위창휘)와 서열7위(진일강)는 부하들로 하여금 동왕 양수청의 잔당들과 구분하기 위하여 오른팔을 걷게 한다. 그 후에 쳐들어가서 나머지 잔당들을 모조리 죽여버린다. 시간이 지나서 우리(아일랜드인과 친구)는 대청으로 걸어들어갔다. 정말 참혹해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 어떤 곳에는 사람의 시신이 5,6명 높이로 쌓여져 있었고, 어떤 사람은 목을 매었고, 어떤 사람은 폭탄에 새카맣게 거슬렸다. 시신은 모조리 공터로 옮겨 놓았고, 땡볕에 방치되어 있었다. 그후 전체 남경성은 집집마다 조사를 해서, 집에 살고 있는 남녀노소가 몇명인지를 확인했고, 모든 사람은 소패(小牌, 印記를 새긴)를 맏았다. 만일 동왕의 사람이 발견되면 바로 체포된다. 이들은 5인1조, 10인1조, 100인1조, 1000인1조로 형장에 끌려가서 목이 베어졌다. 부녀자와 아이들도 화를 면하지 못했다. 몇 주간이나 이런 일이 계속되었고, 동왕과 관련이 있는 사람은 모조리 재앙을 맞는다.


위창휘와 진일강은 이 정도로 사람을 죽이고도 만족하지 않았다. 살육은 3개월간 지속된다. 수천명이 죽음을 당했다. 그중에는 동왕부에서 일하던 궁녀와 여용(女傭) 5백명도 포함되어 있다.


익왕(翼王) 석달개는 무창(武昌) 부근에서 급히 남경으로 갔다. 거리가 위창휘나 진일강보다 훨씬 멀었다. 그는 10월초에야 천경에 도착한다. 도중에 이미 이 엄청난 대도살에 대하여 들었다. 석달개는 분기탱천하여 북왕 위창휘를 보자마자 면전에서 너무 심하게 주살했고, 이런 행위는 관군을 도울 뿐이라고 질책한다. 위창휘도 대노하여, 석달개도 아마 양수청의 사람인 것같다고 말하고, 심지어 그가 이미 조정을 배신하고 청나라에 투항한 것같다고까지 말한다. 석달개는 친구들로부터 그도 피살당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고, 성문이 닫힌 것을 알았다. 이는 그에게 불리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석달개는 남경성에 들어간 당일에 성위에서 줄을 매달아 성에서 빠져나온다. 그날 밤, 위창휘와 진일강은 익왕부를 포위하고, 문을 부수고 진입한다. 그러나 석달개는 이미 도망친 뒤였다. 그리하여 석달개의 처자식과 식솔들을 모조리 죽여버린다.


석달개는 서쪽으로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그에게 충성하는 부대와 위창휘등에 불만을 품은 부대를 소집한다. 그리고 삼합회9三合會)의 각로인마도 모은다. 석달개는 나이가 젊었지만, 태평천국의 장수들 중에서는 확실히 군심을 얻고 있었기고, 재능이 있어서 10만대군을 호령할 수 있었다. 석달개는 이들 대군을 등에 업고, 다시 장강의 교통편의를 이용하여, 다시 천경으로 돌아간다. 그리고천왕에게 말한다. 위창휘와 진일강의 수급을 봐야겠다고. 북왕 위창휘는 그 소식을 듣고 즉시 진일강을 보내어 석달개의 부대가 전진하는 것을 저지하고자 한다. 긜고 고보은사(古報恩寺)를 파괴하여, 석달개가 이 고지를 차지하고 천경에 포격을 가하는 것을 막으려 한다. 위창휘는 또한 홍수전을 연금하고자 계획하나, 성공하지 못한다. 홍수전은 친병들로 하여금 위창휘를 죽이게 하고, 위창휘의 수급을 석달개애게 보낸다. 얼마 후, 진일강도 성으로 유인되어 피살당한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석달개의 가족과 친구들의 목숨을 다시 가져올 수는 없었다. 그래도 최소한 위로는 되었다. 1856년 12월 석달개는 다시 천경으로 들어간다. 영웅의 개선과도 같은 환영을 받았고, 장면은 아주 장엄했다.


석달개가 천경으로 되돌아 왔을 때, 이 아일랜드인과 친구는 떠나기로 결정한다. 그들은 이미 충분히 겪을만큼 겪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라는 것을 봤다. 참수하는 것이 다반사가 되어 버렸다. 우리는 이들 반란군들이 자기들 하고 싶은대로 놔두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사경천의 서술은 간우문(簡又文)의 <태평천국혁명운동>, 가온(柯溫)의 <태평기의.이수성자술>, 글라크와 그레고리의 <서방인의 태평천국에 관한 보도문선>, <중국육상친구>등의 사료를 인용했다. 그 중의 사망자수는 사경천이 가장 보수적인 숫자를 인용했다. 당연히 최종적으로 천경성이 함락되고, 십여만의 태평군이 불에 타고, 피살된 것과 비교하면, 내분으로 죽은 인원수는 훨씬 적다. 그러나, 피비린내나는 사실은 증명해준다. 이렇게 미친 행위는 그저 봉건시대에나 있을 법한 것이고, 세계의 다른 나라가 이미 산업협겸에 들어간 문명시대에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